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신문

62. 심인진리의 생활화

입력 :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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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milgyonews.net/news/detail.php?wr_id=30514
작성 : 밀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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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진리를 생활화해야 한다. 깨달은 사람은 남을 제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남을 제도하는 것은 희사 염송 교리 등 여러 가지 방편으로 끝까지 힘을 쓰는 것이다. 행복이란 보이는 곳에서는 항상 부모에게 효순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서는 항상 불(佛)의 진리를 깨치는데 있다. 이것이 심인불교의 가르침이다.”(실행론 제4편 제1장 제3절)
(콩트)
 
나도 부처… 너도 부처…
업(業) 덩어리가 쌓였다. 심인당에는 진언행자들이 내려놓고 간 업 덩어리가 가득했다. 자성일인 일요일이면 정도는 더 심했다. 버려도,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업 덩어리라 했던 성현들의 말이 사실로 증명되는 듯 했다. 사람이 하루하루 살아내고 생활하는 것 자체가 업 덩어리라는 말도 여실하게 설명해주고 있듯이…….
 
그렇다고 업 덩어리를 걷어 내거나 따로 치울 필요는 없다. 굳이 일꾼을 사서 청소를 한다든지 수선을 떨 일도 아니다. 업 덩어리는 빈 하늘에 저절로 일어났다가 멸하는 구름 같은 존재다. 바람 따라 뭉쳐지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구름에 다름 아닌 현상인 것이다. 단지 구름과 다른 점은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 상황이 그러하니 자기 눈에는 물론 남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이 폐단이다. 업 덩어리가 쌓이는 것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렇다고 업 덩어리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업 덩어리가 쌓여 있는 상태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스스로 짐작하는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일과 행을 돌이켜 보면서 성찰하는 가운데 마음의 짐을 미루어 짐작해 알아채는 방법이다.
 
알고 짓는 업 덩어리와 모르고 저지른 업 덩어리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
 
보살은 찰나를 놓치지 않고 궁금증을 되새기고, 되새겼다. 난데없는 업둥이 생각도 흘깃 들었다. 업둥이가 들어오는 것도 결국은 인연의 소치일터, 이 또한 업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이런저런 온갖 잡념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럴 때마다 보살은 도리질을 했다. 드러내 놓고 누구에게 묻는다거나, 논쟁을 벌일 위인이 못됐던 탓에 무시로 고개를 흔들어대는 일이 많았다. 소심한 보살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알고 짓는 것이나, 모르고 짓는 것이나, 무게로 따지자면 거기서 거기겠지만, 사회법으로는 응당 알고 저지르는 것이 더 무겁고, 책임감도 큰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안다. 동기적인 측면에서 말해지는 이유일 테다. 알고 짓는 경우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고의성이 있기 때문에 책임질 일을 크게 물어야 한다는 견해가 작용한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르고 짓는 경우는 용서가 뒤따를 수 있다는 점에서 관대한 편이다. 실수로, 우발적으로, 어리석어서, 의도하지 않게, 우연히, 잘못으로 저지른 것이기에 비교적 책임질 일도 가볍게 처분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인지상정이겠지만…….
 
보살은 여기에 분명한 오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모르고 짓는 상황에서는 무한반복이 가능하고, 재발의 우려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오류다. 이에 적합한 법문도 있지 않던가, 라고 반문하고 싶은 것이다. 뜨거운 난로에 손을 갖다대보도록 한 법문이다. 난로가 뜨겁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슬쩍 대보고 만다. 손을 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금방 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난로가 뜨겁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손바닥을 펴서 바짝 붙일 수 있다. 덥석 잡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꾹 눌러 붙였다가 손바닥이 난로에 눌어붙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보살은 모르면 용감할 수 있다는 농담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헛웃음을 짓는다. 뜨거운 난로를 살살 짚거나, 덤벙대면서 덥석 짚어서 데이는 정도야말로 천양지차다. 알고 짓는 업 덩어리가 크고 무거운지, 모르고 저지르는 업 덩어리가 작고 가벼운지를 판가름하도록 하는 좋은 법문인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부처님은 말한다. 고의가 없는 행위에는 업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고의성을 떠난, 실수에 의한 행동여부를 떠나서, 업 덩어리만을 두고 말할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르고 지은 죄가 훨씬 크다고 분명히 말하기도 한다. 모른다는 것이 변명이 되거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르친 일을 무마하고 회피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어서도 안 될 말이다. 그래서 알아야 한다. 지혜를 밝혀야 무지와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는 차원에서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건, 저렇건 지은 바에는 분명한 과보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누구나, 언젠가는 뒤따라온 과보를 받게 된다. 화살처럼 빠를 수도 있고, 흐르는 물처럼 느릴 수도 있지만. 자기가 저지른 바는 반드시 자기가 받는다.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모든 성현들은 참회(懺悔)로 업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 참회하는 것으로 업의 고리를 끊어내고, 더 이상은 업 덩어리가 될 인연을 짓지 않겠다는 서원이 불공하는 마음이요, 공양정신이라는 가르침이다. 마음을 닦고 밝히는 법을 세우는 것이요, 자기반성과 비판으로 요동치는 주인을 바로잡아 굳건하게 하며, 바른 길로 다시 이끌어야 한다. 지혜의 등불을 켜서 미련한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일과 경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일 잘하면 불법공부 잘하고, 불법공부 잘하면 세상일도 잘한다고 한다. 생활 밖에 불법 없고, 불법 밖에 생활 없다는 것이다. 불공하는 때와 장소도 따로 없다고 한다. 그동안 품었던 의심덩어리가 한꺼번에 풀리면서 경전구절들이 낱낱이 이해됐다.
 
보살은 심인당 안을 두리번거렸다. 맑고 밝은 심인당 안에 업 덩어리는커녕 먼지 하나,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다. 누가 이토록 깨끗하게 쓸고, 닦고, 치워놓았는지 자못 궁금할 정도로 잘 정돈된 성소(聖所)에 다름 아닌 듯싶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경지가 이런 경우일까, 하는 새로운 의문이 든다. 마음도 이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발걸음 한 번 내딛기가 조심스럽고, 말 한 마디 내뱉기가 신경 쓰일 지경이다. 은연중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살피며 행하기를 힘쓰라는 가르침을 되새긴다.
 
자기부처를 인식하고, 자성부처를 공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때다. 자기부처를 안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가치를 안다는 것일 터, 자기의 존재가치를 아는 사람은 자기를 귀중하게 여기는 만큼 남의 입지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도 알 것이다. 자기를 알고, 남을 안다는 것은 지피지기(知彼知己)다. 손자병법에서는 백전백승(百戰百勝) 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 병법(兵法)을 들먹일 일은 아니다. 스스로를 돌보면서 단속하고 관리하는 자세를 말함이다. 불자들로서는 마땅히 자성부처를 보는 경지다. 자성부처를 보게 되고, 자성부처를 공양함으로써 자기를 완전하고 전인격적인 개체로 만들어가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기 안의 자성부처를 밝혀서 제대로 보게 되면 집안에 있는 또 다른 부처도 보게 된다. 조상부처요, 부모부처며, 가족부처다. 자기존재는 조상과 부모로부터 몸을 받아 왔으며, 가족과 더불어 유지되는 인연 때문이다.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알면 자기 아닌 다른 이도 부처로 본다. 집에 있는 부처나, 밖에 있는 부처나, 분간하지 않으며 두루두루 잘 받들어 공양하면 행복은 그 가운데 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은 나도 부처요, 너도 부처요, 가족과 이웃, 국가는 물론 지구촌 인류로부터 뭇 중생들까지 모두를 부처로 알고 상호공양 하는 일이다.
 
정유제/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