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설법 40-정(情)과 성품(性品)

밀교신문   
입력 : 202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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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이 곧 사정(私情)되고 사정이 곧 외도 되어 널리 중생 사랑하는 그 성품에 도적(盜賊)이라. 정이 발전하게 되면 모든 사(私)가 일어나고 성품 발전하게 되면 공의(公義)가 곧 일어난다.
 
인간 세상은 정으로써 다스려지는 세상이라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천상·수라·축생·아귀·지옥에는 인간계만큼 정이 없습니다. 인간계가 정으로 움직이다 보니 많은 사사로움이 일어나서 진정한 즐거움보다 고통받음이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세계는 사바세계라 하여 그 고통을 감인(堪忍)하고 살아가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정은 좋은 듯 하지만 잘못 사용하여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정으로 살지 말고 성품으로 사는 길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정(情)은 봄철에 푸른 싹이 돋아나듯 마음이 생동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돌봄의 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돌봄을 연결해주는 것이 정인지만, 정이 때로는 해침을 주기도 합니다. 아무리 정을 사용하여도 해롭지 않으려면 정을 좋은 방향으로 승화시켜 성품으로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정은 밖으로 나타나기를 좋아하는 것이라면, 성품은 숨어 있는 덕입니다. 정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하고, 성품(性品)은 천생으로 타고난 것이라고도 합니다. 성품과 정은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만물에도 존재합니다. 정과 성품은 사람이든 자연이든 같지만, 다만 사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지거나 잡을 수 없지만, 밝은 마음, 맑은 마음, 청빛 찬란한 마음이 본성의 성품입니다. 본성의 성품에서 삶을 작동하는 정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용하는 정에는 크게 인정(人情)과 물정(物情)으로 나눕니다. 도의(道義) 시대는 정을 사용하여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았지만, 도의가 없는 물질 시대는 본성의 정은 없어지고 탐욕과 집착의 물정을 주인으로 삼아 모든 평가를 물질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는 진실한 행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기준으로 하는 시대
는 인정을 버릴 수 없고, 물질을 기준으로 하는 시대는 물정을 멀리할 수 없습니다.
 
진각성존께서 인정과 물정은 한꺼번에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정은 고집스럽고 집착이 강하므로 정을 세울 때는 성품은 저절로 무너진다는 것도 동시에 말씀하였습니다. 정은 밖으로 보기에는 성품보다 강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약합니다. 성품은 나타낼수록 강하게 되면서 평안해지지만, 정은 많을수록 고통이 더욱 짙어질 뿐입니다. 정이 많으면 성품은 메마르게 되고 성품이 메마르면 고집이 세어집니다. 마치 검은 염소와 같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염소의 두 뿔을 잡고 턱을 땅에 닿도록 눌려도 턱은 쉽게 땅에 닿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고집으로 뭉쳐진 힘의 작용입니다. 이러한 강한 고집은 부드러운 물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염소는 환약 같은 동글동글한 변을 배설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은 같습니다. 본래부터 영원하고 무상한 성품이 중생으로 태어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사용하면서 유한(有限)한 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정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이왕지사 정을 떠나 살 수 없다면, 그 정을 좋은 방향으로 활용하여 고통 없는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탐욕을 멈추고 성냄을 멈추고 어리석음을 멈춘다면 가능합니다.
 
사람은 곧 사라지는 인정은 쓸 줄 알면서 영원한 성품을 보존하는 공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품 찾는 공부만 한다면 불가사의한 힘을 얻어 고통으로 흐르는 방향을 행복으로 흐르도록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성품 찾는 수행으로 공덕을 얻게 되면 재앙의 바람이나 고통의 물결도 멈추게 되며 눈앞의 서원은 차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에 집착하지 않고 성품 찾는 마음공부를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밝고 맑은 성품으로 교체됩니다. 이것을 하루아침에 이루려 하지 말고 끝없는 시간 속에서 습성이 될 때 묵은 정의 습관까지 닦아내어 본래의 성품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차별하는 마음이 있고, 간사한 마음이 있고, 아끼는 마음이 있어 자신의 이익이 없으면 정을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특히 물정에 있어서는 더욱 심합니다. 인정이 두터운 사이면 허물을 보더라도 용서하는 마음이 있지만, 물정은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티끌 같은 허물도 태산처럼 보고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정은 내리사랑이라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과 같고, 물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어 부모 형제조차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흔히 “부(富)는 3대를 잇기 어렵고 권세는 10년을 넘기기가 어렵다<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생은 청정한 성품은 찾지 않고 곧 사라질 정에 이끌러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정이 난무(亂舞)하면 가난하기가 쉽고, 물정이 난무하면 병고가 끓일 날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타파할 수 있는 것이 성품 찾는 수행입니다. 중생의 자성에 심인(心印)으로 본구점시(本具點示) 하면 찰나에 정화된 성품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만나기 어려운 인간의 몸과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정법을 만났습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면서 행복만이 존재하는 만다라의 세상을 세울 힘이 성품입니다. 이제 그 힘을 일깨워 주는 것이 마음공부를 합시다. 밀교의 수행은 성불을 목적하지 않습니다. 성불하기 이전에 넉넉하게 살아 보아야 합니다. 건강하게 살아 보아야 합니다. 화목하게 살아 보아야 합니다. 자신만의 이익을 놓아야 합니다. 자신만의 명예를 놓아야 합니다.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만의 고집을 자신만의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방하착(放下著)합시다.
 
산과 계곡은 높고 낮음이 있지만 언젠가는 높은 곳이 낮아지고 낮은 곳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불<화(火)>의 본성이 따뜻함이라면 불꽃은 정입니다. 사납던 불꽃도 희미해질 수 있고 희미하던 불꽃도 사나워질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특히 인정이든 물정이든 똑 같습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정이 아닌 일체중생과 자연이
다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자성을 찾는 공부를 하여 인정과 물정에 대한 공부를 하기 바랍니다.

5면=남산동(현 희락심인당) 참회원 낙성법회에서 설법하는 회당 대종사.jpg

혜정 정사/기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