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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시간들

밀교신문   
입력 : 2022-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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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은 경험의 누적이 필요하고, 영감은 고독의 침전이 필요하고, 가장 황홀한 체험은 적막 속에서의 처절한 관조가 필요하지. 누적과 침전, 적막한 관조, 그 어느 하나 쫓기듯 살아가는 삶에서는 건져올 수가 없어. 분주함 속에서 작가는 글을 쓸 수 없고, 음악가는 곡을 쓸 수 없고, 화가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고, 학자는 연구를 할 수 없어. 분주한 사상가는 말만 많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는 곧 예능인이 되는 거지. 거슬릴 정도로 시끄러운 어릿광대가 되는 거야, 한가하게 죽치고있는 것은 분명 창조력의 바탕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

 

책을 읽다가 몇 번이고 필사한 대목이다. 대만의 대표적 지성인 룽잉타이(龍應台)가 그의 열 여덟 살 아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엮은 <사랑하는 안드레아>라는 책의 한 구절이다. 안드레아는 독일인 아버지와 대만인 엄마 룽잉타이 사이에 태어나서 독일에서 자랐다. 엄마와 아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편지는, 서로를 한 인간으로 인식하고 각자의 관점과 견해들을 거침없이 풀어놓는 이야기로 거듭났다. 엄마 룽잉타이는 견뎌야만 했던 과거로부터 배웠던 많은 것들을 소개한다. 권위적인 정치와 처절한 가난, 말살된 취향의 시대를 살면서 오히려 권력의 본질을 이해하고, 약자를 배려하며 개인의 미세한 차이들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배웠다고 했다. 이는 치열한 자기 사유(思惟)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사유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가능하다. 혼자만의 시간은 룽잉타이가 표현한 누적’, ‘침전’, ‘관조하는 삶이다. 조용하고 한가롭게, 그리고 홀로 사색하는 삶을 살기에 우리 일상은 너무 많은 일들이 즐비하고 복잡하며 어지럽다. 내가 생각한대로 최대한 빨리 결론이 나기를 바라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되기를 바란다. 총알배송, 로켓배송이 아니면 택배로는 의미가 없고, IT 강국 초고속 인터넷을 쓰면서도 느리다고 한탄한다. 다양한 견해의 스펙트럼이 펼쳐진 세상이라기보다는 찬성과 반대로 딱 쪼개진 양 극단의 여론이 춤을 추는 시대이다. 숨가쁜 이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각자의 경험을 누적시키고 감정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한적한 삶을 살아볼 필요가 있다. 오롯이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깊숙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현상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왜 기쁘고 슬픈지에 대해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분명한 자기 인식이 있어야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자유(自由)는 오랜 시간 동안의 경험을 누적하고, 감정과 영감 속을 깊이 파고들며, 그 안에서 처절한 사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숭고한 것이다. 성급해하지 말고 기다려야 가능하다. 그 기다림은 견뎌야만 하는 시간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즐기고 누리는 기다림의 시간이어야 한다. 즉 무엇을 위해 기다린다는 의식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自由)’는 모든 것이 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이유다.

 

김인영  교수(위덕대 융합기초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