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신문

4.북한의 현존사찰-강원도 정양사 (下)

입력 : 201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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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milgyonews.net/news/detail.php?wr_id=30656
작성 : 밀교신문

방광대 정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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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참모습을 보려면 정양사로 가야 한다. 누구나 평생 소원했던 ‘금강산 구경’은 정양사에 갈 때만이 완성된다. 정양사에서는 일만이천 봉우리를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다.
 
정양사는 고대 문화왕국 백제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백제문화의 터전 위에 신라 원효대사의 민중사상이 뿌리내린 곳이다. 금강산의 숱한 신화와 전설이 처음 발화된 곳이다. 도솔천 환생 기도장을 열었던 곳, 팔만구암자 민요가락의 전설이 잉태된 곳이다. 불교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고려 왕건의 첫 기도처(願堂)였다.  
 
조선시대 세조의 행차로부터 정양사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았다. 금강산은 민족의 성지로 인식되었다. 근대 시기에 육당 최남선은 “조선의 국토는 산하 그대로 조선의 역사며 철학이며 시며 정신이다”고 했다. 그의《금강예찬》서문에는 “금강산은 어떠한 의미로든지 조선의 제일이요. 겸하여 세계의 제일이다. 조선뿐 아니라 세계를 통틀어 다시는 짝이 없고, 견줄 리 없는 유일 특별한 천지간의 기적이다. … 시로써 읊을 수 없는 시경이 금강산이다. 붓으로 그릴 수 없는 그림이 금강산이지만, 금강산을 읊은 시를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면 도서관을 하나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고 평했다.  지금까지 쏟아져 나온 금강 예찬의 글과 시, 그림들은 높이로 환산하면 금강산보다 더 높고, 길이로 하면 일만이천 봉을 한두 번 감싸고도 남을 정도다. 하나의 산을 주제로 다룬 작품의 양은 세계 랭킹 1위다.
 
 정양사, 금강예찬의 시작점
정양사 헐성루는 진경산수화의 탄생지다. 이곳에서 문인들의 명작이 탄생했다. 금강산에 대한 표현은 문학보다 그림이 더 충만하다. 겸재 정선은 항공사진도 없이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진경산수를 만든 창시자, 완성자였다. ‘형상에 기초해 정신을 그린다’는 것과 ‘형상을 버려야 비슷함을 얻어낸다’는 산수의 미학은 화성(畵聖) 겸재에 의해 붓으로 펼친 천지조화였다. 금강산의 경치는 그저 경치 좋은 자연을 넘어 조물주가 의도적으로 만든 대작이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묶이지 않는 금강산을 겸재 정선은 “일만이천 봉을 붓 한 번 휘둘러 그려냈다”고 화평을 받았다.
 
조선 철종 때의 안민영은《가곡원류》에서 정양사 헐성루에 올라 “금강은 시로써 읊을 수 없고, 붓으로 그릴 수 없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화가 모리타 류코는 1947년에 “금강산의 경치는 도무지(全然) 상상 이상의 것으로 화가의 머리로는 도저히 구상할 수 없는 그림이다. 우리는 이 진경에 접하면서 드디어 당황하게 되며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된다. 오른쪽을 보아도 그림, 왼쪽을 보아도 그림, 앞도 뒤도 그림이며, 또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변하는 데 있어서 그만 붓을 던질 수밖에 없다”고 자평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단 한 폭의 수작도 남기지 못했다.
 
영·정조 때의 박지원은 "주역을 읽지 않으면 그림을 알지 못하고 그림을 알지 못하면 문장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제, 진경산수화는 옛말이 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험난하고 위험해서 볼 수 없던 곳은 헬리콥터, 비행선을 타고 구경했다. 무인비행장치(드론)가 촬영한 파노라마 영상이 실시간으로 배송되는 오늘날까지도 금강산은 역시 금단의 땅이다.
 
백제시대에 처음 열린 절, 정양사
정양사는 삼한시대, 백제인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유점사본말사지》에서는 “600년(무왕 원년) 백제의 관륵조사와 융운장로가 함께 이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고 정양사라 했다. 그때 관륵은 법기, 파륜의 두 보살상을 조성하고, 융운은 약사여래좌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정양사 창건은 백제 수도승들의 금강산행으로 이어졌다. 그 후 백제의 고승 “무착조사는 630년 7월 정양사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648년 4월에 열반했다.” 또 “신라 문무왕 원년인 660년에 원효대사가 정양사를 재창하고 무착암을 창건했다”고 기록됐다. 원효대사가 정양사를 중창함으로써 금강산의 사찰들은 전국구의 수행도량으로 변모했다.
 
935년에는 “태조 왕건이 정양사에 행차하여 머물면서 표훈사의 53불과 16나한상을 정양사로 옮겼다.” 1326년 조형대사가 약사전을 중수했다. 1349년 가을에 금강산을 찾아간 고려의 이곡은《동유록》에서 “정양암이 있는데, 이곳은 우리 태조가 창건한 암자로 법기보살의 존상을 봉안한 곳이다”고 했다.
 
조선 세조 3년(1457년)에는 “세조가 혜각존자 신미대사에 명하여 해인사 고려판본대장경을 인출하고 1부(6,547권)를 정양사에 봉안했다.” 1465년에는 세조가 친히 표훈사와 정양사를 방문하고, 그해 정양사에 나옹 부도를 다시 세우도록 명했다. 이 시기에 헐성루 등이 대규모로 중수됐다. 17세기 중엽의 이경석은《풍악록》에 “정양사는 금강의 정맥이다. 이 헐성루는 정양의 시원스러운 집(快閣)이다. 여러 절이 마주하고 있는 뭇 봉우리가 모두 이 누각 앞에 있으니 일만이천 봉을 한꺼번에 모은 곳이라 하겠다.” 명종 시기에 보우대사는 임금의 하사금을 받아 다시 보수하고 불경을 비롯한 서적들을 보관했다. 1759년과 1781년에도 헐성루가 중건됐다. 1791년에는 정양사가 크게 중수됐다. 1843년에 헐성루와 약사전이 중수되고 대법당, 현성각 기와를 갈았다. 1923년에도 약사전 기와를 다시 갈았다. 1934년에 대형대사는 정양사 대장경을 포쇄하고 교정을 하는 등 교종 중심의 사찰로 발돋움했다.
 
약사불과 상제보살이 계신 정양사
정양사는 표훈사 뒤쪽으로 2km가량 떨어진 방광대 아래의 정남향으로 자리한다. 만폭동을 굽어볼 수 있는 천일대가 동남쪽에 있고, 진헐대는 경내의 서남쪽, 개심대는 북쪽에 있다. ‘빛을 놓은 돈대’인 방광대는 법기보살이 나타난 곳으로 산봉우리다. 고려 왕건이 금강산에 왔을 때 산 위에서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지며 법기보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하는 배점(拜岾)은 장안사 터에서 정양사로 넘어가는 고개로 배재령(일명 절고개)이다. 
 
현재, 경내에는 반야전과 약사전 그리고 3층 석탑과 6각 석등이 일직 선상에 놓여있다. 석탑은 보물급 문화재 제34호이고, 석등은 제43호이다. 탑과 석등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세운 것이다. 신계사와 장연사 석탑과 더불어 금강산 3대 고탑으로 신라의 탑 형식을 갖추었다, 석등은 탑의 조성 시기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졌다. 고려 초기에 세운 것으로 구조의 정교함과 그윽한 모습은 산중 명물로 유명하다. 반야전 뒤편에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다. 
 
국보 유적 제98호로 지정된 정양사 건물들은 1791년 지어진 것으로 1843년에 다시 중수됐다. 6.25 전쟁 때 심하게 파괴되었으나 1970년대에 다시 복구됐다.
 
고려 왕건이 직접 참배하고 법기보살을 봉안했다고 전하는 반야전은 앞면 3간, 옆면 3간의 겹처마 합각집이다. 충남 수덕사 대웅전과 황북 성불사 극락전·심원사 보광전과 같이 시기의 건물이다. 옛날부터 모셨던 법기, 상제보살상은 전하지 않는다. 그 아래에《대반야경》을 소장했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약사전은 6각형의 팔각당 건물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들보를 하나도 쓰지 않고 기둥 위 안팎으로 공포를 여러 겹으로 짜 올려 천장을 대신한 점이다. 또한 못을 한 개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부에는 화려한 단청을 입힌 만개한 꽃들이 그려져 있다. 육각 평면이라는 건축적 기교와 더불어 지붕 꼭대기의 화강암을 연꽃 모양으로 다듬어 올린 것이 이채롭다. 중앙에는 높이 1m 정도의 석조 약사여래불이 봉안되었다. 육면 안벽에 중국 당나라 때의 화가 오도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지는 불벽화 또 안견의 산수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정양사는 해장용궁(海藏龍宮)으로 불렀다. 조선 명종 때 보우국사가 이곳에 살면서 널리 알려진 사명이다. ‘사악한 마음을 없애고 자성에 드는 문’이란 뜻의 헐성루는 전쟁 시기에 영산전, 명부전, 나한전, 승방인 동선당과 같이 소실됐다. 헐성루에는 ‘봉우리를 가리키는 원뿔 돌기둥’인 지봉대라는 전망 장치가 있어 명물로 알려졌다. 헐성루와 함께 소실되었다.
 
금강산 팔방구암자의 전설
흔히 금강산에는 “일만이천 봉에 팔만구암자가 있다”고 했다. 봉우리의 수는 비슷할지라도 일단 낭설이다. 팔방구암자(八方九庵子)는 “한 사찰을 중심으로, 여덟 방면으로 아홉 개의 암자를 둔다. 길을 낸다”는 뜻이다. 통도사와 해인사, 송광사 등과 같이 규모의 총림일 때 가능하다. 후대에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로 와전된 것이다. 사찰의 위상을 나타내는 말이 사찰 개수로 바뀐 것이다. 팔방보다는 발음상 분명하게 들리는 팔만이 민요 가락으로, 이야기로 전해지면서 생긴 일화이다. 이 전설은 600년 백제의 관륵과 융운대사가 금강산 도솔봉(천일대의 옛 이름)의 산허리에다 팔방구암(八方九庵)을 짓고 ‘정양’이라 이름 붙인 데서 생겨난 말이다. 
 
용왕 아들이 지은 전각, 약사전
약사전은 들보를 하나도 쓰지 않은 육각당이다. 여러 겹을 짜서 올린 연꽃 천장은 나무토막 목침 하나가 비어 있는 상태로 지었다. 1326년 왕사 조형대사가 약사전을 다시 세울 때의 일이다. 어린 소년은 한 번 잃어버린 목침을 불사에 부정한 것으로 여긴 다음, “나는 남해에 사는 용의 아들인데, 사라(斯羅)가 용왕의 명령을 받들고 여기에 왔습니다.” 하고서는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경북 포항시 냉수리의 <신라비>에 보면, 신라인들이 나라 이름을 ’사라‘라고 써 놓은 점으로 보아 신라의 영향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양사는 표훈사에 포함된 암자인데, 워낙 규모가 있어 단독 사찰로 알려졌다. 17세기 중엽, 박장원은 <정양사에 묵으며> 시에서 “오늘 밤 정양사의 경치, 인간 세상에서 다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이처럼 정양사는 낮과 밤의 경치가 모두 경이롭다. 오늘날에는 금강산 4대 명찰의 한 곳으로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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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자료=혈성루와 산봉우리(한국저작권위원회,해제판)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