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임오년 말띠해

신민경 기자   
입력 : 2001-12-28  | 수정 : 200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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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들의 함성이 들리는가 "어허 용인 듯 준마의 새끼/하늘이 주셔서 내려왔도다/풍운을 일으키고 뇌우 달릴제/어허 준마여 용의 벗일레/살아서 신(神)이 있고 죽어서 이름이 있다/어허 준마로고 용의 정(精)일세…" 조선의 신숙주가 말(馬)을 기리며 쓴 글이다. 2002년 임오년, 올해는 말의 해이다. 12간지의 7번째에 해당하는 동물인 말은 시간은 오전 11시∼오후 1시, 방위는 남쪽, 달로는 음력 5월이며 '박력'과 '생동감'을 대표한다. 야성과 힘의 상징인 말은 옛날에는 인간이 식량을 얻기 위해 사냥했던 동물이었으나 차츰 군마(軍馬)나 밭갈이에 이용되었고 최근에는 주로 승용이나 스포츠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인간이 야생마를 길들여 기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약 4000년 무렵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건국신화, 대무신왕의 승용마인 '거루'에서처럼 일찍부터 승용으로 이용되어 왔다. 말의 종류는 현재 약 40여 종에 이르며 승마용인 영국산 서러브레드는 한 마리에 수억 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말은 가축 중 가장 이로운 동물이다. 농사일에서 전쟁터에서 전달수단으로서 말의 활약은 대단했다. 특히 조선왕조때 공용으로 급행하는 사람이 타던 파발마는 조선시대 최고의 통신수단이기도 했다. 말은 빨리 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두뇌가 발달돼 있고 온순하며 인내력도 강한 동물로 꼽힌다. 우리 조상들은 그래서 말을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왔으며 말띠해에 태어나면 남녀 모두 의식주가 넉넉하고 관운이 따른다고 믿었다. 실제로 말띠 중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이 있다. 조선조 세종때 6진을 개척한 김종서, 세종때 아악정리에 힘쓴 박연, 추사 김정희, 실학자 다산 정약용, 병자호란 때의 명장 임경업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이 모두 말띠였으며 쇼팽 루스벨트 키케로 램브란트 파스퇴르 뉴턴 징기스칸 등도 말의 해에 태어난 인물들이다. 올 한해 우리나라에서는 전세계 지구촌 축구제전 월드컵이 열리고 연말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등 중요한 일들이 많은 한해가 될 것이며, 진각종은 진기 56년으로 회당 대종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하다. 주인을 충심으로 섬기며 죽음까지 같이 하는 말에게서 충직성 신뢰성을 배워, 거추장스럽고 낡은 모든 허물을 벗어 던져버리고, 말이 상징하는 것처럼 힘차고 생동감 있는 도약의 해가 될 수 있도록 모두 갈기를 세우고 건강한 새해를 맞이할 일이다. 신민경 기자 smink@milgyonews.net ②우리 조상과 말에 얽힌 이야기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에 말이 등장한다. 고허촌의 촌장이던 소벌공이 하루는 우물 곁에 있는 숲속을 바라보니 이상한 빛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있었고 그 빛속에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 보니 말은 간 곳이 없고 불그스름한 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알을 깨고 나온 사내 아이가 후에 신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라 김유신 장군이 젊어서 기생 천관녀와 깊은 사랑 때문에 어머니 만명부인으로부터 꾸중을 듣고는 자기를 천관녀 집으로 태우고 가던 말의 목을 칼로 쳤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주인에 대한 말의 충성을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 명장 임경업 장군이 김자점의 명을 받은 형리의 곤장을 맞아 죽자 마부가 임장군의 준마를 가리키며 "짐슴은 무지하니 그 주인이 죽는 줄도 모른다"고 했다. 말은 그 마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듯 여물 먹는 것을 딱 그치고 한번 크게 울더니 피를 토하고 죽었다. 신미양요(1871년) 때 강화도에서 장렬히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말도 그 주인을 따라 스스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다. 주인을 저승길까지 충직스럽게 모신 명마들의 의리였다. 말을 소재로 한 고고학적 유물로는 고구려의 고분인 쌍영총 강서대묘 무용총 등의 벽화와 신라 천마총의 '천마도'가 유명하다. 또 신라의 유물 중에는 말을 탄 사람의 모습을 빚은 토우나 말 모양의 토기가 많다. 말과 우리 조상들의 생활이 상당히 밀접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③역사 속의 임오년 역사 속에 임오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보자. 먼저 2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영조대왕이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사건이 있던 1762년에 다다른다. 60년을 내려오면 순조 시대(1822년). 이 시기는 시파와 벽파로 갈려 팽팽했던 당쟁의 균형이 깨지고 외척이 득세하고 이들의 세도정치 아래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잇따른 민란은 홍경래의 난으로 절정을 이루다 진압된 지 10년쯤 경과한 때이다. 또 60년을 내려오면 고종 9년 되던 1882년 임오군란을 만난다. 신식 군대 도입에 반항해 구식 군대가 일으킨 이 반란으로 왕권은 크게 기울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60년을 내려오면 20세기의 임오년 1942년. 이 시기 우리는 일제 강점하에 신음하는 나라없는 백성이었다. 그 후 60년, 21세기의 첫 임오년 2002년. 우리는 전세계 지구촌의 축제인 월드컵대회를 일본과 함께 공동 개최하게 된다. 역사는 이 일을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 ④말띠 여자는 팔자가 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띠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여자들에만 유독 무슨 띠인지를 따지고 드는 경향이 많다. 말띠 해에 태어난 사람은 다른 띠에 비해 띠타령이 심하다. '말띠 여자 팔자 세다'는 속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우리 문헌에서 수집된 자료에는 이런 속담이 없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말띠 해에 태어나는 아이의 성비는 다른 해보다 훨씬 심각하게 남초현상을 보인다. 실제로 1990년(경오년)에는 116.5로 나타나 85년∼95년 평균 113.3명에 비해 매우 높았으며 자연성비인 105∼106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남아선호 성향이 높은 대구 영남지방은 125명 이상으로 월등히 높았다. 조선시대의 경우 말띠 왕비가 아주 많았다고 하는데, 말띠의 위상이 오늘날처럼 추락한 것은 일제 식민강점기 때부터라고. 일본에서는 말띠 여자를 꺼리는 습속이 있었다는데 이 고약한 풍습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이식된 것이다. 역술인들은 "말띠 딸이 팔자가 드세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본에서 건너온 속설에 불과하고 역학상으로 전혀 근거가 없다"며 "사주는 생년월일시를 종합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띠만 갖고는 팔자를 알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설혹 말의 역동적인 움직임 때문에 기가 세다는 선입관을 갖게 됐다손치더라도 역동적으로 변화 발전해 나아가는 오늘날 세계정세에 발맞추어 가려면 말띠가 가진 '활동성'은 대단히 긍정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⑤말과 관련한 고사성어 사람의 끝없는 욕심을 지적하는 말로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 남이 할 수 있는 일이면 나도 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밭 갈데 소간다', 부득이한 처지에 있어 생색없이 무엇을 제공하게 되는 경우를 이르는 말로 '말 잡은 집에 소금이 해자라', 힘과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울 수는 없음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에 실었던 짐을 벼룩 등에 실을까', 남의 불행은 아랑곳없이 제 이익만 채우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말 죽은 데 체 장수 모이듯', 미리 준비를 해 놓지 않아서 임박해서야 허둥지둥하게 되는 경우를 일러 '말 태우고 버선 깁는다'는 속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