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세월 속에 흔적마저 묻고…

편집부   
입력 : 2007-05-16  | 수정 : 200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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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사의 서기(瑞氣)

 

신라 선덕여왕 대 경주 서남산 자락에 천지를 뒤덮고도 남을 법한 금빛 찬란한 광채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 광경은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연화좌에 앉아 설법을 펼 때 광배처럼 펼쳐진 빛이 밤낮을 가림 없이 온 성안을 화창하게 비출 때와 같았다. 그 빛을 따라 사뿐히 흩날리는 맑디맑은 향기는 수광이라는 용왕이 밤마다 뿌리는 향수 비와도 같았다. 그러나 찬란한 금빛 광명에 눈이 피로하거나, 사방팔방으로 흩날리는 향기에 취하는 이는 없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 만 중생을 이익케 하려는 자비광명이요, 생명수에 다름없는 감로정향이었기 때문이다.

뭇 사람들을 경이롭고 환희와 열락의 세계로 인도했던 그 광채가 솟구치고, 향기가 퍼져 오른 근원지는 다름아니라 일찍이 불법에 귀의해서 구법수행을 하던 중 당나라에 들어가 불교의 오묘한 비법을 전수하고 귀국한 명랑법사의 생가가 있던 자리였다. 한 생각을 돌려 마음이 바뀌고, 한 성자의 깨달음으로 온 산하대지가 함께 성불도를 얻듯, 선지식의 생가 터가 일순간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완벽한 불도량으로 변한 것이다. 금분을 바른 옛집은 금당으로 바뀌고, 금당 내부에는 금의(錦衣)를 입은 아미타 부처님이 좌정했으며, 안뜰에는 금탑이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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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용왕님께서 법사의 설법을 간곡히 청하오니 거절하지 마시고 용궁으로 왕림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라 선덕여왕 원년이던 632년 구법을 위해 당나라 들어갔던 명랑법사가 비법을 전수하고 3년 뒤인 635년 서해바다로 귀국할 때 바다 한 가운데서 뱃길을 막고 나선 이가 있었다. 서해용왕의 청을 갖고 온 용(龍)이었다. 명랑법사는 귀국 길을 가로막고 선 용의 간절한 청에 못 이겨, 배만 가던 길로 띄워 보내고 용을 따라 용궁으로 발걸음을 했다. 명랑법사가 용을 따라 용궁으로 들어서자 용왕은 좌불안석, 문밖을 서성이다가 반색하며 맞이했다.

"잘 오시었소. 법사시여. 정말 잘 오시었소. 내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사의 오묘한 법을 청해 듣고자 하오니 기꺼이 베풀어주시오."

명랑법사는 용왕의 청을 받아들여 당나라에서 배운 경이로운 불법의 세계를 처음으로 펼쳤다. 명랑법사가 설법을 마치자 용왕은 물론 용궁에 모여 있었던 모든 대소신료들이 환희에 겨워 만면의 미소를 머금었다. 염화미소가 이런 것이었을까? 용왕은 그 자리에서 황금 천냥(일설에서는 천근이라고 하기도 함)을 보시했다. 그리고는 신료들에게 명랑법사가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을 명령했다. 명랑법사는 배를 먼저 보낸 터라 하는 수 없이 용궁을 나와 물 속으로 잠행하여 신라 땅 생가 우물 밑에까지 이르렀다가 그곳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는 용왕으로부터 받은 황금으로 집을 개조해서 법락의 불도량을 만들고, 이름을 금광사라 했다.

명랑법사가 직접 개설한 이러한 금광사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다만 삼국유사 권5 신주 제6 명랑신인조에 명랑법사의 간략한 행적 정도만 있을 뿐이다. 법사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키고 잉태해서 출산한 인물로 기술된 명랑법사의 원찰이었을 법도 한 금광사는 원원사나 사천왕사와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문두루비법을 행하며 진호국가불사를 했던 호국중심도량으로서 한국밀교의 발원지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통일신라의 영화를 함께 하며 한때나마 당당하게 위용을 드러냈을 금광사. 사료발굴과 지표조사 등이 미진했던 탓일까? 지금에 와서 자취는커녕 지역 주민이나 향토사학자, 전문가마다 말하는 터마저 세 곳으로 엇갈리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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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한 곳은 현재의 경주시 탑동 나정(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있는 우물) 북쪽 남간사 터 아래쪽이다. 이 곳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금광사 터로 말하고 있다. 남간사 터는 보물 제 909호인 당간지주가 남아있어 뚜렷하게 확인된다. 이 곳을 금광사 터로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옛날 큰못이 있어 석양에 경치가 찬란하고 아름다웠는데, 그 못을 금광못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66∼1977년께 이 못의 물을 뽑아 버리고 밭으로 바꿀 때 못 가운데서 큰 절터가 발견됐는데 주춧돌이 줄지어 있었고 화려한 불상대좌며 석조 아미타여래상, 탑재, 석경조각(다른 문헌에서는 주춧돌, 계단석 2점, 불상연화대석, 석불상, 갑석, 석등하대석, 문주하방석이 발견됐다고도 함)이 발견돼 중요한 것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기록처럼 현재는 논으로 변해 있다.

또 한 곳은 경주톨게이트를 빠져나와 7번 국도로 연결되는 경주시 탑동 898-3번지 주택 앞 도로 밑이라는 주장이다. 여기는 오릉초등학교 옆길로, 옛날 큰못이 있었던 곳은 확실하며 금광사 터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주민들이 귀띔해주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지금 도로 때문에 끊어진 산 속으로 왕이 다녔던, 어도(御道)라고 이름했던 길이 나 있었던 곳이라 금광사 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한 곳은 남간사 터 위쪽으로, 그 곳에는 지금도 큰못이 하나 있다.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물을 가둬둔 연못이다. 이곳을 금광사 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단지 개연성을 띈 하나의 가정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논밭이 아니면 도로가 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해져 버린 금광사 터. 찾는 이조차 드문 그곳에 사연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봄바람 한 줄기가 휑하니 스쳐 지나간다. 흘러 가버린 세월처럼….

정유제 기자 refine51@milgyo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