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북한의 현존사찰-강원도 보덕암(上)]

밀교신문   
입력 :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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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내금강 보덕암(普德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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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금강 보덕암은 판타스틱이다. 만약 이 절을 보게 된다면, “와 ~”하고 탄복하고 숨이 멎을 따름이다. 그냥 사진이나 그림만 보게 되더라도 꼭 가보고 싶다고 느낄 정도다. 신비와 아름다움의 극치, 그 이상이다. 사계절로 바뀌는 절의 풍경은 눈앞이 아찔할 정도다.
 
그 무뚝뚝한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조차 ‘아주 아름답다’고 했다. 보덕암은 첩첩이 겹친 골짜기와 뭇 봉우리(萬壑千峰)가 어우러진 만폭동계곡의 가장 도드라진 곳에 있어 마치《신세계교향곡》을 연주하는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 수만 년 동안 계곡이 만들어 내는 수천만 곡의 교향악을 감상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요즈음 산행과 달리 1894년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이 길로는 네발짐승들이 다닐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방문기에는 “장안사에서 유점사로 가는 17.7km가량의 만폭동 길은 두 줄기 거대한 계곡의 울퉁불퉁한 돌바닥이었다. 정작 가마를 탈 주인은 거의 절반이 걸어서 가야만 했다”고 회상했다.
 
표훈사에서 금강문을 지나서 만폭동계곡 3km 가량을 가면 벽파담을 만나고, 이어 분설담 위에 가로놓은 100m의 제4 출렁다리를 건네서야 보덕암에 오르는 돌계단을 만나게 된다. 짧게 두 번 굽은 34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보석을 볼 수 있다. 바로 내금강의 왕관 보덕암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택리지》에서 “보덕굴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그 모양이 신의 조화와 귀신의 힘 같아 거의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고 했다. 자연과의 합일을 잊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천하절승 금강산이 그간의 영상, 사진으로 보아온 것보다 더 금강산 같아서 놀라게 될 수 있고 또 실제 금강산이 우리들의 인식적인 것들보다 못한 점에도 놀라움을 가지게 할는지 모른다. 
 
내금강의 아름다운 별, 보덕암
보덕암은 표훈사에서 1km 지점의 두물머리인 금강대를 지나서 만폭팔담의 하나인 분설담 오른쪽에 우뚝 솟은 법기봉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법기봉에서 서쪽으로 내리뻗은 한 개의 커다란 뭉치바위 남쪽 면에 있다. 만폭동계곡 건너 서북쪽으로는 대향로봉과 소향로봉 두 봉우리가 법기봉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금강문으로부터 화룡담까지 2km 구간의 내금강 만폭동계곡에서 유일한 사찰이다. 국보 유적 제99호로 지정된 보덕암은 고구려 영류왕 10년인 627년에 보덕화상이 창건했다. 고려시대의 회정선사가 1115년에 새로 중창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지원으로 1675년에 크게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덕화상이 수도하기 위해 자연굴을 이용해 지었는데 보덕굴이라 불렸다. 관음보살의 화신 보덕각시가 사는 곳이라 붙인 이름이다. 정면 1간 측면 1간 단칸집으로 3층이다. 본전 관음전에는 불상이 없다. 전각 구조는 단층집이면서도 눈썹지붕 밑에 팔작지붕, 맞배지붕, 우진각지붕을 차례로 배합하여 다층 건물로 보이게 설계했다. 보덕암은 황해도 장수산의 ‘현암(懸庵)’과 함께 독특한 건물로 유명하다.
 
조선 전기의 문신 남효온이 1485년 봄 보덕암에 왔다 간 다음에 쓴《추강집》<보덕굴에서>란 시에는 동봉 김시습의 시와 허주 신포(申誧)의 탱화를 표현했다.
 
석양 비친 향로봉은 저녁 비췻빛 짙은데(日照香罏晩翠深)
쇠사슬이 삐걱대어 높은 봉우리에 울리네(鐵繩咿軋響高岑)
허주가 단청 그리고 동봉이 글을 지으니(虛舟畫手東峰記)
오래도록 사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네(留喜沙門萬古心)
 
16세기 봉래 양사언은 <풍악행(楓岳行)> 시에서 “골짝 복판에 있는 동굴로 날 듯한 누각이 허공에 걸쳐 있는데, 세면은 바위를 의지했고 한 면은 구리기둥으로 떠받친 것이 백 자에 가까워 그지없이 기이하다”고 했다.
나는 보덕굴을 사랑하노니(我愛寶德窟)
구리 쇠기둥이 천자 이상이라(銅柱盈千尺)
허공에 걸려 있는 날 듯한 누각은(飛閣在虛空)
하늘 조화이지 사람의 솜씨 아니리(天造非人力)
 
율곡 이이는 보덕암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며, 16세기 양대박의《금강산기행록》에는 “보덕굴에 이르렀다. 층층의 절벽은 천 길이나 되었고 석벽에는 길이 없었다. 그 아래에 두 개의 구리기둥을 세우고 허공에 건너질러 집을 걸쳐놓았다. 아로새기고 아름답게 꾸며진 집이 구름 끝으로 나는 듯했다. 바라보니 마치 산신령이 살아있는 그림을 바친 듯하고, 바다에 뜬 신기루가 고운 빛을 내는 듯하여 사람을 놀라고 감탄하게 하니 나도 모르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돌다리 하나를 건너서 관음대(觀音臺)에 올라 조금 쉬었다. … 만든 규모가 귀신같은 기술과 솜씨가 아니라면 이렇게 교묘하게 만들 수 없었다. 대체로 들보와 기둥은 천 길 높이의 구리기둥에 의지하고 있었다. 또 쇠사슬로 묶고 바위틈에 그 끝을 끼웠다. 방 한 칸은 허공에 매달려 있으니 바람이라도 불면 흔들려서 가만히 있지 못했다. 오르는 자들은 머리카락이 쭈뼛할 만큼 두려워 잠시도 머물 수 없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구름다리로 내려왔다”고 했다.
 
18세기 초, 승려 석법종이 쓴《유금강록》에는 “까마득한 벼랑을 올려다보니 나는 듯한 용마루가 날개를 펼친 듯 3층으로 허공에 매달려 마치 도솔천의 천제궁(天帝宮) 같았다. 올라가 보니 편액에 ‘보덕굴’이라고 쓰여 있었다. 벼랑에 구리기둥을 세워 지탱하고, 쇠줄로 위태로운 것을 붙들어 매어 기울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층으로 된 집을 만들고 기와를 얹어 비바람을 막았으며, 바위를 깎아 계단을 만들어 드나들게 하였다. … 그 구조의 오묘함과 기묘한 꾸밈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보덕굴 위쪽에 있는 대를 보덕대라고 한다. 보덕이란 관음보살이 화신한 이름이다. … 또 그 아래에 흑룡담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중국 사신 정동(鄭同)이 금강산 유람을 왔다가 하늘에 이르기를 ‘이곳은 참된 부처님의 땅이다. 이곳에서 죽어 조선 사람이 되어 오래도록 부처님의 세계를 보고 싶다’고 하며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서는 사신 일행 중에 한 사람이 그랬다고 전한다.
 
19세기 중엽, 이상수는《동행산수기》에서 “호숫가의 제비가 석벽에 집을 지은 듯이 대롱대롱 달려 있는 것이 보덕암이다.” 1894년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특히 관음보살에게 헌납된 보덕굴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환상적인 사원은 30m 높이의 절벽 위에 돌출된 건축물이다. 기둥 하나가 사원의 중심을 떠받치고 있었고, 잎사귀가 울긋불긋해진 미나리아재비와 담쟁이가 꽃을 피운 채 그 둘레를 무성하게 감아 올라가고 있었다”고 했다. 또 보덕암 위쪽의 전망대에서 본 만폭동의 경치를 “계곡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 어디에도 비길 데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황홀경에 빠뜨리는 이 웅장한 협곡은 온통 천혜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고 평했다.
 
보덕암의 어제와 오늘
고구려 보장왕 때 승려인 지법(智法) 보덕화상이 627년에 창건한 보덕암은 고려 때 회정선사가 1115년에 중창했다. 고려 후기의 이제현은 보덕암을 찾아 <보덕굴>에서 “날아갈 듯한 처마는 나무 위 구름을 탄다”고 썼다. 1349년 금강산을 찾은 이곡은 “사찰을 순례하기 위해서는 보덕굴과 관음굴부터 가야 한다”고 했다.
 
조선시대에 왕실의 지원으로 1540년 1차 중수를 한 보덕암은 1675년에 3차 중수와 1726년 내탕금으로 4차 중수에 이어 1808년에는 율봉선사가 5차 중수를 했다. 6.25 전쟁 때 일부 파괴되었으나 1970년대에 보수하고 1981년 6월 중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금강산 현지지도에 의해 복구됐다. 2007년 여름 한 철, 잠시나마 남녘 동포들을 받아들였다. 표훈사의 주지 청학스님이 보덕암을 같이 관장하고 있다.
 
보덕암은 원래 두 채의 건물이었는데, 하나는 보덕굴 앞을 막아 벼랑 벽에 달아 지은 본전이고, 다른 하나는 굴 위에 지었던 판도방이다. 본전은 보덕굴 앞 바위에 의지하면서 높이 50m가 넘는 아슬아슬한 절벽 중턱에 돌기둥과 7.3m의 구리기둥 한 개로 받쳐 세운 암자다. 1511년 보덕암의 한 승려가 나무기둥에다 구리판을 감기 위해 새로 주조한 19개의 동판을 붙였다. 또 건물을 바위에 붙잡아 맨 굵은 쇠줄도 그때 같이 설치했다.
 
조선 전기의 남효온이 1485년 윤4월 21일에 찾았던 보덕암은 3층 건물의 맨 아래쪽은 관음상을 모신 본전이고, 2층은 방 2개로 승방과 주방인 공양간으로, 3층은 2층 관음굴 위에 더 쌓아 지붕을 달고 안에 보덕대를 만든 내불당이었다. 3층 지붕 위의 다층석탑은 그가 다녀간 다음, 17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의 김수증이 1680년에 방문하고 본 보덕암의 석탑은 1675년경, 기존 건물의 3층 지붕 위에 청석으로 만들어 세운 다층탑이다. 지금은 철보주와 1개의 지붕돌이 사라지고, 2개의 기단과 1개의 청석 지붕돌만이 3층 본전의 맨 꼭대기에 얻혀 있다. 이 청석다층탑은 1917년 외국인의 사진에도 등장한다. 
 
본전인 관음전은 크지 않은 규모인데, 구리기둥만으로는 암자가 지탱되지 않으므로 암자 위쪽 암석에다 구멍을 파고 쇠말뚝을 박아 2개의 쇠사슬을 Ⅹ자로 암자와 묶어 놓았다. 그 안의 자연굴은 안쪽으로 바위 사이에 깊이 5.3m, 폭이 1.6~2m, 높이 1~2m로 되었는데 보덕굴이라 부른다. 보덕각시와 파랑새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옛날에는 판도방 앞문에 본전과 잇는 나무사다리를 놓아 다닐 수 있도록 했다. 판도방은 객실, 대중방 그리고 창고로 쓰였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만폭동 절경을 감상하던 전망대는 건물 위쪽에 있었는데 사라지고 전하지 않는다.
 
중국 송나라 때의 육유는《검남시고》에 “옛사람은 보이지 않고 우리는 늙었으니, 회한을 남겨 다시 천 년을 갈까 두렵네”라 했다. 약 1,400년 전에 세워진 보덕암을 구경하지 못하는 이들의 심정과 같을 뿐. 꼭 가야 할 1순위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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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