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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다’

밀교신문   
입력 : 202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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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다”는 성철 스님의 법문으로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말이다. 너무도 평범한 말이지만 평범하기에 오히려 심오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깨달음 또한 이처럼 단순하고 명백할 것이다. 여래는 깨달음을 얻고 다섯 수행자에게 가르침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우연히 길에서 우파카라는 수행자와 마주치고, 그에게 깨달음을 가르쳐 주는 최초의 설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파카는 빈정거리며 “그럴지도 모르지요”하고 떠나버렸다. 깨달음이 빈정거림의 대상이 될 정도로 평범하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비유이다.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공기(산소)”라 말하고 다닌다면 빈정거림을 받을 것이다. 누군가 “중생은 태초부터 불사(不死)하고 있으며, 중생은 다시는 모태에 들지 않는다(숫따니빠따 152)”고 말하고 다닌다면 빈정거림을 받을 것이다. 누군가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분별이 없고, 현재만 존재한다”고 말하고 다닌다면 또한 빈정거림을 받을 것이다.
 
여래의 6년 수행 결과인 깨달음의 경험은 고집멸(苦集滅)의 공(空)으로 설명되고, 여래는 팔정도 정명(正命),정든(正勤), 정념(正念), 정정(正定)으로 공의 기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비유하여 기타 줄의 느슨함과 팽팽함의 中道이다. 깨달음에 관한 금강경의 설명은 시명(是名)으로 시작된다. 법즉비법비비법시명법(法卽非法非非法是名法)이니, 법(法)은 법(法)이 아니고, 법(法)이 아닌 것도 아니고, 법(法)이라 부를 뿐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와 같은 뜻이고, “진리(法)는 모른다”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비유하여 사문유관(四門遊觀)의 노인과 병자(病者)와 사자(死者)가 고(苦)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산즉비산비비산시명산(山卽非山非非山是名山)이니, 산은 산이 아니고, 산이 아닌 것도 아니고, 산이라 부를 뿐이다. 제산무아(諸山無我)이고, 산즉시공(山卽是空)이고, 산즉시산(山卽是山)이니, 성철 스님은 산즉시산(山卽是山)을 말했을 것이다.
 
누구도 산을 모르지만, 산은 그 스스로 있고, 그 스스로 변할 뿐이라는 뜻이다. “산은 산이다”도 맞고, “산은 산이 아니다”도 맞다. 또한 “산은 산이다”도 틀리고, “산은 산이 아니다”도 틀리다. 말하는 사람의 산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음이고, 듣는 사람은 맞고 틀림을 알 수 없다. 산이 크다거나, 작다거나, 혹은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거나 하는 말들은 모두 비산(非山)이고 비비산(非非山)이다. 인연에 연기된 것이고, 상(相)이고, 편견이고, 어리석음이다.
 
깨달음에 관한 여래의 가르침은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니 저것이 없다, 이것이 생기니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사라지니 저것이 사라진다”이다. 일반적으로 연기에 관한 설명으로도 해석한다. “이것”을 무너뜨리고 넘어서는 것이 깨달음일 것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저것의 “있음과 없음”의 경계와 분별이 무너지고, 저것의 “생김과 사라짐”의 경계와 분별도 무너진다. 이것을 넘어서면 저것의 “있음과 없음”의 경계와 분별을 넘어서고, 저것의 “생김과 사라짐”의 경계와 분별도 넘어선다. 비유하여 “저것”은 괴로움과 즐거움, 죽음과 태어남, 어리석음과 깨달음이니 이 역시 상(相)이고, 편견이고, 어리석음이다.
 
삶이 먼지이면 깨달음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이다. 깨달은 자가 깨달음에 머물면 어리석음이다. 깨달음이 먼지이면 삶은 삼천대천세계이다. 여래는 금강경 법회인유(法會因由)의 모습으로 위타인설(爲他人說)의 삶을 사셨으니, 팔정도 정견(正見),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이다. 비유하여 악하지 않고 선한 삶의 중도(中道)이다.
 
박기현/위덕대 경찰정보보안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