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41-황해남도 패엽사지

밀교신문   
입력 : 202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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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산, 31본산 절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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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패엽사지


황해도의 구월산은 1914년 김윤식의 <운양집> ‘한산사중수기’에서 “세상에서 일컫기를 우리나라에 4대 명산이 있다고 하는데, 구월산이 그중 하나이다.” 

 

1976년 10월 백두산·묘향산·금강산·오가산·칠보산과 함께 6개소의 자연보호구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때부터 북한 5대 명산의 한 곳으로 불리고 있다. 

 

구월산은 서산대사의 전설이 깃든 ‘아달메’라는 이름이 전한다. 1994년에 출판된 <구월산 전설>에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사명대사가 백성들이 어두운 밤까지 구월산성 복구에 힘을 쏟는 것을 보고, 도술을 부려 그의 육환장을 땅에 박아 아홉 개의 밝은 달을 솟아나게 하여 그날 밤에 성을 다 축조할 수 있었는데, 그로부터 ‘아홉 개의 달이 떤 산’이라 하여 아달메라 이름이 붙었다.” 1287년 고려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의 다른 이름인 아달메이다. 아사달이 ‘앗달’, ‘압달(아읍달)’로도 불리어 아홉 달의 뜻인 구월이 되므로 같은 이름인 셈이다.

 

이보다 앞서 고려 때 나옹선사는 1363년 구월산 금강암에 들어갔다. 이때 공민왕은 궁중에서 쓰는 귀한 향을 특별히 하사했고, 해서도(황해도 일원)의 안렴사 등을 보내 나옹 왕사가 그곳에 머물러 줄 것을 당부했다. 나옹선사가 1365년 내금강산 정양암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구월산의 불교는 부흥기를 맞았다. 

 

오늘날 구월산에는 6.25 전쟁 때 모든 사찰이 파괴, 소실되고 월정사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때에 31본산의 한 곳으로 7개 군에 34개의 말사를 두었던 패엽사를 비롯하여 정곡사, 낙산암 등 고려와 조선을 이은 문화유산으로 자리했다. 


31본산 황해도의 총본산, 패엽사 

구월산 패엽사는 오늘날 현존하지 않고, 폐사지로 남아 있다. 보물유적 제27호 패엽사지는 황남 안악군 용진면 패엽리에 있으며, 구월산 오봉(五峰) 남동쪽의 절골에 위치한다. 구월산의 정상부 사황봉을 중심으로 남쪽에 정곡사 터, 동쪽의 오봉산에는 패엽사 터가 남아 있다. 서북쪽에 원정사가 자리하였는데, 1991년 출판된 지도첩에는 구정사로 표기되었다. 

 

절의 이름 그 자체가 패엽경을 상징하는 패엽사는 일제강점기 때까지 구월산 최대의 가람이었다. 392년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하기 이전, 60~75년 중국 한나라 때의 승려 “구업조사가 고구려에 들어와 구업사(具業寺)를 짓고 머물렀다.”라는 사찰의 연기설화는 <한산사중수기>에 전한다. 또 366년경, 중국 동진의 승려 법심(法深)이 고구려에 들어와 구월산 단군 천왕당 아래에 한산사(寒山寺)를 창건했다. 이 사실은 6세기 초의 <양고승전>과 13세기 각훈대사의 <해동고승전>에서 “동진의 고승 도림이 고구려 승려에게 ‘청담격의(淸淡格義)’ 불교의 대표자인 법심을 소개하는 서신을 보냈다.”라고 했다. 이를 통해 372년 이전에 민간경로를 통해 고구려에 이미 불교가 전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최치원이 885년에 지은 <지증화상비명병서>에서 “심공(深公)은 동진 승려 축잠(竺潛)의 자이다.”라고 했고, <삼국유사> ‘순도조려’조에는 순도화상 다음에 법심·의연·담엄이 고구려에 들어와 불교를 전해주었다고 하여 4세기 중엽, 법심선사가 구월산에 들어와 절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803년에 당나라 승려인 패엽조사 또는 문수대사가 고구려에 들어와 “구월산 오봉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 후대에 이르러 “이 산이 문수보살의 도량이었다고, <사지>에 보이니 한산사라고 고치시오.”라고, 1875년 김윤식과 이호선이 쓴 <한산사중수기>에 전한다. 또 “옛날 단군이 독박(禿朴)에 처음 터를 잡았을 적에 문수보살이 오봉에 현신했다. 나라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겨 이곳을 신명의 구역으로 여겼다.”라고 기록했다.

 

특히, 1875년에 쓰인 <한산사중수기>에는 846년에 “신라의 고승 월정ㆍ흥률ㆍ각령 세 명의 대사가 서역(티벳)을 가서 패엽경을 가지고 와서 이 절에 봉안하면서, 이때부터 이름을 고쳐 패엽(貝葉)이라 하였다. 고려 때는 항상 왕의 원찰이었다.” 고려 말의 이색은 <목은시고> 시에서 한산사라 적었다. 1721년에 세워진 <패엽사사적비명>에는 “고려 때 목은이 이 절의 옛 뜻을 받들어 태조의 원당으로 삼고, 사신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고, 불구(佛具)를 공양하여 모든 절의 으뜸이 되었다.”라고 했다. 

 

조선 초기에 패엽사는 1407년 12월 자복사찰로 지정되면서 ‘구업사(區業寺)’란 이름으로 천태종 계열에 공식 등재됐다. 1403년과 1420년, 1424년에 걸쳐 큰불이 나서 황폐해진 것을 송월당 신균화상이 중건하고, 그의 제자 천오대사는 1600년대에 화재를 입은 사찰을 중수했다. 1471년 11월 황해도 관찰사 이예의 상소문에는 “단군의 천왕당(天王堂) 아래에 패엽사가 있다.”라고 했으며, 1472년 2월 관찰사 이예가 삼성당의 사적에서 “패엽사의 서쪽 대증산(大甑山)에 있다.”라고 했는데, 조선 성종 3년부터 패엽사는 삼성사의 조포사 내지 봉릉사찰로 자리했다. 1503년 1월 28일에는 “(전라도) 쌍봉사ㆍ경상도 견암사·황해도 패엽사 등 절에서 수륙재를 거행하는데, 향축(春祝) 사신을 보냈다.” 이처럼 구월산 단군 사당과 위치 논쟁이 있던 패엽사는 국가의 수륙재를 열었던 사찰로 당시 재를 지낼 무렵, 하단에 왕후 초상을 봉안하였다. 이때 의례를 예법에 맞게 하도록 조선의 조정에서 사신을 보낸 바 있다. 

 

그 후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구월산 패엽사로 기록하고, 1721년에 패엽사 사적비가 건립됐다. 그 후 몇 차례에 걸친 화재로 폐허가 된 패엽사는 “1875년 2월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하은 장로가 손수 전각을 지어 단청하는 등 낙성하여 옛 모습을 거의 회복하였다.”라고 <한산사중수기>에 전한다. 그 당시 패엽사의 발음이 무너진다는 뜻의 ‘패(敗)’와 같아서 절이 자주 큰불이 나고 퇴락하기 때문에, 이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한(寒)’자를 써 한산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산사를 중창한 하은화상은 그때부터 강원에서 학승들을 가르쳐 홍보살(弘菩薩)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또 만년에는 안거에 들어가면 해제와 결제 없이 수행하여 안처사(安處士)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6월 정방산 성불사와 함께 황해도를 총괄하는 대본산이 되어 34개의 말사를 관장했다. 조선총독부의 <사찰고>에는 한산보전 본존으로 문수, 보현보살을 모셨고, 주지는 혜명이며 승려는 11명이 거주한다고 했다. 1981년 출판된 <황해도지>에 말사는 월정사·자혜사·신광사·원정사·묘음사·현암·연등사·고정사·청련사 등 19개 사암이 있었다. 1937년 춘파명교가 패엽사에 용화전을 짓고 낡은 전각을 중수했다. 근대에 조계종 수계율사였던 석암선사는 1930년 구월산 월정사에서 완허(玩虛)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1940년에 패엽사 불교전문강원을 졸업했다. 석암선사는 1975년 서울 강남 봉은사에 삼층석탑을 건립할 때,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한 그분이다.

 

구월산의 다섯 번째 봉우리인 오봉산 패엽사는 1952년 7~8월 UN군의 평양 대공습을 전후한 시기에 모든 전각이 파괴되고 말았다. 지금 폐사지에는 고려 말기쯤 조성된 7층 석탑이 4층탑으로 남아 덩그러니 서 있다. 그런데도 현존하는 사찰로 알려진 것은 1911년 30본산제가 처음 시행되면서 많은 출가자와 왕래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생겨난 오류일 뿐이다.


구월산의 문수보살 도량, 패엽사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1911년 6월 3일 공포하고, 그해 9월 1일부터 본격 시행된 <조선사찰령>에 따라 사찰을 통치, 감독할 목적으로 30개 구역으로 나누었다가 1924년 11월 구례 화엄사를 본산에 추가하면서 31본산제로 1945년 8월 15일까지 지속하였다. 

 

9세기에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이 나타나는 등 문수도량으로 알려진 구월산 오봉의 남쪽 산록에 자리한 패엽사는 중국 한나라에서 당나라, 고구려, 신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의 승려가 창건과 중창을 거듭하면서 구업사, 한산사 등으로 불리다가 1911년에 패엽사란 이름이 확정되었다. 

 

패엽사의 본전인 한산보전을 중심으로 그 앞에 대방(大房) 구조의 기장전을 두고, 좌우측에 용화전ㆍ응진전ㆍ칠성각, 동쪽에 별도의 청풍루와 붙은 전각 등 9개 건물은 1939년에 촬영된 사진에도 등장하지만, 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특히 한산전은 정면과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조건물로써 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전각으로부터 한산사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현재, 4층 석탑만이 남아 있는 패엽사의 산내 암자로는 지장암, 달마암이 가까이 자리했었다.

 

전쟁 시기 이전까지 패엽사에 전하던 유물은 단연코 패엽경(pattra)이다. 846년에 신라 고승들이 티베트에서 가져온 패엽경 또는 패다라엽(貝多羅葉)은 그 분량이 기록되지 않았다. 1326년 3월 인도 승려인 지공대사가 가지고 온 개성 화장사의 패엽경과 함께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패엽경들은 14세기 말 황해도 장연의 금사사로 이운, 집결되었다가 조선 초기에 이르러 묘향산 보현사를 비롯한 대구 동화사와 비슬산 유가사, 영월 법흥사, 파주 보광사 등으로 분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에 패엽사와 화장사, 신광사의 패엽경은 모두 묘향산 보현사 팔만대장경보존고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1564년, 조선 중기의 패엽사에서는 <묘법연화경판> 목경판을 판각하고 사명까지 새겼으며, <기신론>과 <염송>, <전등록> 등 8종의 경장(經藏)을 소장했던 패엽사에는 구업대사의 무탈(巫-) 즉, 대가면이 1929년에 촬영된 사진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했다. 대사의 무탈은 일반인들이 구업대사를 흠모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여 대사가 일부러 탈을 만들어 평상시에도 쓰고 다녔다는 전설이 전해졌던 유물이다. 또 803년 당나라에서 온 패엽 조사상과 서역에서 온 사신자상(西使子像) 그림 2점이 1924년 패엽사 재산대장 목록에 기록되었으나, 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또 패엽사 앞의 시루봉에는 서 있는 큰 바위에 보존유적 제1656호 ‘단군대’라는 큰 글씨를 새긴 바위가 있으며, 넓은 평탄바위 왼쪽에는 단군의 발자국이라고 전해지는 두 개의 커다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구월산에 금광 채굴로 산길을 내어 그 유적들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전쟁 시기에 사라진 구월산의 대가람 패엽사는 비록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북녘과 남쪽 사찰에 전하는 패엽경을 통해 패엽사의 창건 비밀을 상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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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남도 안악군 패엽사지 전경 <사진출처:북한 조선화보사(1998년)>

 

이지범 소장/고려대장경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