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설법 35-소아(小我)와 대아(大我)

밀교신문   
입력 : 2021-04-09  | 수정 : 202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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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 함은 자기가 곧 이익(利益)하고 안락(安樂)하고 자기명예(自己名譽) 자기 지위(地位) 자기의견(自己意見) 세움이라.


아(我)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상(相)이라는 것은 글자를 해석하면, 나무 위에서 보는 눈, 나무의 나이테, 나무의 마디 등을 말하는 것으로 자연과 만물과 시간에서 보여주는 것을 살핀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자기중심으로 살피는 것이 아상(我相)입니다. 아상은 자신이 만든 업이며, 업은 곧 윤회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상을 잘 이용하면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은 본래 없던 세계였는데 무시겁에 생겨났습니다. 처음 생겼을 때는 물질도 탐욕도 존재하지 않은 무색계(無色界)였습니다. 무색계가 수 없는 세월을 지나면서 물질이 생성하여 색계(色界)로 변천하였습니다. 다시 많은 겁이 지난 뒤 물질에서 탐욕이 생기면서 욕계(欲界)로 변천하였습니다. 무색계와 색계는 하늘[天空]로 선정적(禪定的)인 세계요, 욕계는 하늘과 땅이 공존하는 세계입니다. 이 셋을 삼계(三界)라 합니다. 삼계는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욕계에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무색계는 4개의 선정(禪定) 세계로 나누어지고, 색계는 정묘한 물질로 이루어져 18천으로 나누어졌으며, 욕계는 6천을 포함하여 육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28천의 천상과 5도[인간, 수라, 축생, 아귀,지옥]로 이뤄진 것이 삼계입니다. 

 

이루어진 것은 언젠가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진리에 따라 삼계도 생긴 순차대로 본래 없던 것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소멸하거나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변천하여 바뀌는 것입니다. 바꿀 수 있는 장소가 아상을 뿌리로 하는 욕계이며 바꾸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점점 고통스러운 방향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 잘못된 바뀜이 아상에서 인상(人相)을 일으키고, 인상에서 중생상(衆生相)을 나오게 하며, 중생상에서 수자상(壽者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욕계에 살면서 한 생각 바로 세우면 극락정토에 살게 되고, 한 생각 잘못하면 지옥예토(地獄穢土)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상의 근원은 욕심이며, 욕심 때문에 뭇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출생할 때 일곱 걸음을 옮기시고 사방을 돌아보며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태자가 선언한 ‘유아독존’의 아는 대아적인 말씀이며, ‘삼계개고’의 약속은 이 세계를 극락정토로 정화하겠다는 맹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욕계가 삼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과 소아를 대아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증명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자기중심 생각이 있습니다. 탐욕을 뿌리로 자기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아상(我相), 겉으로는 계율을 지키는 것 같지만 지키지 않는 인상(人相), 삼계의 고통을 괴로워하면서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하늘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중생상(衆生相), 한번 잡은 것은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놓지 않으려는 수자상(壽者相)으로 이어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상은 자신을 가리키고 인상은 상대를 말하며, 중생상은 자연과 만물과 뭇 생명을 말하며, 수자상은 시간을 뜻합니다. 이것이 4상과 삼간(三間)의 변천 작용입니다. 그리고 4상은 다시 8상이 됩니다. 아상은 소승적 아상과 대승적 아상으로 나누며, 이를 소아 대아라 하고, 인상은 소승적 인상과 대승적 인상으로 나누며, 이를 소인 대인이라 하며, 중생상은 소승적 중생상과 대승적 중생상으로 나누며, 수자상은 소승적 수자상과 대승적 수자상으로 나누어집니다. 

 

‘아상’ 중에 소아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며, 대아는 자신의 위치를 바로 지키는 ‘다움’을 말합니다. 즉 아버지다움, 어머니다움, 남편다움, 부인다움, 자식다움, 남자다움, 여자다움, 아이다움, 어른다움, 선생님다움, 학생다움, 정치인다움, 법조인다움, 경제인다움을 말합니다. 자기다움이 성취될 때, 윤회하지 않는 해탈을 얻게 되면, 첫 깨달음 자가 성문(聲聞)입니다. 

 

‘인상’ 중에 소인은 모든 것을 상대와 비교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열과 빈천을 분별하면서 항상 자신의 유리한 부분과 잘하는 부분은 크게 나타내면서 유세하고 뽐내며, 상대의 좋은 부분과 잘하는 부분을 감추면서 시기와 질투로 사사건건 허물 보고 부정하면서 방해하는 것이 소인상입니다. 특히 입으로는 윤리 도덕을 말하면서 행동은 하지 않고 자만심만 가득하며, 권력과 재물에 아부하고 빈천한 이를 멸시하며, 혹 남에게 도움을 줄 때도 좋은 것을 베풀지 아니하고, 쓰다 남은 것을 주되 아까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소인상입니다. 대인은 자신보다 먼저 상대를 생각하여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상대방이 어렵고 힘들어함을 항상 걱정하고 상대의 행동을 좋은 마음으로 말하면서 항상 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 대인상입니다. 상대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 해탈한 자를 불교에서 인연법을 성취한 연각(緣覺)입니다. 

 

‘중생상’ 중에 소승적 중생상은 자연과 만물에 고마움을 모르고 모든 것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함부로 자연과 만물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특히 동식물이 주는 혜택의 고마움을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고 낭비하는 것입니다. 혹 애완동물은 사랑하고 보호하는 자비심을 지녔다 하여도 부모와 형제와 이웃을 소홀히 생각한다면 이것은 소승적 중생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행을 떠나면서 집에 계시는 부모님은 걱정하지 않으면서 애완동물을 걱정하는 것, 부모와 생활하는 것은 싫어하면서 애완동물과 산책하고 돌보는 것, 유명브랜드와 귀중품을 소중하게 하면서 부모 형제와 친척과 이웃에 소홀하게 하는 것 등이 모두 소승적 중생상입니다. 대승적 중생상은 자연과 만물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하면서 어려움과 고통을 들어주며, 베풀고 감싸주고 의지처가 되어 줌에 항상 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 대승적 중생상입니다. 자연과 만물과 뭇 생명과 함께하면서 육행 실천하는 것이 동체대비를 성취한 보살(菩薩)입니다. 

 

‘수자상’은 시간의 활동상입니다. 소승적 수자상은 연륜과 경력과 출생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은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상대방의 부귀영화는 곧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자리가 높고 낮음과 오래되고 늦음을 분별하여 따지는 것이 소승적 수자상입니다. 특히 나는 ‘왕년에……’, ‘나는 젊었을 때……’, ‘내가 시집살이를 할 때……’를 말하면서 누구보다도 부지런했고, 똑똑했고, 고생했고, 힘들었다는 것을 앞세우면서 자신을 자랑하고 선전하는 사람이 소승적 수자상입니다. 또한, 시대의 변화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시대만을 생각하면서 아랫사람과 젊은 사람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이들은 ‘애 늙은이’ ‘만년 상사,’ ‘꼰대’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소승적 수자상입니다. 대승적 수자상은 무상의 이치를 깨닫고 순간에 일어나는 일에 마음 두지 않으며, 순서와 질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아침, 낮, 저녁, 밤의 순서가 있고, 1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가 있으며, 세월에는 어린시절, 학창시절, 청년, 장년, 노년의 순서가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조급하지 않으며,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말할 때 삼사일언(三思一言)하고, 행동은 코끼리처럼 움직이며, 생각은 일체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먼저 서원하는 것이 대승적 수자상입니다. 이것을 실천하신 분이 인간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게 사상을 바꾼 대영웅으로 존경받는 불세존입니다. 

 

우리는 별로 잘나지도 않았고, 아름답지도 않으며, 원만하지도 않고, 능숙하지도 못한 재주를 믿고, 하늘 높이 모양을 뽐내면서 무수한 겁을 흘러오면서 습관적으로 자기중심의 소승적 아상과 소승적 인상과 소승적 중생상과 소승적 수자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습관을 바꾸려면 다시 삼아승지겁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되게 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참회이며 진실한 참회라면 찰나에 중생 습관을 불보살의 모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무상(無相)이며 무주상(無住相)으로 참회하며, 자연과 만물과 뭇 생명을 평등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무주상 보시를 성취하면 됩니다. 산은 높을수록 수풀은 낮아지고, 수풀이 낮아질수록 나무는 외로워집니다. 

쓸 곳도 없고, 쓸 때도 없고, 쓸 수도 없는 인아상(人我相)을 끊고, 법성산(法性山) 정상에 무주상의 법계일상(法界一相)을 세우는 진실한 참회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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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 정사/기로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