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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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인원 이전과 교화의 계승

3. 종행정의 변혁과 교법의 체계화

6) 스승의 동정과 심인당 신개축


(1) 스승의 동정

종단이 연륜을 쌓으면서 초기 스승의 열반을 많이 맞게 됐다. 종의회 의장과 통리원장을 역임한 아당이 지병으로 열반에 들었다(27,5.7). 원오제 스승과 함께 초기 종단의 교화에 크게 기여를 한 후 기로에 진원한 실상행이 열반에 들었다(31,1.18). 총인원과 기로원에 주석하던 원오제가 세수 90세, 법랍 32년으로 열반에 들었다(36,1.19). 원의회에서 종사에서 대종사로 추서하고 종단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결의했다. 원오제 대종사 장의위원회를 증명 원정각 총인, 위원장 장명 통리원장 등으로 여법하게 구성하고 통리원 대강당에서 고결식을 거행했다(36,1.25). 

 

도흔이 종권파동으로 퇴직 결의를 받았으나(35,5.15) 다시 복직되어(36,11.16) 광주 남선심인당으로 전보됐다(36,11.25). 이로써 종권파동은 완전히 수습됐다. 교화 일선에서 활동할 스승은 수시로 임명됐다. 그 중에서 특별한 사실은 미국 LA 불광심인당을 개설하고 지현을 주교로 임명한 일이었다(44,7.31). 지현은 종단의 첫 해외 파견 교직자로서 불광심인당에서 교화에 임했다. 지현은 불광심인당에서 교화 중에 해외의 이점을 살려 대북(對北) 활동도 상황에 맞추어 벌였다. 향후 종단의 대북 활동은 지현의 역할이 매우 컸다. 또한 종립 심인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백봉을 대원심인당 주교에 임명한 일이었다(40,11.12). 백봉은 심인고 교장 역임 당시 학교의 문제로 권고 사임해 교육원에서 근무하는 중 교화 일선에 임명됐다. 백봉은 일선 심인당에서 교화하면서 스승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자진 사임했다(44,4.23). 종단 스승의 양성과 임명이 매우 중요한 사실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종단의 역사가 쌓이면서 초기 교화의 스승이 열반에 드는 일이 많아졌다. 초기 교화에 힘쓰고 기로에 진원해 수양하던 혜공이 자택에서 열반에 들었다(39,4.17). 혜공은 종조의 여동생 자회심의 부군으로 교화 초기에 종조를 도와 종단발전을 위해 정진했다. 종단의 총인 권한대행, 통리원장, 종의회 의장, 사감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종단의 안정과 발전에 정진한 혜공은 노령에 와병 치료하던 중 열반에 들었다. 종단은 혜공의 장의를 종단장으로 결정하고 장의위원회를 구성하여 장의를 집행했다. 

 

원정각 증명, 혜일 장의위원장으로 구성한 장의위원회는 대구 희락심인당에서 고결식을 거행하고 칠곡 장지에 유택(幽宅)을 마련했다. 진기 원년에 입교해 범찰심인당에서 교화하고 기로원에 진원해 수행하던 송복이가 열반했다(42,6.3). 송복이는 교화 중에 삭발 출가하는 등 수행과 교화에 용맹정진했다. 

 

교화스승의 열반과 신임 스승의 증가로 스승의 친화와 소통의 필요성이 높아갔다. 통리원은 스승의 친목과 협동정신을 고취시키고 체력단련을 강화하려는 취지로 스승 한마음수련회를 마련했다. 한마음 수련회를 통해 스승 사이의 친화력을 높이고 법담회를 활성화하는 등 종단화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경주 각성심인당 헌공불사에 맞추어 제2회 스승 한마음수련회를 경주 온천관광호텔 잔디밭에서 개최했다(45,5.23). 스승 한마음수련회는 모든 스승이 참여할 수 있는 운동 놀이 등 다양한 종목으로 청백 두 팀을 나눠 진행됐다. 수련회는 원로스승이 수여하는 시상을 끝으로 환희한 마음으로 회향했다. 

 

한편 대안화의 회갑기념 사회집 ‘밀행삼매’ 출판기념회가 선화동 송정클럽에서 열렸다(41,9.26). 밀행삼매는 지현, 자혜원 등 후학이 스승의 회갑을 기념하고 공덕을 기리기 위해 스승의 법문과 일화를 모으고, 후학과 신교도의 글을 묶어서 편집했다. 출판기념회는 스승과 신교도, 또한 인연있는 인사 200여 명이 참석해 축가와 축사, 사회집, 봉정 등 다양하게 진행되어 흐뭇한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출판기념회는 회갑연 등 현실 행사를 금지한 종조의 뜻에 비추어 적잖은 논란도 낳았다. 


(2) 심인당의 신·개축

총인원 인접부지를 매입해 2층 건물을 지어 종무원이 입주했다(36,4.20). 유치원 건축을 위해 초기부터 건축자재 제작과 창고로 사용하던 2층 건물을 철거하고 총인원 경내를 정비했다(36,9.3). 총인원 정문을 이전 건립하고 남쪽 도로 인접의 부지에 유치원 반지하 1층, 지상 1층의 건물을 신축해 지상 1층은 유치원, 지하 1층은 창고 등으로 사용하고 총인원 서북쪽 경계담이 인접해 현대식 온실을 지었다(37,10.26). 총인원 인근 부지에 월곡동 점포 3층 건물을 완공하고 3층은 스승과 종무원의 주거로 하고, 1∼2층은 점포로 임대했다(37,12.20). 월곡동 점포의 임대 수익금은 스승 자녀 장학금 조성에 사용했다. 종단은 혼란을 겪어도 교화는 그나마 조금씩 발전했다. 서울 서남지역 교화를 위해 능인심인당 교도를 주축으로 개설한 실상심인당의 건물을 2층으로 증축하고 2층은 심인당과 자성학교, 1층은 사택 등으로 사용하기로 했다(27,6.14). 영등포 지역의 교화에 크게 기여한 능인심인당이 노후해 구건물을 철거하고 신축하고 헌공했다(27,11.27). 그간 통리원 건물에서 교화하던 탑주심인당의 건물을 2층 우산각으로 건립하고 헌공불사를 올리고 종단 본부 도량의 위용을 갖추었다(28,12.17). 탑주심인당은 2층은 심인당, 1층은 대강당과 부대시설로 사용했다. 충북 북부의 교화를 담당하던 장엄심인당이 건물이 노후하고 점포 공용으로 교화에 불편한 일이 많아 부지를 따로 매입해 사택과 심인당 2층을 신축해 헌공했다(37,11.22). 장엄심인당 건물의 2층은 심인당, 1층은 자성학교 겸 유치원으로 사용했다. 

 

대구지역의 교화도 구경심인당을 개축하는(28,9.12) 등 진전을 보였다. 승원심인당(31,12.30)과 불승심인당도(32,12.19) 2층 우산각으로 개축하여 도량의 위용을 갖췄다. 그러나 의밀심인당은 슬라브 1층으로 개축하고 사택을 지었다(32,12.19). 한편 구미지역의 교화를 개척하기 위해 구미시 원평동 946의 494에 대지 236평을 매입해 우산각 2층과 사택 1동을 건축하고 보광심인당을 개설해 헌공했다(33,3.21). 또한 남산동심인당에서 집행하는 종단 행정업무를 옮기기 위해 매입해 둔 복현동 대지에 2층 건물과 사택 1동을 지어 경전(敬田)심인당을 개설하고 헌공불사를 봉행했다(36,10.21). 안동지역의 교화를 위하여 대지를 매입하여 건축하고 옥정(玉淨)심인당을 개설했다(37,12.27). 

 

대전지역의 응화심인당이 노후해 개축하고(27,9.21) 나아가 득도심인당이 노후하고 협소해 개축하고 헌공했다(28,8.31). 부산 동래의 화친심인당의 교화가 크게 발전해 동래구 명륜동에 164평의 부지를 매입, 우산각 2층 건물을 신축하고 명륜(明輪)심인당을 개설해 헌공했다(27,11.21). 범석심인당의 시설이 협소하고 불편해 3층의 건물을 지어 교화에 편리하게 했다(31,12.15). 정정심인당의 여유 부지에 3층 상가 건물을 지어 스승의 수생사업을 위해 임대하기로 했다(37,10.26). 경남 밀양의 수계심인당의 위치가 불편해 밀양시 삼문동에 대지 212평을 매입해 우산각 2층 건물을 지어 심인당을 이전하고(33,1.4) 옛[구(舊)] 심인당은 처분하기로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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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종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