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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밀교신문   
입력 : 2022-05-03  | 수정 : 2022-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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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한층 기승을 부리려는 계절이 다가온다. 춘삼월에 피어났던 벚꽃들은 우리에게 이별을 고하며 꽃비를 내리며 사라졌지만,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5월이 되면 모든 생명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생겨나게 한다. 자비의 마음을 밝혀 연등을 달며 다시금 자신의 마음에 자비의 등불을 밝혀 세상을 아름답게 꽃 피울 마음을 가진다.

 

부처님 법을 만났기에 마음의 등불을 밝힐 수 있었지만 우리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소중하고 아름다운 선한 존재이다. 이 세상에 무언가가 생겨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허나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우리에게 슬픔을 남긴다. 생은 좋은 것이나 사는 나쁘다. 그럼 시작은 좋으나 끝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고 인은 좋은 것이고 과는 나쁘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여기에는 좀 이상한 것이 있다. 우리가 받는 과보는 좋을 때도 있으며 나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항상 마지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생과 사를 이야기할 때 생을 좋고 사는 나쁘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마치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와 같이 누군가에 의해 지구가 사각이 아닌 둥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많은 변화는 일어난다.

 

어릴 적 세계지도를 보며 영국과 미국이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잖아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때도 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구를 평면적으로 보여줬던 지도에 착각을 일으킨 것이었다. 일상에 소소한 착각들이 우리의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른 단어로 표현도 가능하나 생과 사를 쓰는 순간 사람들은 그 단어의 무게를 느낀다. 시작과 끝이라는 아주 단편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동계올림픽을 여기서 이야기한다면 앞에서는 더위의 기승을 이야기하더니 웬 겨울 이야기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시기에 치러졌던 올림픽이기 때문이다. 올림픽의 시작은 누구에게나 꿈과 희망의 무대이다. 누구에게나 메달을 가질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의 종착점에는 단 3명의 선수에게만 그 자리에 설 수 있다. 결과는 누군가를 슬프게 하고 힘들게 한다. 이것 또한 일반적 관점이다. 올림픽을 치른 선수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결과에 승복하며 다시 다음을 시작하기 위한 마음을 다잡고 훈련장에서 피땀 흘릴 준비를 한다. 생과 사로 읽을 것이 아니라 사와 생인 사생으로 사가 나쁨의 의미가 아니라 끝남의 또 다른 시작이며 그에 따르는 행동의 마음 준비가 필요하다.

 

행복을 구하기 위해 행복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도 좋겠지만 자신이 먼저 복을 행하는 자비실천의 복행으로 바꾸어 간다면 행복은 당연히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이것이 사생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생과 사는 무거운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고 가벼운 우리의 일상이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부처님의 자비의 등불에 이름을 올렸다면 그에 맞는 자비의 행을 나와 지금 함께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어 보기를 바란다.

 

도원 정사/대승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