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신문

“저에게 불공은 자연스러운 일과였습니다”

입력 : 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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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s://milgyonews.net/news/detail.php?wr_id=40244
작성 : 밀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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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모친은 포항 위덕심인당과 증일심인당에서 교화하신 입법정 전수님입니다. 덕분에 어린 시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당연히 심인당에 가야 했고, 매일 같이 정송도 해야만 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과였지요. 전수님께서 포항 증일심인당에 계실 때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 심인당에는 20가구가 넘는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쟁 후에 사회적으로 가난과 병고 해탈이 꼭 필요했던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너나없이 믿음이 필요했던 때였습니다. 

 

저의 모친께서도 전쟁 후에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자 용맹정진하셨고, 그때 저희 모친을 오래 지켜봐 주셨던 스승님이 교화의 길로 인도해주신 걸로 압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늘 수행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심인당의 스승님들이 선각자의 역할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병원과 연결해 주시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시기도 하셨죠. 저도 10살 때쯤인가 눈병이 나서 고생했는데, 그 때 스승님께서 병원을 알아봐 주시고 경주까지 직접 데려가서 치료를 받게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나이가 조금 더 들어 학업을 위해 홀로 대구에서 생활했던 시절이 저의 신행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때 인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자취를 하면서 학업을 이어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는데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신천동(시복) 심인당, 동인동(승원) 심인당, 남산동(희락) 심인당, 대명동(구경) 심인당을 찾아 많은 스승님을 뵙고 배웠으며, 청년회 선배님들이 잘 이끌어 주셔서 즐겁게 신행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특히 부산이나 경주에서 학생회 캠프를 진행하면 각 교구 스승님들이 직접 음식도 해서 전해주시고, 아이들을 살펴주시고 했던 기억이 참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모친께서는 교화에 전념하시느라 심인당을 잘 비우시지 않았고 1년에 한, 두 번 뵙는 것이 다였습니다. 춘·추기 스승강공을 위해 심인당을 비우면 그제야 오고 가시는 길에 들러보시곤 하셨지요. 그 시절 모든 스승님들이 그렇게 교화 현장에서 절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포교와 교화에 앞장서 주셔서 지금의 진각종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심인당에서 지내는 시간이 자연스러웠고, 매일 같이 수행하다 보니 그 시간이 쌓여가면서 스스로 믿음이 굳건해진 것 같습니다. 저희 집안 가족·형제들이 많아서 어릴 때도 큰 집, 작은 집 등 여러 곳을 찾아 자는 날도 많았는데 집을 떠나서라도 정송은 빼놓지 않고 실천했고, 지금도 어딜 가든지 꼭 지킵니다. 누군가가 시켜서도 아니고 그냥 당연히 해야 하는 일과가 되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중년의 나이가 되고 돌이켜 보니 큰 어려움 없이 내가 이루고자 했던 일을 잘 이룰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내가 욕심나는 일이 있어서 욕심을 내면서 서원을 하면 또 잘 이뤄지지 않아요. 아마 탐심이 생겨서 그렇겠죠. 그게 바로 수행의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욕심(탐심)과 서원(발심)은 또 다른 것 같습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해야 절실한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현실 생활로 봐도 마찬가지죠. 나의 노력이 없이 그냥 이뤄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사업을 시작하고 한창 바쁠 때는 심인당에 갈 시간이 잘 나지 않기도 했습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이어온 정송과 행주좌와 어묵동정 무시항송은 항상 함께했습니다. 사업을 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종교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진각행자임을 알리고, 진각종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려고 노력했지요. 그러다 이사를 하게 됐는데 명선심인당이 바로 집앞에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다시 수행을 열심히 해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때부터 심인당을 자주 찾으려고 했고 그렇게 꾸준히 신행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심인당 금강회 활동을 열심히 한 덕분에, 서울교구 금강회장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회장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된 것 같습니다. 나에게 온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전공과 사회 경험을 살려 조직을 좀 잘 정비해서 서울교구 금강회뿐만 아니라 각 심인당 금강회와도 긴밀히 소통하고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임기 후에도 후배 임원단들이 가끔 찾아줄 때가 있지만, 직접 각자의 소신으로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만 서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또 한동안은 심인당과 멀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스승님들의 허물이 보이기도 하면서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심인당은 찾지 않았지만, 집에서라도 수행은 놓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심인당도 열심히 다니고, 밀교학회 불적답사나 다양한 행사에도 동참하면서 재발심을 하곤 합니다. 

 

이제는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신행생활을 이어갈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도 저는 무척 행복합니다. 행복은 내 마음에 달려 있는 만큼 내 심공 열심히 하고, 편안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곧 행복이요,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각종은 처처불공, 시시불공으로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심인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분명히 대중화될 수 있다고 봐요.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은 누구나 쉽게 외울 수 있는 진언입니다. 마음공부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현실 생활을 제쳐두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활과 근기에 맞춰 불공하고 실천함으로써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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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한국밀교학회 실크로드 하서주랑 불적답사에 동참해 ‘바단지린 사막’에서 자성일 불사를 봉행하고 있다. 왼쪽에서 네 번째가 효일 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