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설법 41-이원(二元)에서 자유평등(自由平等)

밀교신문   
입력 : 20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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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솟는 맑은 물은 흐르는데 탁(濁)해지고 못에 모인 탁한 물은 넘는 데서 맑아진다.
 
이원(二元)이란 상대성을 말합니다. 상대성은 나누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함을 말하며 평등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원(二元)의 이치를 차별적 대립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원에는 부처<진리(眞理)>의 이원과 중생<현실(現實)>의 이원이 있습니다. 부처의 이원은 불이(不二)의 이원입니다. 중생의 이원은 차별적 상대성 이원이지만, 이것 역시 불이의 이원으로 돌아갑니다. 일천 강물이 바다로 흘러 모두 한 맛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중생의 이원이 평행을 이룬다는 것은 하늘을 향한 수백의 산이 높고 낮음이 각각 다르지만 모두 하나의 흙과 같은 것입니다. 물이 어디에 있으나 물은 물일 수밖에 없고, 산이 높고 낮음이 다르지만, 한낮 흙일뿐입니다. 이것이 불이의 이원이 되는 것입니다.
 
일원주의, 이원주의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별성으로 배대하면서 일원은 옛날 군주 봉건시대로 좁고 모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원은 현재 자본 자유시대로 넓고 둥글게 사는 시대라 규정짓기도 합니다. 이것은 일원과 이원의 근본 이치를 잘 모르고 좁은 소견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일원과 이원은 같은 것으로 활용에 따라 다르게 논하는 것입니다. 일원을 잘못 활용하면 종속(從屬)이 되는 것이며, 이원을 잘못 활용하면 차별적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종속은 상하가 분명하여 군림하고 억압하기 좋은 것이며, 쉽게 갑질을 일으키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종속적 일원에 물들면, 이원의 차별심이 더욱 강하여 영원히 합일하지 못하고 고립적 배타적 현상이 일어납니다. 인도의 계급제도와 우리의 양반제도가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종교에서 일원을 잘못 활용하여 사람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으며, 신에게 절대복종하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는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神)과 믿는 자는 영원히 하나로 합일하지 못하고 희생만 강조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불교는 부처의 일원을 근본으로 이원을 제시하면서 부처와 중생이 하나로 합일하는 불이를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속적인 일원을 강조하여 절대적 믿음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절대의 믿음과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자신이 곧 신과 같다는 불이의 이원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곧 둘이요 둘이 곧 하나를 이루는 물방울의 평등성과 공(空)을 세워 무아(無我), 무상(無相), 무작(無作)을 깨닫게 하여 자성, 자연, 자주(自主)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상의 법신일불(法身一佛)의 체에서 다신(多神) 다불(多佛)로 출현하여 자주의 용을 보이면서 부처와 중생이 상대가 아닌 진실 불이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일원과 이원은 조화를 이루어 원융무애한 불이를 이루어 차별을 벗어나 평등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자기중심 강할수록 차별하는 마음으로 자기에 맞춘 알음알이로 해석하여 정과 사, 밝음과 어두움, 선과 악, 옳고 그름, 앞과 뒤, 근본과 지말<본말(本末)>의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상대의 잘못을 사정도 모르고 무조건 질타(叱咤)하고 멸시하며 괴롭힙니다. 대립을 고집하는 마음은 시간 따라, 사람 따라, 장소 따라 이해타산(利害打算) 하는 기준만 조금씩 바뀔 뿐입니다. 특히 현금의 지혜로운 사람들만 모인 법율계에서 내린 판단을 보십시오.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것을 벗어난 판별은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우리들 자신이 불이의 이치를 모르고 고질화한 차별심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어리석은 비유 들어보겠습니다. 이 비유는 어떠한 부류를 비난하거나 비방하려는 것이 아님을 먼저 밝힙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추함, 기쁨과 슬픔, 부끄러움 싫어함의 차별을 모릅니다. 시간 개념, 숫자 개념도 모르며 생사까지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어쩌면 본인은 가장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답답하게 생각하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괴로워할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가족이 불편하다는 생각조차 없습니다. 또 하나 시간을 들어보겠습니다. 같은 시간인데 느끼는 바가 다를 수 있습니다.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할 때는 1시간이 1분처럼 빠르게 느껴지고, 괴롭고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는 1분이 1시간처럼 더디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는 1분이 1시간처럼 더디게 가는 것 같고,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1시간이 1분처럼 빠르게 지나감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같은 듯 다른 불이의 이원입니다.
 
불이의 이원은 자신의 차별심을 평등한 마음으로 바꾸는 방편의 실천으로 증득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몸부터 이원평등의 불이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와 선지식은 중생의 상대성 이원이 불이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진각성존도 물과 심의 이원 진리도 이와 같습니다. 물과 심에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모두를 포용하면서 서로 다른 일을 하지만 상대의 하는 일을 인증(認證)하여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을 자유로운 마음으로 대하는 행동과 언어로 상호공양 하는 평등행을 실천하도록 가르친 것이 진각성존의 상대성 이원입니다. 부처와 자신이 불이가 되는 귀명 합장, 부처와 자신이 평등을 이루는 불이의 참회, 자비심 가득한 불이의 희사, 용맹심 깊은 불이의 염송으로 부족함이 없고, 아픔이 없고, 어긋남이 없는 해탈의 얻은 다음 구경에 법신일불로 돌아갑시다.
 
선인은 선의 물질이 악인은 악의 물질이 일어나는 것이 인연이 평등한 불이의 인과법입니다. 선의 물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많아져서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되고, 악의 물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무거워져 고통이 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물심의 이원입니다. 선은 자비로 시작되고 악은 탐욕으로 시작됩니다. 자비와 탐욕은 하나의 마음에서 나오므로 본래 일원인데, 활용하는 과정에서 자비와 탐욕의 이원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물과 심의 이원 속에 어리석게 소중하고 귀한 생명을 함부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될 것을 차별적인 눈이 있고 차별적인 귀가 있고 차별적인 코가 있고 차별적인 입이 있고 차별적인 몸이 있고 차별적인 생각이 있어서 상대와 비교하면서 지나치게 욕심과 집착으로 상대보다 많고 좋고 나은 것을 채우느라, 스스로를 괴롭게 하면서 상대방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면 자연 절로 차별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며, 그 자리에 상대와 내가 하나라는 부처의 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상대와 비교하는 권력과 명예와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는 수행을 합시다. 부처와 자신이 하나이듯이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수행을 합시다. 차별심을 내려놓는 불이의 수행을 한다면 만물인 상대와 나의 심성이 평등하여 하나 되는 불이의 자리에서 무한한 해탈 공덕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좋고 좋은 날이요 달마다 좋고 좋은 달이며 해마다 좋고 좋은 해가 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좋고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며, 하는 일마다 좋고 좋은 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원에서 자유평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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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 정사/기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