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신문

63. 실천의 종교

입력 : 201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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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milgyonews.net/news/detail.php?wr_id=30581
작성 : 밀교신문

“지적(知的)철학은 물질문명의 도구요, 실천철학은 정신문화의 도구이다. 머리로 아는 것은 지식이요, 행해서 아는 것은 지혜이다.”(실행론 제4편 제1장 제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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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나무를 심다
앵두는 달다. 앵두꽃은 눈부시다.
 
봄볕을 좇아서 잎을 쑤욱 내밀고 꽃을 피운 앵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가 때맞춰 잘 익은 빨간 열매는 새 생명을 향한 찬가다. 솜털이 보송보송 나있는 어린가지나 잎은 새봄을 알리는 싱그러움의 전령사다. 앵두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은 얼마든지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앵두를 따서 입안에 쏙 집어넣으면 새콤하면서도 달달한 과즙을 한입 내준다. 앵두 한 알이면 순간적일지나 세상만사 시름도 내려놓을 수 있다. 하얗거나, 때로는 연분홍으로 피워낸 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우아한 품격을 갖도록 조언한다. 색신으로 드러난 앵두나무의 의연한 자태를 의지해 누구나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보듬도록 돕는 조력자의 역할도 서슴지 않는다.
 
큰새 한마리가 숲을 뒤덮고 있는 앵두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덥석 한 나무로 달려든다. 새가 머리로 나무를 들이받아 흔들어댄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탐스럽게 익어 있던 앵두가 땅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앵두나무 밑은 금세 붉은 강처럼 변한다. 너무나 잘 익어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던 탓에 겉껍질에서는 자자하게 반들거리는 윤기가 넘쳐난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자태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능선을 따라 구르는 듯, 파도에 떠밀려 다니는 물결인 듯, 바람을 따라 일렁거리는 빛인 듯 보이기도 한다. 둥지 잃은 어린 새들이 어미를 찾아서 재재거리는 발놀림같이도 보인다.
 
앵두나무가 산야초처럼 지천으로 널려 있다고 해서 그저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건, 누구에 의해서건 공들이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그냥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생겨나서 자라고 번성하는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고, 세상사 걱정거리 하나 없어 보이는 갑부 집에서 웃음소리 잘 들리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는 것으로 보면 사는 것 자체가 그냥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저마다의 길이 있는 법이다. 하루를 살건, 천년을 살건, 살아 있는 것마다 생존에 따른 전략이 있고, 그 만의 수단과 방편이 있다는 말이다.
 
산 생명은 저만의 온당한 일생을 거뜬히 견뎌 낸다. 찬란하건, 시시하건, 견뎌낸 일생은 산다는 것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살아낸 과정은 흔적으로 드러난다. 생물이 나이를 갖는 것처럼, 나무가 나이테를 지니는 것처럼…….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호랑이라는 동물도 그것으로 질긴 생명을 이어가는지 모를 일이다. 찢기고, 부서지고, 망가져, 가루처럼 작은 입자가 되어 천지를 날아다니더라도 쉬 사라지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것이 모진 생명이다. 어떤 거대한 힘이나 환경에 짓눌려 한순간 생명을 빼앗겨버린 것들은 뒷날 눈물과 회한으로 버무린 화석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살아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다. 훈장과도 같은 표식이다.
 
살아서 오늘을 살고, 죽어서도 과거와 현재를 살며, 새로 태어나서는 나중을 살더라도, 산다는 것은 즐거움을 누리려는 일종의 행위이다. 긴긴 겨우내 추위에 떨면서 움츠린 몸을 보듬고, 얼어붙은 땅속을 헤집어 물을 잣아 올려 기어이 잎을 내고 꽃을 피워 곱디고운 자태를 드러내는 앵두나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독하게도 아끼는 것에 티가 슨다고 했다. 생존전선에 끼어들 수밖에 없는 고통과 괴로움은 떨쳐내서 멀찌감치 밀어두고 아예 범접조차 못하게 하고 싶은 것이 불문가지다. 하지만 어디 매사가 그렇던가. 싫어서 피하고, 미워서 버리고, 마뜩찮아 없애버리고 싶은 것일수록 밀쳐내면 더 따라오고, 내치면 더 달라붙는 것을…….
 
새는 땅 위로 쏟아져 내린 앵두에 취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린다. 바다에 빠지듯 앵두더미 위에 엎어진 새는 헤엄치듯 두 다리를 쭉 뻗고는 있는 힘을 다해 파닥거린다. 온 몸이 빨간 색으로 물든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한 움큼의 앵두가 입속으로 들어온다. 몸에 짓이기고, 입속에서 터트려진 앵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진한 맛과 향기를 아낌없이 내준다. 호사도 이런 호사는 더 이상 없을 듯싶어 하면서 참을 수 없는 앵두의 유혹에 취한다. 즐거움에 취하는 것은 이렇다.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유혹과 달콤함에 취하면 세상 시름은 안중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마시멜로이야기에서처럼 그 속을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교훈은 여기서도 배울 수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스스로 지니고 있는 끈질긴 생명력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름도 갖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저마다 품고 있는 본래 이름이 있는 것이다. 이름을 지어 주고,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 드디어 새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그 때까지 한 번도 이름이 제대로 불려 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이 그러할진대 왔다가 가고,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생명은 그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억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절과 때를 만나고, 조건을 만나게 된다. 필연적 과정이다. 그래서 만남은 소중하다고 한다. 허투루 만날 수 없고, 함부로 대적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앵두가 베풀어준 호사를 누리며 앵두바다에 취해 있던 새는 잠에서 깨어나듯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새끼들이 생각난 것이다. 호사를 누리며 취해 있을 때는 찰나 같았던 시간이었는데 깨고 보니 한 나절이 다 지나 있었다.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어미가 돌아올 때만을 기다리고 있을 갓난쟁이들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렇다고 걱정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 시간을 더 이상 허비해서도 안 될 말이었다. 오뉴월 뙤약볕을 피해 서늘한 그늘에 드러누워서 노래만 해댔다던 베짱이 일이 남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놀기만 한다며 욕하고 나무랐던 자신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 일이 아니다 싶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럴만한 입장이 아니라는 현실도 직시할 수 있었다.
 
큰새는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걱정하며 얼른 날아가고자 했다. 앵두더미에 다시 고개를 처박고 입속 가득 앵두를 빨아들였다. 거칠 것이 없었다. 입이 터질 지경으로 앵두를 머금은 새는 둥지가 있는 곳을 향해 날갯짓을 시작했다. 앵두더미를 날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뒤뚱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앵두를 너무 많이 먹은 탓일까, 입속에 머금은 앵두가 너무 많은 탓일까. 새끼들을 생각하며 새는 다시 안간힘을 다해 날기를 계속했다. 새끼들의 즐거움을 위해 어미의 고통과 수고로움을 되새기면서 더욱 힘을 냈다.
 
앵두를 물어다가 둥지 주변에 심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이 나무, 저 나무, 이 숲, 저 숲, 먹거리를 찾아 옮겨 다니면서 주어진 열매를 따먹게만 할 것이 아니라 과실나무를 심어주려는 믿음이 발동한 것이다. 먹거리를 한입한입 물어주기보다는 대대로 누릴 수 있는 자양분을 공급해준다는 기분에 우쭐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앵두가 땅에 떨어져 새싹이 돋고, 그 싹이 자라나 앵두나무로 성장할 것을 생각만 해도 흐뭇했다. 훗날 앵두가 주렁주렁 매달리게 될 때 후손들이 누릴 호사를 생각하면 지금, 잠깐의 힘듦과 고통은 한때의 시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는 훨훨 가뿐하게 날아서 둥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