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살게(不殺偈)로 독룡을 교화하다

편집부   
입력 : 2007-07-03  | 수정 : 200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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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사·장안사의 비법


오뉴월의 싱그러움이 대지를 푸르게 물들일 때,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기 위해 내 걸린 오색연등이 울긋불긋 하늘가를 수놓은 불광산(佛光山) 자락 장안사(長安寺)의 포근함은 옛 명성 그대로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 598번지에 있는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 말사인 장안사의 본래 이름은 쌍계사(雙溪寺)였다. 원효대사가 673년(신라 문무왕 13)에 창건한 쌍계사가 장안사로 바뀌게 된 연유는 애장왕(재위연도 800~809년)이 말년인 809년 발걸음을 한 뒤의 일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혜통스님이 독룡을 조복시킨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스님이 당나라에 머물며 무외삼장으로부터 수학하고 있을 때 고종의 딸인 황실의 공주가 병을 얻어 드러눕게 됐다. 이를 가슴 아프게 지켜보고 있던 고종이 무외삼장에게 치료해주기를 청했다. 이에 무외삼장은 주저함 없이 혜통스님을 천거했다. 스님은 이때부터 거처를 별도로 정해서 주변을 정화한 다음 흰 콩 한말을 은그릇 속에 넣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흰 콩은 흰 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으로 변해 공주를 해치고 있는 병마(病魔)를 쫒았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물리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본 스님은 이내 검은 콩 한말을 금그릇에 담아 주문을 외웠다. 검은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했다. 이제 흰 갑옷을 입은 신병과 검은 갑옷을 입은 신병이 힘을 합쳐 공주에게 달라붙어 있는 병마를 쫒자 병마는 교룡(較龍)으로 변해 달아나면서 공주의 병이 차도를 보이더니 어느새 완전히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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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이제 시작일 따름이었다. 교룡은 혜통스님이 공주의 몸에서 쫒아낸 것을 원망하여 신라 문잉림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심하게 해쳤다. 이에대을 논의하던 신라에서는 정공을 당나라 사신으로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스님을 청해 폐해를 없애달라고 간청했다. 스님은 정공의 간청을 듣고 665(당나라 인덕 2, 신라 문무왕 5)년 신라로 돌아와서 교활한 교룡을 다시 쫒아버렸다. 신라 문잉림에서조차 쫒겨난 교룡은 이제 당나라 사신으로 가서 스님을 청해온 정공을 원망하며 정공의 집앞 버드나무로 태어나 그를 괴롭힐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리 없는 정공은 30여 년 동안 이 버드나무를 사랑하며 애지중지 키웠다. 그러던 중 효소왕 때 신문왕의 장례길을 닦는데 이 버드나무가 가로막고 있다며 조정의 관리들이 베려하자 정공은 정색을 하며 베지 못하게 막았다. 이 소식을 들은 효소왕의 지시로 관리들이 정공의 목을 베어 죽이고, 그 집은 허물어 땅 속에 묻어버렸다. 조정에서는 정공을 제거한 뒤 정공과 가까운 사이라는 구실로 혜통스님도 관아로 불러들여 추문을 해야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병사들을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왕망사로 파견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아차린 스님은 사기병과 붉은 먹을 묻힌 붓을 들고 지붕 위에 올라가 사기병 목에 한 획을 그으 보이며 "내가 하는 것을 잘 보고 너희들의 목을 보라"고 외쳤다. 병사들이 각자의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었다. 병사들은 할 말을 잃은채 넋을 잃은 듯 서로 쳐다 보고 놀랄 뿐이었다. 스님은 이 광경을 보며 "만약 병목을 자르면 너희 목도 잘라질 것인데 어쩌려느냐?" 하고 외쳤다. 그때 병사들은 쏜살같이 그곳에서 도망치듯 달아나 조정에 도착한 후 붉은 획이 그어진 목을 왕에게 보였다. 효소왕은 "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모하겠느냐?"라며 병사들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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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정공에게 원수를 갚은 교룡은 이제 기장산(달음산)에 가서 웅신(熊神)이 되어 사람들에게 해독을 끼침이 날로 심했다. 그에 앞서 국사로 봉해진 스님은 후일 웅신을 달래서 천도를 시키고, 사람들이 겪는 폐해를 영원히 막기 위해 기장산으로 향했다. 웅신 또한 이를 먼저 알고 동해용왕에게 빌어서 불광산에 숨어 들었다. 스님이 밀단법을 베풀어 웅신을 달래자 이번에는 황금송아지로 변해 달아나려 했다. 다시 바위 굴에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 스님이 불살게(不殺偈)를 설하자 웅신은 마침내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이때 스님이 산 기슭을 헐어두었던 까닭에, 두 갈래로 나 있던 계곡이 한갈래로 변하게 된데서 쌍계사라는 사명(寺名) 또한 역사 속으로 묻혀버리고 장안사라는 새 이름이 붙여지게 됐다는 것이다.

혜통스님의 이러한 자취가 서린 왕망사가 있었던 곳이 경주라는 것 외에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현재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만 경주대학교 경주문화연구소에서 펴낸 '경주문화연구' 2집(1999년 8월)에서 당시 경북대학교 박사 후 연수과정에 있던 이인철 교수가 쓴 논문 '신라중대의 불사조영과 그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르면 '왕망사는 신문왕대에 건립된 사찰'이라는 것과 동국대 경주캠퍼스 내에 있는 한 사찰터에서 왕만사(王滿寺)라고 표기된 명문와가 발견됐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