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 68-부모에게서 독립하다

밀교신문   
입력 : 2021-04-09 
+ -

아빠를 부탁해


thumb-20210323095401_5dc8494a40147fea67195ad3923d2e60_g4e5_220x.jpg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서 온 세상이 꽃대궐입니다. 이맘때면 칼루다이 스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온 세상이 화려한 꽃으로 뒤덮이고 꽃향기가 진동하고 있는 이때, 세존이시여, 고향으로 가시기에 참 좋은 때입니다. 온갖 동물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초록빛 잎새들이 반짝이며, 사방에서 날아온 수많은 새들이 저마다 달콤하게 지저귀며 짝을 지어 날아오르는 이때, 세존이시여, 고향으로 가시기에 참 좋은 때입니다.”

 

칼루다이 스님은 아름다운 계절을 찬미하는 60편의 시를 읊으며 성불하신 지 2년째인 세존께 귀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간절한 요청에 부처님 마음도 움직였을까요? 승단의 스님 2천 명을 거느리고 부처님은 고향 카필라바스투로 향하기로 합니다. 부처님 세속 나이 37세 때의 일입니다. 마가다국의 죽림정사를 떠나 고향인 카필라바스투까지 대략 60요자나 거리를 걸어가야 하는데, 이 숫자는 ‘하루에 1요자나씩 걸어서 60일에 걸쳐 고향으로 향하겠다’는 부처님 말씀에 근거하고 있지요. 서두르면 60일까지 걸리지 않겠지만 부처님은 절대로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태만히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고요함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법칙입니다.

 

마음이 급해진 칼루다이가 부처님 일행에 앞서 부왕 숫도다나의 궁전으로 달려가서 그토록 그리던 아드님이 위대한 부처님이 되어 돌아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숫도다나왕은 60일 동안 자신의 궁전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귀향길에 오른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일생에서 보기 드물게 오래도록 궁중의 음식을 드신 셈인데, 보기에 따라서는 ‘왕자 출신이니 어느 사이 궁중음식이 그리워졌을 테지. 게다가 고향에서는 더할 수 없는 환대를 받게 될 테고, 60일 동안의 궁중음식은 그 예고편이라 할 수 있겠다’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천 명이나 되는 스님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데 어느 마을이 그 식사를 담당할 수 있을까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 차원에서 부처님은 부왕 숫도다나의 음식 공양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루에 1요자나씩(1요자나는 길게는 15㎞에서 짧게는 7~8㎞에 해당하는 거리) 걸어서 카필라바스투에 도착했습니다. 석가족은 환호성을 질러댔고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서 부처님과 그 일행을 맞았습니다. 카필라바스투의 분위기를 상상해보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자신의 종족에서 붓다가 출현하였다는 사실에 그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을 테지요. 그러잖아도 혈통에 대해서는 인도 전역에서 가장 자부심이 넘치는 곳이 석가족인데 말입니다. 붓다는 세속의 그 어떤 존재도 허리를 숙여 귀의하는 존재요, 천상의 신들까지도 스승으로 섬기는 분이신데, 바로 그 붓다가 석가족 출신이라는 사실에 저들은 환호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자랑스런 아들이 이토록 고귀한 존재가 되어 출신계급이 더 높은 이들이나 나이가 더 많은 이들을 제자로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 키우며 노심초사하였던 그 긴 세월이 바로 이 순간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보람을 느끼는 것이 자식 키우는 맛 아닐까요?

 

그런데 이런 아버지의 자부심은 부처님이 카필라성에 도착한 바로 그 다음날에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보란 듯이 성에서 화려한 음식과 환대를 즐기며 세상에 석가족 왕자의 위용을 드러내리란 기대와는 달리 부처님은 이른 아침 성안을 차분히 돌며 탁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이 좋아 탁발이지 사실 탁발은 밥을 얻어먹는 일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거칠고 조촐한 음식을 부처님과 스님들 발우에 담아드리면서도 예전에는 감히 범접하지 못했던 왕자였지만 이제는 진리의 스승이신 부처님이 된 그 분을 친견하고 귀의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마음은 달랐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맨발로 동네를 다니며 밥을 얻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한달음에 달려 나갔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설마 이 아비가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아침공양도 올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다는 겁니까? 사람들에게 부끄럽습니다. 우리 혈통에 남들에게서 음식을 얻어먹은 자는 없습니다. 어서 궁으로 가서 궁중의 음식으로 아침공양을 하십시오.”

 

민망하기 짝이 없고 황망하기까지 하여 숫도다나왕은 안절부절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아들이신 부처님은 말했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다 이렇게 공양을 하셨습니다. 차례로 집집마다 다니며 걸식하는 것이 부처님들의 방식이고, 나는 그 방식을 따를 뿐입니다.”

 

부처님의 이 말은 참으로 엄청난 선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속가(俗家)인 석가(釋迦) 가문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속 사람들은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에서 ‘석가모니’라고 부르지만 정작 부처님은 붓다 가문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다른 방식으로 지내야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부처가 되었음에도, 인간과 신들의 스승이 되었음에도 부왕은 여전히 ‘내 아들’이란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내 아들은 왕자니까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야 한다고, 아비가 왕인데 내 아들은 그런 삶을 누려 마땅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자식을 향한 연민의 정에 흠뻑 빠져 있는 아버지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부모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희생으로 자식을 기른 부모 입장에서는 섭섭하기 짝이 없겠지만, 자식은 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평생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로만 자신을 규정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품에서 걸어 나와서 자기 몫의 희노애락을 견디며 자기 인생을 걸어가야 합니다. 어려서는 절대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며 지내는 것이 자식입니다. 하지만 부모에게 의존하려는 자식을 품에서 떼어놓아야 합니다. 자식은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세상과 협력하고 연대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부처님의 저 선언은 이제 자신을 석가족의 왕자로 여기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궁안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제공한다 해도 붓다로서 맞아들여야 하지, ‘우리 아들’이라는 생각은 내려놓으시라는 강력한 권고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아들이 이제 부처가 됐다. 나는 부처의 아버지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인생의 목적을 다 이뤘다고 만족해도 안 됩니다. 붓다가 된 이는 싯다르타이지 숫도다나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에게 나아가 진리를 청해 듣고 사색하고 지혜를 키워 스스로의 삶을 의미 있게 가꿔야 합니다. 아버지 숫도다나왕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성자의 첫 번째 단계에 들었습니다. 숫도다나왕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지난 3월 초, 동대구역에서 KTX에 탄 어떤 승객이 객실 안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다른 승객과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기차 안에서는 자유롭게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요즘은 그 어떤 음식물도 먹을 수 없게 됐습니다. 나와 이웃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조치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탑승객 대부분은 이 약속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승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국 근처의 다른 승객이 지적하게 됐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내가 먹고 싶어서 먹겠다는데 왜 참견하는가!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아는가?”라고 하더니 아버지인 듯한 인물과 통화를 하면서 자신의 현재 상황을 하소연했고, 음식섭취를 제지하던 승객은 모욕적인 말을 듣고 이 일을 공론화했습니다. 문제의 승객은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비난여론이 일자 자기 행동을 사과했고, 이 일은 해프닝으로 끝난 듯 합니다. 그런데 그 승객이 한 말-‘우리 아빠가 누군지 아는가’라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다툴 때 으름장을 놓으며 하는 말이 바로 ‘우리 아빠, 우리 형아 불러올 거야’이지요. 어리디 어린 아이라면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을 데라곤 그뿐이니까요.

 

하지만 문제의 그 승객은 이미 성인인데 성인이 되어서도 제 몫의 삶을 살지 못하고 그 나이에 유치원 아이들이나 할 만한 으름장을 놓나 싶어서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진정 아빠의 귀한 딸이라면 세상과 공감하고 연대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혹여 ‘아빠’ 덕분에 코로나 19 상황 아래에서 기차에서 햄버거를 먹는 특혜를 누릴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철없는 행동에 따른 모든 괴로운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선악업에 따른 과보 앞에서는 ‘우리 아빠’가 통하지 않으니까요.

20210405 아빠를 부탁해 삽화.jpg
삽화=마옥경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