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일 산내 숲속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짧고도 눈부셨다. 오래전부터 꿈꾸어 왔던 길이다. 가는 곳마다 크지는 않았지만 소박하고 아담한 작은 도서관을 꾸려왔었다. 경주에 와서 비로소 온전한 시절 인연이 무르익었나 보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산내 화랑의 언덕 전망대 1층을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숲속 도서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도서관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은 시리도록 지난한 고행과 섬김의 길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말했다. “도서관 일을 하면서 그렇게 행복해하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고 말이다. 숲속 도서관을 개관하던 날, 고행하신 여러분들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고 벅차올랐다. 내 생에 언제 또 이런 영광스런 날을 맞으랴 생각하니 눈시울마저 붉어져 있었다.
도서관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간서치(看書痴·책만 보는 바보)라 스스로 칭했던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에세이스트 이덕무의 일생이 떠오른다.
그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평생을 검서관으로 살았다. 가난하고 높고 쓸쓸했지만 스스로 간서치라 칭하며 평생2만여 권에 달하는 책을 읽은 독서광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소품문에서 책을 읽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첫째는 정신을 기쁘게 하고, 둘째는 잘 받아들이는 것이며, 셋째는 식견을 넓히는 것”이고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은 글자와 함께 하나가 되고, 마음은 이치와 함께 모이게 되니 천만 가지 생각이 일시에 사라져 버린다.”고 말했다.
우리의 삶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삶의 서사가 진실되고 충만하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일단 미쳐야 한다. 그것이 바른길이든 그른 길이든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언제나 타인과 함께 저 너머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삶에 무작정 미치광이가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적어도 세상에 태어나 이름 석 자는 못 남기더라도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떠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사람의 몸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조갑상토(爪甲上土)에 비유하셨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손톱 위의 흙만큼 적다했거늘, 그렇다면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선 출가자의 필독서인 <선요>에는 담설전정(擔雪塡井)으로 설명하고 있다. “눈을 짊어지고 우물을 메우듯이 공부하라.”는 아무리 힘들어도 노력에는 끝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남겨진 과제가 있다. 어렵고 힘든 길은 그 누구도 선뜻 마음을 내어 열정을 다 바쳐 일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그 누군가는 분명히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산내 숲속 도서관 처음 취지대로라면 무인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도서관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는 기존의 방식을 역발상으로 전환하여 활용 방안을 생각해 봐야 한다.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는 도서관 활성화 방안을 조심스레 제안해 본다. 가장 먼저 가까이 인접한 경주교구 각 심인당 자원봉사자들을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본다.
각 심인당 자원봉사자들이 요일과 시간을 정해 돌아가면서 도서관을 관리 운영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화랑의 언덕 전망대 1층에 자리 잡은 숲속 도서관에는 전국 심인당에서 기증한 도서 7천여 권으로 채워졌다. 머잖아 2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한 웅숭깊은 도서관으로 거듭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지역의 힐링 명소로 몸과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명상 쉼터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제2의 국민 간서치가 산내 숲속 도서관에서 나오기를. 먼 훗날 사람들은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화랑의 언덕에 정말 가슴 따스한 숲속 도서관이 있었다고. 그래서 나, 숲속 도서관을 만나 행복했다고. 그 힘으로 오랜 시간 견뎌냈다고.
수진주 전수/홍원심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