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북한의 현존사찰-강원도 표훈사(하)

밀교신문   
입력 : 2019-03-11  | 수정 : 201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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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박물관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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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대 표훈사
금강산 관광의 백미는 만물상과 만폭동이다. 곳곳에 신화와 전설, 역사적인 펙트가 가득한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다. 만폭동에 사찰들이 즐비하고 선사들과 얽힌 이야기도 무궁무진하다. 금강산은 만물상이 금강의 아버지라면, 만폭동은 금강 산사(山寺)의 어머니 품과 같은 곳이다.
 
금강산 기행의 이면에는 뼈아픈 상흔의 역사가 있다. 고려와 조선,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고급관료나 고을 현감들의 구경이 잦았다. 더욱이 중국 사신들까지 여기에 동참했으니 더 분잡해졌다. 고려의 최해는 “산 주변의 백성은 그들을 접대하느라 시달리고 화가 치밀어 ‘이놈의 산이 어찌하여 다른 고을에 있지 않은가?’고 했다.” 양반들의 유람, 유희에 산내 스님들이 몸서리를 쳤다. 어설픈 짚신에다 산행의 힘든 가마꾼에다 풍광 좋은 곳에서 펼쳐진 유희장의 허드렛일을 스님들이 도맡았다. 이것뿐이랴. 송이버섯이며 도토리 공납은 스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오죽했으면 서산과 사명대사는 사후에라도 횡포와 수탈을 줄이고자 했다. 바로 백화암의 서산대사 비와 부도, 각종 유물, 전설과 설화까지 지어서 수탈을 예방하고자 했다. 금강산의 붉은 승려들이 처했던 현실을 생각하면 쉽게 기행이나 등산, 여행이라고 말할 순 없다. 순례 정도가 예의를 갖추는 일이다. 
 
과거와 현재의 공간에서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 초입에 있다. 그러나 위치상으로나 전망적으로 절이 있는 표훈동은 내금강의 중심부다. 내금강 내력의 현장이고 금강산 사상의 핵심처다. 6.25 전쟁 때 유일하게 불에 타지 않은 사찰이다.
 
반듯하게 닦아놓은 절 마당 가운데에는 1341년 계청대사가 중건하면서 세운 7층 석탑이 서 있다. 특이하게도 탑신에는《금강정경》을 중심으로 만다라의 밀교적인 구도와 배치를 나타냈다. 동쪽에 ‘나무관음보살’, 서쪽에 ‘나무대지보살’, 남쪽에 ‘나무아미타불’, 북쪽에 ‘나무석가모니’를 한자로 음각했다.
 
국보 유적 제97호로 지정된 표훈사의 현재 건물들은 1778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7동의 전각은 조선 후기의 건축미를 자랑한다. 법기보살을 머물러 항상 계신다는 반야보전에는 법기보살상 입상을 모셨다. 좌우 날개로 영산전과 명부전, 맨 안쪽에 칠성각과 그 옆에 석수조 1기, 앞쪽에 능파루와 판도방은 마당축대 아래쪽에 내려져 있다. 어실각은 아예 왼쪽 외진 곳에 떨어져 있다. 장수 샘은 순례에 지친 이들에게 최고의 감로수다.
 
6.25 전쟁 후, 북녘 사찰에는 일주문이 거의 사라졌다. 절의 대문인 능파루는 18세기 중엽까지 산영루라 불렀다. 2층 누각인데 1층에 14개의 8각 기둥, 2층에 약 2m 되는 두리기둥 10개를 세웠다. 누각 현판에는 옛 재상, 왕족들의 이름이 즐비했다. 능파루 오른쪽에는 찾아온 빈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개풍영빈관’이란 이름의 2층 누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까지 이곳에서 각종 연회까지 열렸다. 이 호사스러운 광경을 상상해 볼 수 있지만, 전쟁 때 불에 타 흔적조차 사라졌다. 절집의 객실로 사랑방이던 판도방은 표훈사가 유일하다. 도회를 담당했던 사찰기능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능파루 오른쪽에 있는 판도방은 앞면 4간, 옆면 3간의 건물로 방 3개와 부엌, 툇마루가 있다. 모두 툇마루에 걸터앉기를 좋아한다. 판도방에서의 하룻밤은 그 속을 빤히 다 볼 수 있어 유람의 하이라이트이다. 2007년부터 주지를 맡은 청학스님과 2~3명의 부전스님이 거처하는 집이다. 출퇴근하는 스님들은 상주하지 않는다. 특히 1989년 5월 표훈사에서는 북한불교계 최초로 4.8봉축 탑돌이 행사를 했다. 어실각은 1796년 정조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위해 지었다. 지금은 연등과 사다리 등 물건 창고로 쓰인다.
 
금강산 순례의 원점이던 장안사는 전쟁 때 사라지고, 이제 표훈사가 내금강의 대문이다. 내금강 순례의 처음과 마지막이다. 어느 곳 하나 비경이 아니 곳이 없다. 내금강의 겉모습은 표훈사 어실각에서 볼 때가 으뜸이다. 청학대, 돈도봉 등 내금강의 비경이 한눈에 쭉 들어온다. 반야전, 어간문 앞에 서서 부처의 눈으로 만다라가 새겨진 석탑 등 천년 가람을 구경하는 것은 일품이다. 특히 칠성각 뒤 둔덕에 올라서면 고려 태조가 금강산에 왔을 때 신하들과 엎드려 큰절했다고 붙여진 절고개, 낙타 등처럼 잘록한 고갯마루를 덤으로 볼 수 있다.
 
표훈사에서 만폭동으로 가려면 금강문을 지나야 한다. 달리 원화문이다. 명패인 새김글자는 왼쪽 작은 바위에 있다. 자연적인 돌문이다. 여기를 지나면 요란한 계곡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지금은 도로를 통해 들어가지만, 절 앞 개울에는 돌다리가 있었다. 이곳에 민물고기가 많다고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또 하나의 볼거리였다. 회나무와 측백나무, 잣나무가 많았으나 지금은 소나무와 전나무가 커다랗게 자란다. 18세기 어유봉의《유금강산기》에는 ‘그림자를 머금은 다리’라는 함영교를 건너 절로 들어간다고 했다. 돌다리가 1777년 큰 홍수로 무너진 이후, 오래된 외나무다리가 대신했다.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화암에 이른다.

 
다시 보는 문화유산들 
전쟁 이전까지 금강산 하면 유점사였으나, 지금은 표훈사가 채우고 있다. 1952년 7월~12월까지 폭격과 토벌작전으로 표훈사와 정양사, 보덕암 등을 제외하고 방화로 소실과 파괴됐다.
 
18세기까지 표훈사에 있던 여러 전각과 유물은 전하지 않는다. 금강산 주불로서 높이 3m의 담무갈 장륙상을 사성전에 모셨다. 법당 정면이 아니라 동쪽의 법기봉을 향해 비튼 모습이 특이했다. 법기봉에서 매향제를 지냈다. 대장경을 봉안한 해장전, 그 뒤에 쌀 열 섬은 찔 수 있던 놋쇠시루 등은 일제강점기에, 앞마당에 세워졌던 53불 철탑은 임진왜란 때 왜구가 약탈했다. 원나라의 강철 화로와 철부도, 나옹선사의 가사 세 벌, 나옹의 동파라 즉 청동바리는 엷기가 종잇장과 같으며 가볍기는 깃털과 같은 것이 맑고 빛이 나서 조그마한 흠집도 없었다. 나옹의 청사리, 선조가 사명에게 하사한 금룡보자, 왜국부채인 ‘추목왜선은 삭아 만질 수 없었다’고 19세기《동행산수기》등에 기록됐으나 전하지 않는다. 마당 좌·우측에 극락전과 명월당, 시왕전, 영빈관, 천왕문 등 20여 채의 건물은 전쟁 때 폭격과 방화로 소실됐다.
 
내금강의 바깥주인 장안사
장안사는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 보존유적 제96호로 지정된 터에는 여러 개의 주춧돌, 소맷돌과 무경당 영운대사 부도만이 있다.
 
유점사가 금강산의 안주인이라면 장안사는 바깥양반이다. 전쟁 전에는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장안사로 통했다. 551년(고구려 양원왕 7년) 혜량조사가 창건하고, 1343년 원나라 기황후가 시주하여 70여 채가 중건되었다.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53불, 1만 5000불 등이 봉안됐다. 이곡은 “장안사는 도회(都會)였다”고 했다. 왕족 관료 등 모두에게 숙박, 체류시설을 제공하도록 한 것이다. 1459년 세조가 친히 행차했다. 만천교는 1960년에 아름다운 홍예교로 중건했다. 아치형 돌다리를 드나들던 문인들은 ‘문선교’, ‘만천대홍교’ 혹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간다는 ‘향선교’라 불렀다. 무지개다리는 1720년경 장맛비에 떠내려가 없어졌다. 겸재 정선은 1747년《해악전신첩》에서 이미 없어진 다리를 커다랗게 그리고서 그림 제목으로 ‘장안사비홍교’라 적었다. 통과의례의 관문처럼 그의 모든 그림에 반드시 그려 넣었다. 일주문에는 “한번 산문에 이르면 만사가 그친다”는 주련을 붙였다. 비홍교 건너서 만수정에는 ‘금강산 장안사’라는 현판을 걸었다. 1945년 이전까지는 6전·7각·1문을 가졌다. 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6일 폭격으로 엿새 동안 불탔다.
 
내금강의 일주문, 삼불암
보존유적 제309호인 삼불암(三佛岩)은 바위다. 원뿔 모양의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서로 3m쯤 떨어져 돌문을 이루는데 문짝이 없다. 1366년에 나옹 왕사가 백화암 바위에 삼불상을 조성했다. 오른쪽 큰 바위의 두면에 양각으로 새겼다. 높이 8m, 너비 9m다, 앞면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새기고 가슴에 卍자를 넣었다. 모두 높이 3.7m, 가슴 폭이 1.3m 크기다. 우측에는 18세기 윤사국의 글씨에 한자로 삼불암을 크게 새겼다. 좌측에는 관음과 대세지보살 입상을 높이 2.3m로 새겼다. 뒷면에는 60명(座)의 보살상을 가로 15줄, 세로 4줄로 가지런히 새겼다. 특히 좌측 상단의 네 번째 보살상은 귀를 새기지 않았다. 맞은편 바위에는 ‘표훈동천’, ‘장안사지경처’란 글자를 새겼다. 위쪽을 표훈동, 아래쪽을 장안동이라 부르는 경계선인 동시에 일주문과 같은 의미다.
 
울소에 얽힌 도술시합
장안사에서 삼불암으로 가다 보면, 바위산에는 새로 ‘속도전’이라는 붉은 글씨 위에 천리마가 새겨져 있다. 계곡 큰 바위에 ‘명연(鳴淵)’이라는 옛 글씨가 있다. 또아리를 튼 울소(沼)는 신통하게도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마치 사람 울음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북측 안내원은 “실 한 타래를 다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고도 하며, 이따금씩 이무기가 나와 사람을 해친다”고 입담을 널어놓는다. 그 앞에는 삼불암에 얽힌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까이에는 김동의 시체바위, 시체바위 위에는 아들 3형제 바위가 나란히 사이좋게 누워 있다.
 
호국불교의 상징, 백화암 터
국보 유적 제306호인 백화암 터는 원래 도산사였다. 1339년 금강산 계청대사가 창건했다. 1632년에 청허휴정 그리고 편양언기, 허백당, 풍담, 제월당, 취진당의 부도와 비가 세워지고, 18세기 초에는 설봉당의 부도가 세워졌다. 1845년 중건된 백화암은 1869년 수충영각을 건립하여 지공, 나옹, 무학를 비롯해 서산과 사명대사의 진영을 봉안했다. 한때 서산대사가 머물러 백화(白華)도인이란 별호가 붙었다. 전각은 1914년 3월 8일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백화암 터에 있는 서산대사비 등 3기와 사리탑 7기는 장대한 소나무와 잣나무가 호위하고 있다.
 
“금강에 든 자 금강을 보라”는 말이 있다. 참모습을 보려면 보는 자의 마음부터 확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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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사 전경 1912년. 한국저작권위원회 해제자료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