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설법 37-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밀교신문   
입력 : 2021-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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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법(有爲法)은 각종 인연 화합(和合)하여 조작하고 있는 모든 현상이니 배워 일을 알게 되고 무위법(無爲法)은 분별조작(分別造作) 하나 없이 일이 자연 이뤄짐을 말함이니 깨쳐 이치(理致) 알게 된다.
 
진각성존께서 유위 무위를 말씀하시면서 참회문에 “유위 무위 일체 일과 이치(理致)에 지혜가 밝고 대비 결정코 용예(勇銳)하여 육행으로 내 종지를 굳게 세워 마군(魔軍)을 항복 받고 외도를 제어(制御)하여 구경성불하겠나이다.” 지비용으로 목적을 밝혔습니다.
 
인간의 삶 중에 가장 큰 관심사가 ‘있다, 없다.’ ‘있어 보인다, 없어 보인다[有無]’와 ‘할’, ‘함’, ‘바람[爲]’입니다. 유위(有爲)는 인연에 의하여 생긴 삼라만상으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 위작(爲作)하고 조작(造作)한다는 뜻입니다. 법을 적용하면, 의보(依報)로 윤회하는 근본입니다. 무위(無爲)는 본래의 것, 본래의 모습, 진리로써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변화를 초월하여 언제나 상주하는 절대적인 진실이며, 법을 적용하면 공(空)·법성(法性)·진여(眞如)·실상(實相)·열반(涅槃) 등의 정보(正報)를 이름합니다. 유위법으로 성립한 만유(萬有)는 변천하는 속성이 있어 반드시 생멸하지만, 무위법은 인연을 떠나서 존재하므로 영구불변하여 상주하는 것입니다. 사바세계는 유위법과 무위법의 방편이 필요하므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무위법의 ‘화엄경’으로 삼칠일간 자수법락 하였습니다. 중생제도를 위하여 보살이 되어 제1차 ‘아함경’과 ‘방등경’을 설하였으니, 이것이 유위경(有爲經)입니다. 제2차 설한 ‘금강경’은 무위경(無爲經)이며, 제3차 법화와 열반으로 회향하였습니다. 제3차 설법 중에 유무경(有無爲經)인 밀법(密法)으로 진실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즉신성불(卽身成佛)] 하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모든 것이 상대성으로 작용합니다. 복(福)이 있으면 화(禍)가 있고, 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고,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고, 밤과 낮이 있고, 춥고 더움이 있으며, 잘하면 잘못하는 것이 있으며, 보이는 것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삶의 평등입니다. 이 평등한 작용을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위(爲)란 ‘할’, ‘함’, ‘위하여’, ‘행위’ 등을 뜻합니다. 위(爲)자를 풀어보면, 손톱으로[爫] 할퀴어 밑바닥에 있는 것을 찾아내는 형상으로서 원숭이를 모본(模本)으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위하여 먹을 것을 찾는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반드시 한다’, ‘꼭 한다’ 하는 간절함과 함께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며, 또 하나는 평소에 손톱으로 털을 헤치면서 무엇인가를 제거하는 형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잠시도 놀지 않고 먹이를 찾고, 장애를 제거하려는 어미 원숭이의 행위를 반영한 것입니다. 또한, 간곡한 바람[願]의 뜻도 담고 있습니다. 제가 출판한 서적에 “위(爲) 여의성취(如意成就)”, “위(爲) 만사형통(萬事亨通)”, “위(爲) 복지구족(福智具足)”이라, 첫머리에 위(爲)자를 둔 것도 바람의 뜻을 담은 서명(署名)이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모임을 할 때도 “위하여”를 외치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유무(有無)에서 위(爲)를 첨부하면 ‘있다, 없다,’ 구분하는 말이 아닌 삶의 가치를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삶의 가치는 좋은 것 나쁜 것, 옳은 것 그른 것을 구분하여 가치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행위(行爲)는 행위 자체 그것만으로도 이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행위는 다양하지만, 그 가치는 평등한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 악의 가치가 있고, 선을 행하면 선의 값어치가 있습니다. 사냥하는 분은 사냥을 즐기는 가치가 있고, 놀음하는 이는 놀음에서 가치를 느끼며, 거짓말하는 이는 거짓말에서 즐기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속는 모습을 보고 즐기며, 남을 해치는 사람은 해치는 것을 즐기는 등 좋지 못한 삶의 가치를 지닌 자도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신만을 위하여 상대에게 피해를 주고 위해(危害)를 준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다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좋은 방향의 가치를 깨닫게 하고자 유위법과 무위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은 사람은 발을 뻗고 잠자고 때린 사람은 웅크리고 잠을 잔다.”고 하는 속담이 있듯이 나쁜 가치를 권장할 수는 없지만, 서로가 좋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참다운 가치를 알고자 노력은 해야 할 것입니다.
 
중생으로 태어나는 것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과 같이 본래 적정(寂靜)한 자성(自性)에 번뇌의 돌을 던져 윤회의 소용돌이를 만들었습니다. 이 번뇌의 돌을 던진 것이 삶의 첫 행위(行爲)입니다. 소용돌이가 삶의 가치(價値)입니다. 가치는 평등하여 선악(善惡)이 없지만, 사람이 보기에 따라 좋고 나쁨으로 평가합니다. 삶의 가치 가운데 한계가 있어 보이는 것을 ‘유위’라 하고, 한정이 없어 보이지 않는 것을 ‘무위’라 하는 것입니다. 한정이 있는 유위법은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치며, 한정이 없는 무위법은 종교기관에서 자율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볼 수 있고 볼 수 없을 뿐입니다. 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어 언제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은 한계가 없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볼 수 있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 부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법으로 유위의 행과 무위의 행을 깨달을 수 있도록 방편의 말씀을 잘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불(佛)은 본래 ‘있다, 없다.’ 분별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자연법이(自然法爾)입니다.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보고 “아” 하는 한 마디로써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뿐입니다. 우리들은 지나칠 정도로 ‘있다[有], 없다[無]’로 구분하면서 ‘한다[有爲], 못한다[無爲].’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해진 진실을 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자에 집착하면서 또 하나의 번뇌를 일으켜서 ‘있었다, 없었다’라는 역사를 논하고 ‘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문제를 분석하면서[哲學], 쓸데없이 낮과 밤을 지새우면서 모으고 흩고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삶에 집착한 마음으로는 좋고 나쁨을 분별하여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행동하고[爲], 말하고[爲], 생각하고[爲], 준비하고[爲], 바라는[爲] 그 속에 삶의 가치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유위법으로 행하면, 은혜도 만들고 빚도 만들어 받고 갚느라 윤회를 하게 되지만, 무위법으로 행하면 은혜도 빚도 없음으로 윤회도 자연이 없는 것입니다.
 
무위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일이나 불필요한 것을 하지 않는다는 뜻도 됩니다. 먼저 상대의 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각자에게 맡기고 흐르는 대로 지켜보면서 간섭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음으로 상대가 행한 일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그렇게 하여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잘하는 것이든 잘못하는 것이든 그것들이 모여 조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고추의 매운맛과 수박의 단맛은 모두 빛과 물과 허공에 있습니다. 그것을 고추는 매운맛만, 수박은 단맛만을 골라 자기 것으로 응집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 것이 좋다, 매운 것이 좋다고 고집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운행과 만물의 활동을 자신의 좁은 소견으로 어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자신의 좁은 유위 속에 넣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지배하려면 중도의 이치를 깨닫고 하십시오. 산하대지는 본래 청정한 것입니다. 유위와 무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평등일여(平等一如)하며, 융통무외(融通無畏)한 자리로 청정무위(淸靜無爲)하며, 무위법신(無爲法身)이요 진여법신(眞如法身)입니다.
 
이 세상에는 허물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지혜로 유위 무위의 일체 일의 이치를 깨달아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며, 일체중생을 포용하는 큰마음을 일으켜서 육행으로 종지를 굳게 세우는 대 선지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염송하면서 일편무위(一片無爲)의 진묘향(眞妙香)을 마음으로 사루며, 무위자성(無爲自性) 진묘락(眞妙樂)을 즐기는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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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 정사/기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