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신문

삼십칠존이야기- 6.금강바라밀

입력 : 2018-04-16  | 수정 : 2019-04-10

뉴스 원문 정보
원문 : http://milgyonews.net/news/detail.php?wr_id=27248
작성 : 밀교신문

거울이란 참 편리한 물건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거울을 보며 또는 반대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거울을 보기도 한다.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사진도 있으나 사진이란 지나간 나의 모습이므로 현재의 내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거울이 반드시 필요하다. 눈은 모든 것을 보지만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는 눈이 눈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모습을 볼 재간이 없다. 우리는 거울 속에서 나의 시선과 반대방향으로 되비추어주는 영상을 보면서 그 거울 속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시선을 반대방향으로 돌릴 때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반대로 향하는 시선이 자신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울을 볼 때 외에는 자신에게 향해지는 반대로 향하는 시선은 따로 없는 것일까?
 
다른 이들이 나를 볼 때에 그 시선은 나의 방향과는 정반대이다. 알고보니 내가 마주치는 모든 존재들은 나의 시선과 마주치는 방향에 있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집에 돌아오는 나를 정겹게 맞이한다. 평소에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고 놀아주고 잘 대해주었던 것이 강아지의 환대로 돌아온 것이다. 강아지의 눈에 나는 마음 좋은 사람, 가까이 하면 여러 가지로 이로운 존재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우리 이웃이나 직장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해준 대로 모든 것을 반영한다. 좋은 친구와 좋은 동료는 알고보면 내가 좋은 친구였고 좋은 동료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 모든 존재들은 거울처럼 각각 모든 존재를 비추어낸다. 그러나 그 비춤에는 차별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그리고 자신이 알 수 있는 한계까지만 나의 거울은 비추어낸다. 여성과 남성, 또는 소년과 장년의 기호도에 따라 대상 가운데 일부만이 비추어지고,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컴퓨터에서 나오는 정보를 제대로 비추지 못하지만 전문가는 모두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는 대로 대상을 비춘다. 알고 보니 모든 것이 그와 같아서 우리는 좋아하는 것만, 그리고 아는 것만 비추는 자신만의 차별화된 거울을 갖고 있었다. 그 차별화된 능력 덕분에 우리는 세상이 괴롭기도 하면서 즐겁기도 하며 모든 것이 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또는 무엇인가를 갖기 위해서 노력하다가도 헛된 욕심 때문에 눈앞의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낭패를 겪기도 하였다. 사라져갈 것이 뻔한 데도 계속 붙잡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놓치고 말았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거울은 이렇게 밖에 보지 못하는 가엾은 거울이었기에 우리는 세상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아집만 키우고 살았다. 
만일 모든 것을 차별없이 수용하고 어떠한 영상에도 물들지 않는 크고 깨끗한 거울이 있다면 어떠한 작용을 할 것인가? 
 
아마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드러낼 것이다. 첫째, 모든 사물을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낼 것이다. 둘째, 온갖 사물의 선과 악ㆍ아름다움과 추함ㆍ흑과 백ㆍ크고 작음ㆍ길고 짧음ㆍ물들음과 청정을 차별없이 모두 비추어 낼 것이다. 셋째, 어떠한 사물이 다가와도 거부하지 않고, 사물이 가버려도 붙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넷째, 아무리 많은 사물을 비추어도 거울 자체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다섯째, 대상이 나타나면 시간적 차이를 두지 않고 즉각적으로 비추며, 대상이 가버릴 때에도 곧바로 대상의 자취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갖는 거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에 줄곧 사용되어왔다. 거울 속의 영상은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무자성ㆍ공에 비유되었으며, 거울 속의 영상은 빛ㆍ거울ㆍ대상이 인연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므로 연기의 이치에 비유되었다. 
그리하여 거울은 지혜의 상징이 되었다. 지혜로운 거울이라면 우리가 간직했던 분별로 얼룩진 거울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다 쓸어안는 청정하고도 큰 거울이어야 할 것이다. 원래 강아지가 거울이고, 이웃도 거울이며, 모든 사람들이 거울일 때에 우주의 모든 존재는 거울이 되어 모든 것을 서로 서로 겹겹이 비추고 있었다. 낱낱의 거울은 각각의 차별화된 경계를 비춘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이미 비추었던 것이다. 각각의 거울이 분별을 떠난다면 모든 거울을 다 포용한 거대한 크고 둥근 거울이 되어 온 우주 전체를 비출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비추는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를 불교에서는 대원경지라고 한다.  
 
그 지혜는 밝은 거울처럼 무심이며, 물든 바 없어서 주관과 객관에 집착하지도 않고, 청정한 까닭에 보는 것을 그대로 비출 수 있는 지혜이다. 또한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기에 쉽게 더러워지지 않는 부동의 성격을 지닌다. 이 성격이 강조되어서 금강이라는 또 하나의 특징을 부여할 수 있다.
금강이란 가장 견고한 물질을 찾던 고대인도인들의 고뇌에서 파생된 개념이다. 현재 강인한 금속을 대표하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철이 있다. 무기를 만들거나 기구를 사용할 때에 사람들은 주로 철을 사용하지만 철의 경우에도 녹이 슬고 불에 녹으며 더 강한 물질을 만나면 깨진다. 여기에서 철보다 더 견고한 물질에 대한 바램이 나온다. 요즘에는 철보다 가볍고 강한 물질이 여러 가지 개발되어 있지만 그 옛날 인도에서는 그러한 물질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보석처럼 견고하면서 쉽게 부서지지 않는 금속에 대한 열망은 가장 견고한 물질이라는 금강(金剛, vajra)이라는 개념으로 전개되었다. 이 금강은 무엇으로도 이를 파괴할 수 없으며,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상징으로서 견고하여 무엇이든지 깨뜨리고 어떤 물건한테도 깨지지 아니함을 금강에 비유할 뿐이지 지구상에는 몹시 단단하여 결코 파괴되지 않는 물질은 존재할 수 없다. 텅 비어 있는 공한 성품이야말로 형체가 없기에 무엇도 이를 깨뜨릴 수 없으며,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자체의 고정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생성되는 공한 것이기에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불교도들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것으로 공성(空性)을 금강이라 하였고, 금강으로 만들어진 무기인 금강저가 세상의 모든 물질들을 부수는 것을 불교의 가르침인 공(空)이 모든 외도들을 무찌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경론 가운데에서는 금강견고⋅금강불괴 등으로 부르고 견고함의 비유로 사용한다. 
 
따라서 지구상에 있는 물질로 금강이라는 이름을 가질 것은 없다. 다만 그 특징 가운데 하나를 담아서 보석 가운데 다이아몬드를 금강석이라 하기도 하였다. 이 보석은 현존하는 가장 단단한 보석으로서 다른 보석들을 연마하는 데 사용할 정도로 강인하다. 또한 무색투명한 물질로 햇빛이 비치면 여러 가지 빛깔을 나타내므로 그 기능이 자재한 것에 비유가 된다. 이 특징을 가져오면 금강으로 만들어진 거울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낼 수 있는 부동의 거울이라는 상징성을 일부나마 반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고도 보석처럼 빛나며 자재한 거울과 같은 지혜, 대원경지를 바탕으로 하는 보살이 금강바라밀보살이다. 그 지혜는 거울에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추어 모자람이 없는 것과 같이,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며, 마치 금강이 견고하여 어떤 물질이든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떤 단단하고 미혹한 번뇌일지라도 다 깨뜨리는 지혜이다. 밀교에서는 이것을 특별히 금강의 지혜라고 한다. 금강바라밀보살은 대일여래를 모시는 네 보살 가운데 대표가 되는 보살로서 여기서 금강은 견고한 보리심으로 ‘비로자나불의 생명’을 상징한다. 이 금강과 같은 우주 생명은 견고하다고 하여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깨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 보리심은 대비로자나의 신구심금강으로 온 우주에 충만한 것이며, 우주에 충만한 금강과 같은 보리심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금강바라밀보살이다. 
 
 '인왕반야다라니석'에서는 ‘이 보살은 금강륜을 지니고 있다. 비로자나불이 성불하고 나시자, 이 보살이 여래께 금강승의 법륜 굴리시기를 청한다. 이 법륜반야선에 올라타고 생사에 유랑하는 이 언덕에서 한량없이 수많은 중생들을 싣고서 머무름 없는 저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한다’고 하는데, 중생들을 열반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윤회를 초월하여 불국토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므로, 금강바라밀은 비로자나불의 한 측면인 아축불의 속성인 보리심의 활동을 나타내며, 이 금강바라밀에서 일체의 보리심여래가 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축여래가 내심에서 금강바라밀인을 증득하고 그 금강바라밀인으로부터 일체세계에 티끌처럼 많은 여래신을 출현하고, 이 몸으로써 스스로 성취한 바의 대원경지를 완성한다는 것으로 금강바라밀의 묘용이 된다.  동방 아축불이 시현한 금강바라밀은 비로자나불의 앞 월륜에 머무르며 금강과 같은 정보리심의 활동을 체로 하고 일체중생의 대보리심을 맑히는 작용으로 대일여래에 공양한다. 인계와 관상이 다 아축불과 같은데 이것은 아축불의 서원에 바탕하여 보리심의 활동을 촉진하는 매개의 공능을 구체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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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바라밀

 

김영덕 교수/ 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