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의 세계를 열다

밀교신문   
입력 : 202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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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인원 이전과 교법파동

5) 불공법의 수립과 교화활동

(3) 도량의 신설과 정비


종단은 교법파동의 와중에도 심인당의 신설과 개축은 활발하게 하였다. 교법파동은 교리와 수행에 대한 논의라서 소유의 다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교리나 수행법의 논의는 건전하게 할수록 교리가 정연하게 되고 수행을 더 치열하게 할 수 있다. 종교 공동체의 본질적인 논의는 건전하게 하면 종단이 더욱 건실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보다 소유나 자리의 다툼은 종단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다. 총인원 건설과 함께 탑주심인당을 개설하여 수행의 본산을 마련했다(19,12.25). 서울 서북부의 교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대구 남산동 소재의 구(舊) 원력심인당인 밀엄(密嚴)심인당을 서대문구 교남동에 이전 신설하고(20,7.19) 대지를 매입하여 건축을 완공하여 헌공불사를 올렸다(21,1.16). 또한 서울 동남부의 교화를 위해서 성동구 전농동에 대지를 매입하여 건축하여 무애(無碍)심인당의 헌공 개설불사를 올렸다(21,11.24). 서울 중앙 용산구 한강로에 대지를 매수하고 심인당을 건축해 관음(觀音)심인당을 개설했다(23,11.29). 

 

나아가 서부 서울에 신교도가 많이 거주해 서대문구 창천동에 대지 및 주택을 매입해 신촌심인당을 개설하고 교화를 시작했다(23,6.14). 그리고 이듬해 대지를 보충 매수해 심인당을 신축해 헌공불사를 했다(24,4.13). 서울 서남의 구로동에 교도가 많이 분포하여 대지를 매입해 실상(悉相)심인당을 개설하고(24,10.31) 1층 부분을 신축해 헌공했다(25,1.30). 실상심인당은 심인당 자립의 시범 형태로 1층에 점포를 만들어 임대해서 수익을 얻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서울 북부 미아동에 명선(明善)심인당을 개설하고 대지를 매입해 신축 건물을 지어 헌공했다(25,9.27). 

 

서울 남부 봉천동에 신교도의 수행을 위해서 가옥을 빌려 임시심인당을 개설하고(25,6.30) 대지를 매입, 신축해 이전 헌공불사를 했다(25,12.29). 또한, 춘천 방등심인당의 건물이 노후해 신축 헌공했다(23,9.15). 수도권과 경기지방의 신교도를 위해서 우선 수원시 북수동에 주택을 매입해 유가(瑜伽)심인당을 개설했다(23,10.21). 이어서 심인당 건물을 개축해 헌공불사를 했다(25,3.20). 인천에 신교도가 요구하여 인천시 송현동에 대지를 매입해 심인당 건물을 건축해 법화심인당을 개설했다(24,1.31). 그리고 경기 북부 동두천에 신교도를 위해서 가옥을 빌려 보타(補陀)심인당을 개설하여(24,7.15) 교화에 착수했다. 대구에 신교도가 늘어가자 화재로 소실되었던 신익(信益)심인당을 신축해 헌공했다(21,1.21). 역시 심인당 건물이 노후한 지정(智淨)심인당을 개축하여 헌공했다(25,11.23). 역시 심인당 건물이 협소하여 선정(善淨)심인당을 개축해 헌공했다(25,6.30). 노령의 시무가 교화하던 언하합강소를 폐지하고 건물은 매각하고 교도는 천혜심인당으로 이동하여 수행하게 했다(25,6.25). 김천 상엄(常嚴)심인당 건물이 누추하여 개축했다(22,5.23). 경북 서부 합천군 합천읍에 가옥을 빌려 입정심인당을 개설하고(23,6.17) 대지를 매수해 신축하고 준공했다(24,7.2). 경북 의성의 진여(眞如)심인당을 개축하고 헌공했다(25,6.30). 경북 북부 영주에 신심이 깊은 신교도가 있어서 대지를 매수하고 심지(心地)심인당을 신축해 헌공 개시불사를 했다(25,11.17). 대구 근교 성주군 예산동에 토지를 매입해 성진(星珍)심인당을 신축하고 헌공 개설했다(26,9.26). 

 

경주지역과 울산에도 교도가 늘어 심인당을 더 개설하였다. 월성군 아화리에 대지를 매수해 도안(導岸)심인당을 신축하고 헌공 개시불사를 했다(24,10.7). 경주 서부의 내남면 의곡리에 대지를 매입해 심인당을 신축하고 각성심인당을 개설했다(24,11.20). 안강의 선혜(善慧)심인당이 환경조건이 좋지 않아 인근 서부리에 대지를 매입해 신축하고 심인당 이전불사를 올렸다(25,9.4). 경주 관구청인 홍원심인당이 노후해 개축하고 헌공불사를 했다(25,12.31). 그리고 울산지역에 교도들의 서원에 따라 울산시 학성동에 대지를 매입해 건축공사를 하고 아축심인당을 개설해(20,7.9) 울산 지역의 교화에 정진하도록 했다. 

 

부산지역에도 교화는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 부산진구 가야동에 대지와 건물을 매수해 개금(開琴)합강소를 이전하여 선덕(善德)심인당을 개설해(20,12.2) 다시 입지조건이 좋은 곳에 부지 78평을 매입해 심인당을 신축하고 이전불사를 했다(24,10.16). 부산진구 모라동에 대지를 매입해 심인당을 신축하고 보불(寶佛)심인당을 개설했다

(21,7.29). 영도구 봉래동에 대지를 구입하여 복전(福田)심인당을 신축해 개설불사를 했다(21,8.3). 그리고 정정(定靜)심인당의 건물이 협소하여 개축해 개시 헌공불사를 했다(22,8.15). 부민동의 정제심인당이 불편해 개축공사를 하고 헌공했다(22,6.23). 부산진구 범일동에 교도의 수행편의를 위해 부지를 매입하고 남도심인당을 신축하고 헌공개시불사를 했다(25,10.22). 경남 마산시의 신교도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마산시 오동동에 주택을 매수해 영신(永新)인당을 개설하고(20,11.5) 심인당이 도시계획에 들어 상남동에 대지 2백평을 매입해 심인당을 신축하고 이전헌공불사를 했다(24,12.18). 포항지역의 심인당도 수행환경을 개선해 신행에 용맹정진하게 했다. 포항제철 부지에 있던 상륜(相輪)심인당을 매각하고(22,3.29) 신흥동에 대지를 매입해 심인당을 신축하고 이전 헌공불사를 했다(24,4.13). 

 

역시 신락(信樂)심인당이 포항제철공장 부지에 편입되어 매각 철거했다(23,4.23). 영일군 오천읍에 전세 가옥을 구해 심인당을 이전하고(23,6.10) 다시 대지를 매입해 신축공사를 해 헌공불사를 했다(24,1.25). 수좌(首座)심인당이 지역적 사정이 좋지 못해 폐쇄하고 위덕(威德)심인당에 통합했다(24,6.29). 기계면의 증일(增一)심인당이 협소하고 지대가 낮아서 몹시 불편해 인근에 대지를 매입하고 신축해 헌공불사를 했다(26,2.25). 울릉도 교화의 교두보로서 여래심인당의 건물이 노후해 개축하고 헌공불사를 했다(25,4.13). 우리나라 서남 지방의 교화는 꾸준히 유지되어 갔다. 대전시 신흥동에 이미 매수해 놓은 대지에 심인당을 신축하고 입실심인당을 이전하고 헌공불사를 했다(21,11.30). 교화의 확충에 비해서 심인당 건물이 노후하고 협소하여 2층 건물을 개축하고 헌공불사를 했다(25,9.4). 충청북도 제천군 제천읍에 대지와 건물을 매입해 장엄(莊嚴)심인당을 개설했다(21,5.3). 또한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대지와 주택을 구입해 심인당을 개설하고 혜정(惠淨)심인당을 개설했으나(21,11.2) 심인당 건물이 흙벽돌로써 위험해 흘어 버리고(21,11.5) 다시 건물을 확장 개축해 헌공불사를 했다(25,8.26). 그리고 청주 각계(覺戒)심인당 건물이 노후해 확장 개축하고 헌공했다(25,11.12). 나아가 전북 전주시의 항수(恒壽)심인당이 도시계획에 편입되어 태평동에 대지를 매입하고 신축하고 이전 헌공불사를 했다(25,11.11). 전남 광주에 교세를 넓히기 위해 학림동에 대지와 건물을 매입해 개수하고 백련심인당을 개설, 교화했다(24,7.30). 이렇게 교법파동으로 종행정은 혼선을 빚어도 교화는 꾸준히 진전했다.


(4) 심인중고등학교 재설립

학교운영 재단이던 보생견직 공장의 대지가 소송사건에 휘말려 대법원에서 패소판결을 받았다. 건물의 철거와 사용료 등을 변상해야 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그 대지를 평당 5천 원으로 매수하기로 했다. 위덕학사에 자금이 없어서 종단에서 800만 원을 무이자로 대여하고 그 중 720만 원은 남아 있는 공장부지로 상환하기로 했다(22,12.17). 그리고 학교법인 위덕학사의 운영방안을 논의하고 정관 중 임원은 종의회에서 선출하고, 사무소는 남산동에 두고 전임서기를 두며, 이사회를 조속히 열어 이사장 등의 임원을 선출하고 본 건을 의결하도록 했다(24,12.15). 중학교 입시제도의 변경으로 심인중학교가 크게 성장해 폐교하였던 심인고등학교를 다시 설립하기로 했다(27,3.1). 고등학교의 재인가로 시급해진 문제가 교사 신축이었다. 그러나 위덕학사는 재정의 곤란으로 자체적으로 교사신축을 할 수 없었다. 종단에서 무이자로 대여해 교사신축을 하고 학교운영에 차질이 없게 했다(26,8.3). 그리고 진기 29년부터 학교의 재정이 호전되면 단계적으로 상환하기로 했다.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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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종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