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신문

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17-전쟁을 벌이다

입력 : 2018-06-18  | 수정 :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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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milgyonews.net/news/detail.php?wr_id=29311
작성 : 밀교신문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 저 멀리에서 어마어마한 흙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군대가 달려옵니다. 그 기세를 봐서는 웬만한 나라 하나쯤은 삽시간에 정복할 것만 같습니다. 무장을 한 군대를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다가오는 이는 강대국 코살라의 왕위에 막 오른 군주 위두다바입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품어왔던 원한을 이제 갚으려고 합니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조국 카필라바스투입니다.

사실 위두다바왕이 섬멸하려는 카필라바스투는 왕의 외가입니다. 오래 전 위두다바가 어렸을 때 그는 외가인 카필라바스투를 찾았다가 몸서리가 처질 정도의 모욕을 받았습니다. 위두다바왕의 어머니는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과 혼인을 했지만, 사실 그녀의 신분은 낮았습니다.

파세나디왕이 석가족에게 자신과 결혼할 공주를 원했을 때, 핏줄에 유달리 집착했던 석가족이 이른바 고귀한 혈통 대신 하녀의 신분인 여인을 공주라 속여 보냈고, 이웃나라 왕은 그것도 모른 채 정략결혼을 올렸던 것입니다. 둘 사이에 태어난 위두다바는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자신은 외가인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리라 생각했건만, 정작 석가족 사람들은 위두다바를 가리켜서 “신분이 낮은, 천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경멸했던 것입니다.

앙심을 품고 있던 위두다바는 왕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석가족을 치기로 합니다. 이런 일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부처님은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까요? 무엇보다도 부처님은 세속을 떠난 몸입니다. 세속을 떠난 마당에 세상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능멸을 당한 위두다바왕의 심정도 이해하고 있고, 석가족이 자초한 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친족이고 조국입니다.

부처님의 심정을 목련 존자가 알아차리고 이렇게 나섭니다.
“제가 석가족을 들어 올려 위두다바 군대를 피하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거부하십니다.
“저들이 지은 업을 그 누가 감출 수 있겠는가.”
설령 이번에 부처님이 나서서 전쟁을 막았다 해도 세상은 어떻게 해서라도 싸울 일을 찾고 그래서 기어이 끝을 보게 마련입니다.
세속이란 곳이 그렇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다투고, 부부끼리 다투고, 자식끼리 서로 다툽니다. 이웃과 다투고 직장에서 다투고, 그러다 나라와 나라가 다툽니다. 다툰 끝에 주먹과 무기를 휘두르고, 휘두른 끝에 상대를 다치고 그러다 자신이 다칩니다. 그러면 이 둘을 대신하여 원한을 품은 자들이 앞에 나섭니다. 그들 사이에 다시 다툼이 시작되고 다치게 하고 다칩니다.

초기경전인 <상윳타 니까야>에는 참으로 절묘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코살라국의 지방 어느 숲속 암자에 머물러 계실 때의 일입니다. 홀로 조용히 명상에 잠겨 계시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승리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슬퍼하지 않고 슬프게 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진리로 세상을 다스릴 수는 없을까?’

부처님의 이런 생각을 가만히 음미해봅니다. 숲속 한가한 암자에서 세속의 번잡한 일들을 떠나 명상에 들어 계시던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대체 뭘까 상상해봅니다. 부처님은 매일 아침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탁발을 나가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매일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죽겠다, 죽고 싶다, 죽이겠다, 죽어라, 죽으면 어쩌나….
살기가 등등한 외침을 매일 들으면서 탁발하는 부처님인지라 조용한 숲 속 암자에 머물더라도 그 기운이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무엇으로 다스려야 행복하게 지낼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들이대던 원한과 분노의 칼날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이럴 때 악마 파순이 나타나서 속삭입니다.
“그대가 정치하십시오. 그대가 사람들을 그렇게 다스리면 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황금산을 두 개씩 사람들에게 주어도 단 한 사람도 흡족하게 해줄 수 없다. 각자 수행해야 할밖에….”

전쟁이란 결국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는 게 부처님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욕심이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고, 채우면 채울수록 더 커지는 것이 욕심입니다. 99개를 가진 강자는 약자가 지닌 단 한 개를 빼앗아 백 개를 채우려고 하고, 약자는 그 한 개를 빼앗길 수 없다며 그보다 더 소중한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군인이며, 이후에는 전쟁사가로 활동한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그의 책 <전쟁의 역사>에서 “인간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합의를 도출할 다른 방법이 없을 때 항상 중재자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라는 말도 합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벌이는 것이 전쟁이지만, 그 갈등을 끝내기 위해 벌이는 것 역시 전쟁이라는 이 말은 결국, 인간 역사는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 중이고 전쟁으로 끝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루라도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적이 없는 이런 세속을 부처님은 떠나셨지만, 그러나 세속을 떠났다 해도 석가족의 피를 받고 태어나신 부처님입니다. 조국이 바람 앞에 촛불이 되었는데 “그건 세속 사람들끼리 알아서 해결할 일!”이라며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방식으로 인간의 전쟁에 대처하셨습니다.

살기등등한 강대국의 왕이 막강한 군사를 이끌고 위세를 떨치며 진격해오는 길 한 가운데에 혈혈단신 뛰어든 것입니다. 다 늙은 부처님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길 한 가운데에 가만히 두 발을 맺고 앉는 것뿐이었습니다. 위두다바왕이 멀리서 부처님을 발견하고 황급히 군대를 멈춘 뒤에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기 우거진 나무 그늘을 놔두고 어찌하여 땡볕 내리비치는 길 한가운데에 앉아 계십니까?”
부처님은 그를 향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친족의 그늘은 나무 그늘보다 시원합니다.”
나를 낳고 길러준 핏줄이 죽어갈 참인데, 그 친족의 그늘이 사라지려는 판에 홀로 무슨 안락을 구해서 나무 그늘을 찾아가겠느냐는 대답입니다. 현명한 위두다바왕은 부처님의 말뜻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조용히 군사를 되돌립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습니다. 위두다바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석가족을 치러 달려갔고 늙은 부처님은 다시 한 번 길 한 가운데에 홀로 결가부좌를 맺고서 있었습니다. 부처님을 뵙자 위두다바는 다시 군사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살기를 주체할 수가 없어 그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석가족의 나라 카필라바스투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부처님은 과연 이번에도 길 한가운데에 나와 앉으셨을까요?

죽이지 마라, 싸우지 마라, 용서해라…이런 말 대신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부탁을 하셨는데 말이지요.
부처님은 위두다바왕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셨습니다. 한 인간의 마음을, 마음 가는 대로 하는 행동을, 자유의지로 일으키는 일들까지 부처님이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그날 거리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위두다바왕은 거침없이 카필라바스투를 향해 진격했고, 그곳에서는 끔찍한 피바람이 일었습니다.

율장인 <비나야잡사>제8권에서는 이 소식을 들은 부처님이 지독하게 마음 아파했다고 전합니다. 친족이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으니 어찌 그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부처님은 그 전쟁이 물고 올 또 다른 비극과, 그 비극에 따른 또 다른 비극이 끝이 없음을 알고서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싱가포르에서 북미 두 정상이 만났습니다. 마침 68년 전 6월에 한반도에서는 끔찍한 전쟁이 벌어졌지요. 이제는 싸우지 말고 번영하자고 합의문에 사인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반가웠습니다. 저 간단한 사인을 하기까지 얼마나 숱한 희생을 치러야했는지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부처님은 인간들 각자에게 황금산을 두 개씩 안겨줘도 싸움을 피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고, 전쟁사가 버나드 역시 인간 세상에 전쟁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인류는 자꾸 모색합니다. 어떤 결정이 서로에게 좋은 것인지를 헤아리고 또 헤아립니다. 설령 훗날 그 셈법이 잘못되었더라도, 어찌되었거나 우리는 전쟁을 멈추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과 결정은 상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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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