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에 둥지 튼 비처(秘處)

편집부   
입력 : 2007-07-03  | 수정 : 200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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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원의 비밀


산도(山桃)와 계행(溪杏)이 울타리에 비쳤는데
한 지경 봄이 깊어 두 언덕 꽃이 피었네
혜통이 수달을 한가로이 잡은 때문에
마귀(魔鬼)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네.

명랑법사의 신인비법에 이어 순밀사상(純密思想)을 도입해 새로운 밀교종파를 성립시켰던 해동진언종(일명 다라니종·총지종)의 초조 혜통국사를 찬탄한 찬가다.

스님이 서라벌을 거쳐 모악산에 첫 발을 디딘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말이다. 명랑법사가 창건했던 금광사에 이웃한 경주 남산 서쪽 기슭 은천동 어귀, 지금의 남간사지 근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스님인지라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밀교의 상승법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스님이 당나라에서 수학하고 돌아와서 서라벌에서 활동하다가 모악산을 찾아들어 해동진언종 총본산 주석원을 세운 것은 일대사 인연에 의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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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母岳山)은 예로부터 전라도지역에서 엄뫼(어머니 산), 큰뫼 등으로 부르기도 했던 산으로, 정상아래 자리잡고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과 닮아서 이같이 이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명산이다. 모악산은 세 개의 행정구역(전주시, 김제시, 완주군)을 나누는 경계의 중심에 있으며, 금산사 방향의 내모악과 완주군 구이면 방향의 외모악으로 구분된다. 전라도 전체를 품안에 안고 있는 듯 노령산맥의 중앙부에 위치한 모악산은 호남정맥(湖南正脈)을 그대로 이어 어머니의 품안처럼 아늑한 산세를 흩뿌려 바다에 닿을 것처럼 길게 뻗어 내려서 산자락 아래에 살포시 넓디넓은 호남평야를 펼쳐놓고, 또 한쪽으로 천년고도 전주시를 품고 있다. 그래서 호남평야 한 가운데에서 바라보는 모악산은 마치 어머니가 양팔을 벌려 너른 들녘을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다. 어머니의 너른 가슴만큼 깊디깊은 골짜기에서 솟구쳐 올렸다가 낮은 곳으로 흘려보내는 물줄기는 구이저수지, 금평저수지, 안덕저수지를 채우고 북쪽으로는 만경강과 동쪽으로는 동진강을 찾아드는 넉넉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악산의 아름다움은 어머니의 마음 같이 아늑하고 포근하면서도 넉넉한 품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호남사경(湖南四景)이라고 부를 만큼 빼어난 풍광에도 곁들여 있다. 모악산을 모태로 하는 금산사의 봄 경치와 변산반도의 여름풍경, 내장산의 가을단풍, 그리고 백양사의 설경이 호남사경이다. 이 모두는 현대에 와서 칭송되기 시작한 것이지만 천하의 미륵성지로 알려진 모악산에 가장 먼저 둥지를 튼 것은 밀교였던 셈이다. 스님이 된 이후 당나라 무외삼장을 찾아가 3년을 수학한 끝에 인결(印訣)을 전해 받고, 당나라 황실 공주의 병을 치유한 것은 물론 신라로 돌아와서는 신문왕의 등창을 낫게 하는 등 진언비법으로 숱한 미묘작법을 행하여 그 명성을 널리 떨쳤던 혜통국사가 모악산을 찾아들어 해동진언종 총본산 주석원을 창건한 것은 영호남을 주축으로 하는 양부(신인종과 해동진언종)만다라를 건설함으로써 진호국가불사를 봉행하려 한 지극한 불심에 의한 서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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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원 터가 현재의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인동 140번지 모악산 북쪽 산기슭에 있는 달성사라는 설과 전북 전주시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산997번지 모악산 동쪽 산중턱에 있는 대원사라는 설로 나뉘어 있다. 이 또한 역사적 고증자료가 전혀 없어 한 곳으로 단정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지만, 달성사를 주석원 터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지역 주민들을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이 이곳을 다라니절이라고 지목하고 있다는 점과 주변에 산재해 있는 기와 조각들을 증거로 든다. 당시 주석원의 규모를 짐작케라도 하듯 실제 달성사 주변에는 수많은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고 했다. 반면 대원사를 주석원 터라고 지목하는 사람들은 '신인종의 본산'이라는 구전이 있다는 점과 오대산 진여원이 상원사로 명칭변경 됐듯 주석원도 대원사로 이름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추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무튼 모악산 북쪽 산기슭에서 모악산 가는 길을 따라 물뿌리봉을 마주하며 먼저 달성사를 찾아 들어가면 양쪽으로 소나무 숲의 장관이 펼쳐진다. 한 여름철이라도 서늘하게 햇볕을 가려줄 법한 소나무 숲을 한참 지나면 진언의 소리이기도 하듯 개울물소리가 마음을 평정시켜 준다. 길바닥에 지천으로 널린 소나무 잎을 밟으며, 개울물소리를 벗하고 걷는 순간 어느새 한글로 '달성사'라고 쓴 입석을 마주하게 된다. 1930년대 폐사지를 일구어 극락보전, 삼성각, 요사채 2동을 짓고 '성인이 계시는 곳'이라 하여 달성사라고 이름했다는 이곳은 지금도 한창 불사가 진행중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혜통국사의 찬가에서도 엿볼 수 있듯 살랑바람에도 복숭아꽃비가 흩뿌려진다. 이러한 장엄의 전당에 대숲이 개울물소리를 벗하여 나직이 진언을 염송한다. 대원사는 여기서 돌아나가 모악산 동쪽 산중턱을 찾아가거나 산길을 넘어가면 있다.

주석원! 그때 그 시절, 그곳이 사뭇 그리웁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아무것도 보고, 느낄 수 없는 현실이 그저 한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