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덕대 신라학연구소 제5회 학술회의

신민경 기자   
입력 : 2001-12-18  | 수정 : 200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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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역사유적 현장 중심으로 재조명 경주지역 현장연구사학자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지역 문화유적 연구에 성과를 보이고 있는 위덕대 신라학연구소(소장 진창영)가 지난 12월 5일(수) '신라학의 현장론적 접근'을 주제로 제5회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신라를 중심으로 한 고대역사유적을 사료가 아닌 현장을 중심으로 재조명하고자 마련된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지금까지와의 다른 주장이 제기되어 관심을 모았다. 먼저 주제발표에서 나선 김창호(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는 신라 금석문 가운데 불교와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명문인 천전리서석(川前里書石)의 을묘년명(乙卯年銘)에 관한 논문에서 "현재 정설로 돼 있는 진평왕 16년(595년)이 아니라 법흥왕 22년(535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면서 "천진리서석에 나타난 비구승의 인명표기를 분석해 보면 고구려를 비롯, 특히 신라에 삼론종의 불교가 크게 유행하였다는 지금까지의 주장들은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경주 소금강산 동쪽 골짜기에 위치한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조성시기를 고찰한 논문에서 박홍국(위덕대 박물관 학예연구실) 실장은 "사면석불 조성시기가 경덕왕대라는 삼국유사 기록이 있긴 하지만 굴불사지 사면석불 중 특히 남면 삼존불을 비롯한 일부 조각은 7세기 후반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박 실장은 그 근거로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조성시기를 고찰하는 데 있어 △여러 불상이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는지에 대한 여부 △남면 삼존상의 크기가 다른 삼존불 입상과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 △동쪽 골짜기는 사태가 심하여 실제로 경덕왕대에 불상이 조각된 바위를 파내었을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점 △경덕왕 대보다 앞서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는 점 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박광렬(동국대 박물관 전임연구원) 씨는 '2기 적석목곽분 출토 도질(陶質)토기 검토' 논문을 통해 "고식(古式) 도질토기가 신식의 경주계 토기로 양식문화를 이루게 되는 원인은 경사년(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침정벌로 인해 급격히 변한 것이 아니라 경주지역에서 확인되는 1기 적석목곽묘 단계의 고식 도질토기의 제작기술과 일부 기종의 전승과 단절을 통한 자체 발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불국사 조형의식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최영기(서라벌대 건축학과) 교수는 불국정토에 이르는 전면부인 석축과 기단 및 자하문과 청운교, 백운교를 이루는 석축의 결합 구조 의미, 범영루 하부의 자연석 석축과 수미산 형상의 관계 등으로 나누어 불교와 관련된 조형적 특징에 대해 설명했다. 최 교수는 "대부분 학자들이 범영루 하부의 자연석 쌓기는 수미산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오히려 수미산은 자연석 쌓기의 상층부가 수미산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언급했다. 주제발표에 이어 오후 4시부터 시작된 종합토론에는 최효식(동국대) 교수, 김유식(국립경주박물관 학예사), 안재호(동국대) 교수, 이강식·이근직(경주대) 교수, 최민희(경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씨 등이 토론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