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의 기다림 - 안냐 꼰단냐

밀교신문   
입력 : 2022-08-30  | 수정 : 202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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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를 만난 사람, 붓다가 만난 사람-첫 번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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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용섭

 

높은 가문 출신인 꼰단냐(Koņḍañña)는 집과 마을을 떠나 숲에서 수행을 하는 유행자였다. 그는 아기 싯닷타 왕자가 태어난 직후 그의 미래를 예언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왕자께서 왕궁을 떠나지 않고 어른이 되신다면 왕 중의 왕인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않고 성을 나가면 수행자가 된 후에 진리의 왕인 붓다가 될 것입니다.”

 

꼰단냐는 이내 네 명의 동료 수행자를 불러서 이 소식을 전하며 말했다.

 

“싯닷타 왕자는 결코 성 안에 머물 사람이 아니다. 반드시 성을 나와 수행을 하다가 붓다가 되실 분이다. 왕자께서 붓다가 되실 때 그분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듣자. 반드시 우리의 눈을 활짝 열게 해주실 것이다.”

 

다섯 수행자는 이후 숲에서 수행을 하며 저 어린 왕자가 어서 자라 궁을 나와 깨달음을 이뤄 붓다가 되시기만을 고대하며 지냈다.

 

그들의 바람이 이뤄진 걸까. 싯닷타 왕자가 29세 되던 해에 성을 나왔다. 왕자가 요가의 대가 두 사람을 만나고, 이후 고행으로 수행의 가닥을 잡았을 때 꼰단냐와 네 명의 수행자들이 싯닷타를 만났다. 그들은 싯닷타 곁에서 함께 고행하면서 그가 깨달음을 이루어 자신들을 이끌어주기만을 학수고대하였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행하던 싯닷타가 강물에 들어가 말끔하게 목욕하고 그것도 모자라 여인이 건네주는 영양가 높은 우유죽까지 받아 마셨다. 고행주의자 입장에서 싯닷타의 이런 행동은 타락이고 배신이었다.

 

콘단냐와 네 명의 고행자는 충격에 몸을 떨었다. 저들은 고행을 포기한 싯닷타를 향해 “타락한 자! 배신자!”라는 날선 비판을 쏟아 부었다. 스승이 되어서 자신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주기만을 기다리며 보낸 35년이 아니었던가. 싯닷타의 고행포기는 다섯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고도 남을 충격적인 행동이었다.

 

싯닷타를 내버려두고 꼰단냐는 동료들과 함께 우루벨라 녹야원으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고행을 이어갔다. 자신들이 버리고 떠난 싯닷타가 이내 깨달음을 이뤄서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가 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들은 고행을 이어갔다.

 

그들은 수행자 고따마를 향해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품었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본 진리를 들려줄 사람으로 다섯 명의 동료 수행자를 떠올리고 그들을 향해 보리수 아래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뒤를 좇아 발걸음을 옮길 때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을지도 모른다. 깨달음을 연 직후에는 감히 세상으로 나아가서 진리를 설파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심오한 이치를 어찌 말로 다 설명할 것이며,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붓다의 깨달음에 전혀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굳이 내가 사람들을 찾아가서 법문을 펼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설법하기를 주저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던가.

 

하지만 바로 그 ‘진리’를 목마르게 찾고 있으며 그 진리를 들려줄 ‘스승’을 애타게 기다리는 누군가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바로 꼰단냐를 비롯한 다섯 수행자인 것이다. 왕자로서, 출가자로서, 고행자로서 그들을 만났을 때와는 사뭇 차원이 달라졌다. 붓다가 되어 그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가장 먼저 들려줄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멀리서 고행을 포기한, 나약하기 짝이 없는 타락한 사내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서 비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6년을 함께 수행 했으니 내치지는 말고, 그냥 자리나 한쪽 내어주고 앉았다 가라고 하세.”

 

그러나 이들은 부처님이 다가오자 위의에 압도되어 몸을 일으켜 맞이하였다. 하지만 예전에 함께 고행하던 때 그대로 부처님을 친근하게 부르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말했다.

 

“여래를 이름이나 벗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여래는 공양을 받아야 할 존재이고 바르고 완벽하게 깨달음을 얻은 존재이다. 나는 불사의 경지를 얻었다. 귀를 기울여라. 이제 법을 설하겠다.”

하지만 이들은 말했다.

 

“벗 고타마여, 고행을 열심히 닦아도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데 그대는 타락하여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불사의 경지를 얻었다고 말하는가?”

 

그토록 고대하던 부처님이 눈앞에 있건만 알아보지 못하는 꼰단냐와 네 명의 수행자를 향해 석가모니 부처님은 말했다.

 

“여래는 타락하지 않았다. 고행을 싫어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되돌아가지도 않았다. 여래는 바르고 완벽하게 깨달음을 얻은 존재이다. 이제 진리를 설하리라. 귀를 기울여라. 잘 기억해 보아라. 내가 예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그제야 이들은 수행자 고따마가 예전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반듯하게 앉아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침내 다섯 수행자를 향해 중도를 역설하고 고집멸도 사성제를 들려주었다.

 

그저 무조건 깨닫겠다고 몸을 혹사하는 일은 헛된 짓이요, 고행에도 치우치지 말고 세속의 쾌락에도 치우치지 말며, 삶이란 것이 참으로 힘들고 불만족스러운 것이라는 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차분히 살펴봐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꼰단냐는 전율하였다. 극단적으로 고행을 실천해보았지만 여전히 눈에 무엇인가 덮인 것처럼 모호하고 막막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사성제 법문을 듣는 순간 존재에 대해 어떤 관점에 서야 하는지,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지, 그 목적은 무엇인지가 분명해졌다. 

 

이 지구상에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가 굴렀고, 깨달음을 이룬 스승(여래)에게서 가르침을 들은 사람이 전율을 하며 진리의 눈을 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석가모니 부처님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며 이렇게 탄성을 질렀다.

 

“아아, 콘단냐가 참으로 깨달았구나. 콘단냐가 깨달았구나.”

 

부처님의 이런 탄성을 계기로 콘단냐는 그 이후 ‘깨달은 콘단냐’라는 뜻에서 ‘안냐 콘단냐(Añña Koņḍañña)’라 불리게 됐다. 35년 전, 강보에 싸인 아기가 마침내 붓다가 되어 자신을 찾아와 진리의 눈을 뜨게 해줄 그 순간이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깨달은 분의 법문을 알아차린 자, 그리하여 젊은 스승으로부터 ‘그대가 내 말을 알아들었소’라는 찬탄을 받은 초로의 제자. 불교의 첫 걸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미령/불교강사/경전이야기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