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인과와 진리에 대해 불신의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밀교신문   
입력 :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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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인이 의처증 증세가 있는 남편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로또 같은 사람이에요.” 
 

“내가? 정말??” 
 

“네, 하나도 안 맞아!!”

 

서로 간에 믿음이 있어야 뭐가 맞아도 맞을 것 아니겠어요?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이 생기고 관심과 애정이 생기겠습니까? 의심을 품고 혼자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각본을 만들어 그것을 현실이라고 믿고 단정 짓는 일, 이것은 상대방은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을 지켜내려면 자기 맘대로 단정을 짓는 일 또한 없어야 해요.

 

“비뚤어질 테다!”라는 말, 혹시 들어 보셨나요? 한 때는 ‘나쁜 남자’가 유행이더니, 이제는 별의 별 말들이 다 유행입니다. 유행에 민감한 현대인들은 언제부턴가 틀에 얽매이고 식상한 것들을 배척하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얘기마저 식상하게 들리나 봅니다. 일찍이 불가에서는 선인선과요, 악인악과라 했거늘, 사회가 암울하다 보니, 착하게 살아봤자 이용당하고 고생만 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신감이 팽배해 있어요.

 

이렇듯 우리는 때때로 내가 받는 고통의 인연을 달게 받아들이고 참회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과를 의심하고 ‘왜 나만 이런 고통의 과보를 받아야 하는가!’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마음속에 죄를 더해갈 때가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사람은 어질고 착한데 일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양심을 속이고 그르게 사는 사람인데도 일이 술술 풀리는 경우를 종종 보거든요.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서 이처럼 인과를 의심하는 것은 수행자로서 결코 좋은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주사위를 던져서 1의 눈이 나올 확률이 얼마입니까? 1/6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주사위를 여섯 번 던질 때마다 1의 눈이 딱 한 번씩 나타나지는 않잖아요. 한 번도 안 나올 수도 있고 두세 번 나올 수도 있습니다. 언뜻 보면 1/6이라는 수학적 확률이 틀리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래서 인과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는 마음이 자꾸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사위를 던지는 횟수를 많이 하면 어떻습니까? 던지면 던질수록 확률은 점점 1/6에 근접해 가게 됩니다.

 

이처럼 중생들은 당장 눈앞의 일만을 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일이 인과 법칙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인과의 법칙은 언제 어디서나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루 착한 일을 했다고 복이 곧 오지는 않지만 화는 저절로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또 하루 나쁜 일을 했다고 화가 곧 오지는 않지만 복은 저절로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봄 동산의 풀처럼, 자라는 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매일 자라는 것과 같아요. 반대로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숫돌처럼, 닳아 없어지는 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매일 줄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을 마주하고 찍은 사진과 태양을 등지고 찍은 사진은 차이가 많이 나지 않던가요? 태양을 마주보고 찍은 사진은 역광 때문에 어두운 부분이 많이 생기지만, 태양을 등지고 찍은 사진은 밝은 부분이 많이 드러나잖아요.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 역시도 그렇습니다. 아무런 의심이 없이 오로지 진리가 비추는 길을 굳게 믿고 걸어가는 이들은 결국 뭐든지 밝은 부분만 보고, 긍정적으로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인과와 진리에 대한 불신에서 벗어나 선행을 몸소 실천하려면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할지, 진각성존 회당대종사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니다.
“어렵고 큰 착한 일을 하나 하는 그것보다 일상생활 하기 쉬운 작은 착한 일이라도 많이 하여 습관 되면 크게 착한 것이 된다. 적소성대(積小成大)되므로 그 과보도 무량이라.” (실행론 3-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