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신문

삼십칠존이야기- 11.금강왕보살

입력 : 2018-07-02  | 수정 : 2019-04-10

뉴스 원문 정보
원문 : http://milgyonews.net/news/detail.php?wr_id=29403
작성 : 밀교신문

한 나라의 임금을 왕이라 한다. 왕은 모든 권한과 책임의 최고봉으로서 그 나라의 온갖 판단의 근원은 왕으로부터 나온다. 마치 사자가 뭇 짐승들 속에서 자재한 것처럼 왕은 그 나라 어디에서든 자재롭다. 그러나 자재롭다 하여서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왕이 지닌 자재함이 어떻게 전개되는 가에 따른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현명한 왕이 나라를 통치하면 온 백성이 잘사는 나라가 되지만 왕이 제멋대로 통치할 경우에 그 나라는 도탄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에서 성군과 폭군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왕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자재하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 영역 안에서 우리는 왕이 된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대외적인 대인관계이든 우리의 자주력이 발휘되어야 할 무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의외로 왕이 되어야 할 자리에서 자주력을 상실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더욱 큰 문제는 인생이라는 무대의 왕이 자주력을 상실하는 경우의 비참함이다. 

 

얼마전 호주의 호스피스 간호사가 임종환자를 대상으로 설문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은 후회를 남겼다고 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둘째, 일만 너무 열심히 했다. 셋째,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대신 남이 원하는 삶을 살았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너무 염려하였다.” 

 

그 결과 의뢰적인 삶을 이루었고 그것이 습이 되어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자신으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게 했던 남들은 내가 이러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기뻐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남들은 사실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들의 이익에 관련될 때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이것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남들이 어떻게 살든 별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머무는 이 자리에서 나는 왕이고 자재하게 자주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외부의 모든 존재와 대립각을 세우고 자신만 위하는 것이 왕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왕이란 모든 것을 자재롭게 한다고 해서 자기중심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 중심은 모든 존재들과의 조화에서 나오는 중심이다. '실행론'에 “우리들은 날 때부터 자기중심 생각 있어 이것을 곧 불교에서 오직 아라 부름이니 아를 멸해 가는 것이 오직 불교수행이라”고 하면서 아(我)는 원래 자기 존재 본능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더 나아가 “안없애면 안되는 것 소아(小我)라고 이름하며 선택정화 세울 것을 대아(大我)라고 하느니라”고 자기중심에 관한 두 가지 견해를 세우고 있다. 타인의 이익에는 관계없이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소아이며, 이타가 배제되어 있다. 예를 들면 습관성이나 중독성으로 약물을 취하는 사람이 보시를 요청할 경우 소아의 입장에서는 보시를 행하면서 그 보시의 공덕을 생각하지만, 대아의 입장에서는 그 보시로 인해서 더 망가질 것을 알기에 보시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좋은 길로 이끌 수 있도록 마음을 보태게 된다. 소아의 경우 상대의 이익과 무관하게 자신의 선행으로 기록하지만 대아의 경우에는 선행이라 하여도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고 궁극에는 정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기에 때로 모질게 나가는 것이 궁극의 선행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실행론은 이렇게 말한다. 

 “불교는 구경에 자성이 청정하여 일체 사리에 자심이 통달하게 되니 이것이 곧 자주력이 되는 것이다.”

 

임종의 순간까지 자주력을 발휘하지 못해서 의뢰적으로 살았던 삶의 주인공이나 자신의 선행만 생각했던 소아의 사람은 일체 사리에 자심이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중심을 세우고 자심이 통달하게 되면 곧 일체와 연결되어 있는 연기성에서 자주력을 발휘할 수 있다. 수행이든 사업이든 사회에서 자기만 위하는 중심을 세우는 왕은 이기적이라고 비판받게 되지만 인생에서의 왕은 자기를 확립하며 남과 함께 더불어 수행하여 나가는 중심이 된다.

이렇게 왕과 같은 보살이 금강계만다라 37존 가운데 아축불의 4친근보살 중 하나인 금강왕보살이다. 

 

금강왕보살은 '금강정경'에 ‘일체여래구소삼매’와 ‘묘불공왕금강왕’으로 표현되고, 기타 다른 경전에서 불공왕·금강구소‧금강구·최상금강왕 등으로도 칭해지며 밀호는 자재금강이다. 

금강왕보살은 불공왕대보살의 삼매인 구소삼매로부터 출생하며 구소삼매란 바로 불공왕의 성품이 그 출처가 된다. 이 보살은 대일여래로부터 파생한 금강살타와 애염명왕의 교리적 교섭으로부터 생겨난 존이기도 하다. 이 보살은 삼매야형으로 갈고리를 지니는데 갈고리란 끝이 뾰족하고 굽은 물건으로 농작물 등을 모을 때에 사용하는 농기구이다. 

그 갈고리는 '성위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구사섭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구사섭삼마지지로부터 금강광명을 유출하여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고 사섭법으로써 일체중생을 포섭하며, 가장 뛰어난 보리에 머문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지며,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왕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아축여래의 오른쪽 월륜에 머문다.


금강왕보살이 지니는 왕처럼 자재함을 상징하는 금강의 갈고리는 첫째로 일체여래를 불러들이는 기능을 상징하고 있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을 갈고리로 이끌어 온다. 이를 금강구왕이라 이름한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일체여래께 가르침을 청하는 것으로, 두루 다함없는 모든 유정계에 널리 이끌어들여 이익하게 하며, 모두에게 불법의 기쁨과 행복을 획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중생들을 이끌어들이는 데에도 사용된다. 앞에서 금강살타보살에 의해서 자신이 보리심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중생을 갈고리를 가지고 불도로 이끌어들인다. 그 갈고리가 상징하는 것은 사섭법이다. 사섭법이란 보시·애어·이행·동사로서 일체중생을 포섭하는 구소의 덕이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에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를 말한다. 보시섭은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재물을 기꺼이 베풀어 주는 일이며, 애어섭은 사람들에게 항상 따뜻한 얼굴로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이다. 이행섭은 신체의 행위, 언어의 행위, 정신행동의 삼업에 의한 선행으로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일이며, 동사섭은 자타가 일심동체가 되어 협력하는 것으로, 형체를 바꾸어 중생에 접근하여 중생과 같이 일하며 제도하는 일이다. 이 사섭은 원시불교의 중요한 수행덕목인 37조도품의 일부이다. 이 가운데 동사섭은 보살의 동체대비심에 근거를 둔 것으로,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그들을 자연스럽게 교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금강왕보살은 쌍금강구를 들고 불러 모으는데 사용한다. 이것을 섭소하는 것은 곧 불공왕보살의 묘행이다. 따라서 이 갈고리를 지니고서 가지상응하면 왕과 같은 자주력이 있어서 일체여래의 대자재지심심삼매를 속히 얻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상호 가운데에도 갈고리처럼 중생을 모두 이끌어들이는 상호가 있다. 수족지만망상(手足指縵網相)이라 하는 상호는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모두 막이 있어 서로 연결된 문양이 마치 기러기가 날개를 펼치면 나타났다가도 펼치지 않으면 숨는 것과 같다는 데에서 나온 명칭이다. 이 상호는 사섭법을 닦아 중생을 섭지함을 상징한다. 

사섭법을 상징하는 갈고리가 삼매야형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갖음에도 이 보살의 이름을 왕이라 한 것은 한 나라에서 왕이 모든 것에 자재하며, 온 백성이 복종하며 그 통치를 받는 것처럼 여래의 실상의 신변이 걸림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결국 사섭법을 자재로이 행하여 모든 중생을 포용하는 것을 갈고리라는 삼매야형과 왕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낸 것이다.

 

 '약출염송경'에 금강구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빠르게 일체여래를 갈고리처럼 끌어들인다라고 하는 것처럼, 금강왕보살에게 불보살이나 중생들을 불러들이는 공능이 있는 것을 금강구, 또는 쌍금강구로 표현한다. 성신회의 형상이 두 손으로 금강권을 만들고 팔을 교차시켜서 가슴에 안고 있는 것도 '금강정경'에 “금강구보살의 오묘한 인계를 결함으로 해서 곧 모든 부처를 널리 청한다”는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1.jpg
금강왕보살

 

김영덕 교수/ 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