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 73-유언을 남기다

밀교신문   
입력 : 202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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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언을 남기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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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청년 한 사람이 목욕재계하고는 온몸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동서남북과 상하 여섯 방향을 향해 경건하게 절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청년 이름은 싱갈라카. 그는 어마어마한 대부호로 경전 주석서에 따르면 그는 부모 재산 4억금을 물려받았다는데, 그게 요즘으로 치자면 얼마나 되는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입이 딱 벌어지게 큰 재산을 지녔다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렇게 큰 재산을 지녔으면서도 매일 아침마다 성문 밖에서 여섯 방향을 향해 경건히 절을 올리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라자가하성으로 아침 탁발을 나선 부처님이 그를 발견했습니다. 부처님은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지금 무얼 하고 있습니까?”
 
청년은 기도하던 손을 풀고서 대답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남긴 유언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이렇게 성문 밖에서 목욕재계하고 온갖 방향을 향해 절을 올리라는 유언 하나를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청년의 대답이 끝나자 말했습니다.
 
“성자의 법칙에서는 여섯 방향에 절을 하는 것이 조금 다릅니다.”
 
그저 아버지가 남기신 유언을 따르려고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예경을 올리던 청년은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다른 방식이 있다는 말이로구나. 게다가 성자의 법칙에서도 동서남북상하 여섯 방향에 절을 올리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부처님도 나와 똑같이 기도를 하고 계시다는 말씀이다. 어디 한 번 여쭤봐야겠다. 어떻게 하시는지.’
 
청년은 경건히 허리 굽혀 절을 올리며 여쭈었고, 부처님의 법문이 시작됩니다. 초기 경전인 『디가 니까야』에 들어 있는 「싱갈라카 경」은 바로 이렇게 이른 아침, 길에서 만난 부처님과 부잣집 청년의 대화로 시작하지요.
 
부처님은 이른 아침마다 무작정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탁발하러 들어가지 않습니다. 절에서 나오실 때 가만히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살펴보시며 어느 곳으로 가는 게 좋을지 결정합니다. 가령 누군가가 지독한 절망에 빠졌다가 그 절망의 나락을 인연으로 조금 더 깊이 인생을 들여다볼 시기가 되었을 때, 혹은 누군가가 한없이 즐거움에 젖어 지내고 있지만 그 즐거움이 깨져버려 혹심한 괴로움을 느끼게 되었을 때, 또는 누군가를 향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 분노의 화살이 오히려 그 자신을 향하고 있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었을 때, 바로 이런 때가 부처님을 만날 절호의 찬스입니다. 부처님은 이른 아침 세상을 찬찬히 둘러보시며 이런 인연을 살피고 그 사람과 만날 곳으로 탁발을 나선다는 것입니다.
 
대부호인 싱갈라카는 비교적 무난하게, 아니 더할 수 없이 풍요롭게 살고 있었지만, 딱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가 너무 풍요로워서 마음공부할 생각을 전혀 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살아생전 아들에게 수행자들을 자주 찾아뵈라고 일렀지만 아들은 그것만큼은 하기 싫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아버지, 수행자를 만나면 허리 굽혀 절을 하거나 무릎을 꿇기라도 해야 하는데 괜히 허리 아프고 무릎 아프고, 게다가 옷도 더러워지기만 할 겁니다. 그러다가 친해지면 집에 초대하고 공양이라도 올려야 할 텐데 전 그 모든 일이 다 성가십니다. 아버지는 존경하는 수행자에게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그냥 제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렵니다. 자꾸 제게 수행자에게 나아가라는 말씀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결국 아들을 설득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된 아버지는 임종의 자리에서 이렇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죽고 난 뒤에 너는 이른 아침 성문 밖으로 나가서 목욕재계하고 동서남북상하 여섯 방향에 절을 올리거라. 내가 당부하는 것은 딱 이것 하나뿐이다.”
 
아버지는 내심 바라고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여섯 방향에 절을 올리는 아들이 부처님과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부처님은 그날 아침에 세상을 둘러보다가 싱갈라카를 만날 인연이 무르익었음을 알아차리셨고 그가 기도하고 있는 방향으로 탁발을 나선 것이지요. 그리고 싱갈라카를 만나 여섯 방향에 대고 절을 하는 이유를 물으시면서 슬그머니 그에게 법의 인연을 맺어주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운을 띄운 ‘성자의 법칙에서 여섯 방향에 기도하는 법’은 다른 게 아닙니다. 행복을 바라며 간절히 기도를 올리는 것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런 일입니다. 다만,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행동과 말과 마음에서 그릇된 것들을 몰아내고 멈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재산을 불리고, 모은 재산을 잘 지켜나가기 위해 여섯 가지 잘못된 행동부터 멈춰야 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런 뒤에 여섯 방향을 향한 기도를 일러주는데, 여섯 방향이란 우리가 살면서 맺는 인간관계를 의미합니다. 동쪽은 부모라 생각하고, 남쪽은 스승, 서쪽은 배우자와 자식, 북쪽은 친구와 동료, 위쪽은 고귀한 수행자, 아래쪽은 자신에게 고용된 사람들이라 생각하고서 인간관계를 현명하고 너그럽게 유지해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주십니다. 결국 행복이란 인간관계를 잘 맺는 데에서 오는 것이라는 게 부처님 법문입니다.
 
법문도 법문이지만 그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유언을 남기는 방식이 참 흥미롭습니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줘도 그 재산을 자식이 잘 지켜나가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재산 때문에 의좋던 자식들이 등을 돌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살아생전 부모가 스승처럼 자식에게 훈계를 주었어도 어쩌면 자식은 그걸 잔소리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싱갈라카 아버지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자리에서 전전긍긍했을 테지요. 어떻게 하면 자식이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또렷한 정신으로 유언을 남길 수 있는 것도 축복입니다. 재산과 같이 완성된 어떤 정답을 안겨주기 보다는 자식 스스로가 지혜를 찾아 나서는 인연을 맺도록 유도한 이 아버지의 방법이 어떠신가요? 일본의 한 스님은 제자들에게 “살다가 힘들 때 펼쳐 보아라”라며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입적하셨지요.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했고 편지에 적힌 스승의 간단한 한 마디 말씀으로 다시 살아갈 용기를 내었다고 하지요. 그보다 더 풍요로운 유산이 또 있을까요?
 
선선한 초가을 아침, 세상에 남길 유언의 내용과 방식을 생각하기에 참 좋은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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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마옥경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