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40-황해남도 월정사

밀교신문   
입력 :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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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구월산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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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봉 월정사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와 황해도 월정사는 남북을 대표하는 같은 이름의 전통사찰이다. 구월산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천년 가람인데, 아미타 도량으로 알려진 곳이다. 

 

구한말 최남선은 1947년 발행한《조선의 산수》에서 “신천, 안악을 거쳐 구월산에 다가가 보라. 멀리서는 정다워 보이고 가까이 가면 은근하고 전체로 보면 듬직하고 부분으로 보면 상큼하니, 빼어나지 못하다고 했지만, 옥으로 깎은 연꽃 봉오리 같은 아사봉이 있고 웅장하지 못하다고 했지만, 일출봉ㆍ광봉ㆍ주토봉 등이 여기저기 주먹들을 부르쥐고, 천만인이라도 덤벼라 하는 기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산이 구월산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내용은 북한의 문학예술종합출판사가 1994년 발행한《구월산 전설》에 다시 인용하면서 알려졌다. 이 책에는 “구월산은 원래 아사달이라 일컬어졌다고 <고기(古記)>는 밝히고 있다. 아사는 아침이란 이두 말이고, 달은 산이란 뜻이니 아사달이 바로 구월산이라는 것이다. 단군이 하늘에서 맨 처음 내려온 곳은 묘향산이다. 조선을 세우면서 도읍을 평양에 두었다가 나중에 도읍을 다시 구월산 아래 당장평(唐藏坪)으로 옮겨 모두 1,500년 동안 인간을 다스리신 후, 마지막으로 구월산에 들어가 신령이 되셨다는 데서, 단군을 모시는 산도 묘향산에서 점차 산신이 된 구월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육당 최남선은 전한다.”라고 기록했다. 

 

황해도의 구월산은 조선 후기의 성대중이《청성잡기》<성언>에서 “구월산은 가지런하고 우뚝 솟은 것이 이천 정이와 같다.” 중국 북송의 성리학자로 정주학의 창시자인 이천 정이(伊川程頤)에다 비유했다. 

 

1948년 발행된 최남선의《조선상식》에 수록된〈조선십경가〉에도 ‘제9경 재령 관가’를 꼽았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당나라 때 백거이의 시,《관가(觀稼)》에 나오는 것처럼 황해도 구월산 동선령에서 재령평야의 다 익은 논의 벼를 바라보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에 월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구월산의 명승고적 월정사의 이름에는 “달의 정수를 모아 구월산의 세찬 기력을 누른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민중 저항의 본산, 구월산

전설과 유적, 꽃이 많아서 삼다의 산으로 불리는 구월산은 황해남도 북서부 지역의 은률군, 안악군, 삼천군, 은천군의 경계에 솟아있는 산이다. 주봉인 사황봉과 오봉ㆍ주거봉ㆍ삼봉ㆍ아사봉(687m) 등 크지도 높지도 않은 99개의 봉우리를 품고 있다고 하여 구구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산성골ㆍ운계골ㆍ오봉골ㆍ원명골 등 깊은 골짜기를 비롯하여 용연폭포와 단풍골의 삼형제폭포가 있으며, 한일천ㆍ남대천ㆍ구월천ㆍ산촌천 등은 구월저수지로 흘러든다. 서쪽 경사면에는 마당소ㆍ가마소 같은 늪이 있다. 북쪽 한이천 상류의 삼수골에는 ‘삼수(三水)의 절경’이라 불린 연못이 있는데 가마니와 같이 둥글하고 우묵한 부연, 말이 달리듯 물살이 빠른 마연, 산허리에 있는 요연이란 담소이다. 북쪽 산허리에는 7년 왕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에도 한결같다는 석담이 있는데, 그 모양이 네모지고 넓이가 6척이며 물 깊이를 알 수 없으며, 신룡이 돌을 파서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쪽 비탈에는 용이 산다고 하고, 가뭄 때에 기우제를 지낸 고요연(高腰淵)이 있고, 금란굴과 같은 큰 동굴이 있는 산이라 하여 굴산(窟山)이라 불렀다. 

 

안악, 신천, 은률평야와 평안남도 남포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사황봉(思皇峰)은 봉우리 모습이 단군을 사모하여 절을 하는 형상이라고, 또 환인ㆍ환웅ㆍ단군ㆍ구월산 대왕 등 네 임금을 사모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해서정맥 끝자락에 위치하는 구월산은 단군신화와 조선시대 의적 임꺽정과 장길산의 전설이 깃든 저항의 산이다. 조선 영조 때의 이익은《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ㆍ임꺽정ㆍ장길산을 꼽았는데, 임꺽정과 장길산의 활동무대가 구월산이었다. 벽초 홍명희의 장편소설《임꺽정》은 16세기 구월산을 은거지로 활동한 인물이고, 17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장길산은 1696년 구월산에서 봉기해 끝내 잡히지 않았다. 황석영의 대하소설《장길산》에서 알려진 인물이다. 15세기의 홍길동과 1600년대 개성에서 활동한 전우치는 조선 4대 의적으로 꼽힌 실존 인물들이다. 영국의 의적으로 알려진 로빈후드는 14세기 잉글랜드의 장편 시,《농부 피어스의 환상》에 처음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일 뿐이다.

 

일제강점기 때, 구월산은 저항의 본산이었다. 1909년에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은 1916년 8월 구월산 삼성사에서 목숨을 끊었다. 최남선은 나철의 순교를 육신제로까지 표현했을 정도다. 독립운동단체인 ‘구월산대’가 1920년에 창설돼 일제의 앞잡이인 은율군수 최병혁을 처단하는 등 무장 투쟁을 펼쳤다. 1950년 12월에 연풍유격대로 창설한 구월산유격대는 이듬해인 1.4후퇴 때에도 남하하지 않고, 구월산 일대에 잔류하면서 유격전을 펼치기도 했다. 


구월산의 아미타 도량, 월정사 

1530년《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월산에는 패엽사와 월정사를 비롯하여 정곡사ㆍ흥률사ㆍ낙산사ㆍ신원사 등 15개소와 달마암ㆍ오진암 등 8개소 암자가 있었다.” 요즘 안내를 담당하는 북측 여강사는 4대 사찰로 패엽사ㆍ월정사ㆍ정곡사ㆍ삼성사라고 설명한다. 산의 동쪽 패엽사(일명 한산사)와 서쪽에 있던 정곡사는 전쟁 때 폐사되고, 월정사가 유일하게 남은 사찰이며, 삼성사는 단군을 모신 사당이다.

 

국보유적 제75호 월정사는 황해남도 안악군 용진면 월정리에 있는데, 구월산 아사봉(阿斯峰) 동쪽의 절골에 위치한다. 1843년 편찬된《제령군지》와 <월정사 현판>에서는 846년 신라 문성왕 8년에 월정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초입에 세워진 <월정사사적비>에는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 보수 개건하였으며, 1650년부터 1871년까지 5차례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월정사는 조선시대 중기에 다시 세운 것이다. 60여 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고, 전쟁 때 빨치산의 본부로 사용하여 원형이 보존되었다가 1989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외국 관광객에게 개방하는 월정사는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앞쪽에 만세루로 통하는 남북 중심축을 두고, 동쪽에 명부전, 서쪽에 수월당과 그 뒤쪽에 요사채인 승당, 그리고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만세루 앞에는 만세루, 뒤에는 월정사라는 편액이 각기 다르게 걸려 있다. 대웅전 뒤 오른쪽으로 150m쯤 떨어진 곳에는 지붕 등에 사용하는 전통 기와를 굽는 양옥 건물이 자리하고, 경내에는 사대부의 제사를 모신 사당이 별도의 재실로 현존한다. 아미타 도량으로 알려진 월정사는 입구에 돌장승(석인상) 2기와 조금 안으로 들어선 부근에 세존 사리탑비와 부도, 석교비, 월정사영비가 있으며, 종형 모양의 부도가 4기가 자리하고 있다. 

 

1983년 간행한《우리나라 역사유적》에 보면, 극락보전은 <월정사극락보전중수기문>에 보면 1662년 중건하고, 1736년에 다시 중건하였고, 이후 1875년에 보수했다. 높이 1m의 정교한 밑기단 위에 세운 앞면 3칸(10.65m), 옆면 2칸(6.4m)의 겹처마 합각집으로 여말선초의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특히, 극락보전에는 목조 금불 2상이 모셔졌는데, 조선시대에 조성한 1분의 불상만이 남아 있다. 나무로 된 아미타 금불상은 16세기에 조성되어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단 뒤쪽에는 조선 중기에 제작된 큰 징이 두 개가 남아 있으며, 법당에서 방석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단청은 금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는데,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보인다. 동서 좌우 벽에는 16나한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명부전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금동지장십대왕’이 봉안되어 예로부터 영험하기로 소문난 지장기도 도량이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아담하고 아름다운 배집이다. 조선시대의 흔한 기법으로 앞면은 겹처마로, 뒷면은 홑처마로 하였다. 단순한 2익공 바깥도리식 두공과 함께 붙어 있는 제공 위에 살짝 내민 연꽃봉우리 조각과 제공 밑을 가볍게 올려 받친 석류꽃 목조각은 방금 피어나듯 탐스럽게 보일 정도다. 

 

“수미산 밝은 달이 못에 잠겼다.”라는 뜻의 수월당(水月堂)은 앞면 4칸, 옆면 3칸에 정면은 겹처마, 뒷면은 홑처마도 된 배집으로, 앞면의 두공은 2익공 바깥도리식이며 뒷면의 두공은 단익공 주도리식이다. 수월당 앞면 가운데 두 기둥 위의 두공에는 나무로 만든 봉황새 조각을, 두 모서리 두공 위에는 나무로 만든 황룡과 청룡을 얹었다. 봉황새와 구슬을 가지고 노는 황룡과 청룡은 살아 움직이듯 세련된 목조각술을 잘 보여준다. 

 

16세기에 중건한 만세루는 산지형에 따른 2층 누각 건물이다. 앞면 5칸(11.72m), 옆면 2칸(6.02m) 2익공 주도리식 두공을 얹은 배집이다. 1.2m 높이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마루를 깐 다음 다시 나무기둥을 이어 세운 높은 다락집이다. 앞면과 좌우 양 옆면에는 풍판을 달아 벽을 만들었고, 뒷면은 개방하였다. 그리고 넓은 널마루 주위에는 회랑을 돌렸다. 다락마루에 오르면 가마귀골과 마당개울에서 흐르는 구슬 같은 맑은 물소리와 뭇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 주민들의 휴식처로 유명하다. 

 

1999년에 월정사를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사찰 보존과 관리에 대해 현지지도를 하고, 월정사 관리인(주지) 등에 대해 시계 선물까지 주었다고 한다. 2002년 2월에 월정사를 방문한 미국 LA 관음사 김도안 주지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여사와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임원들과 동행하여 불단에 공양물을 올리고 향로와 촛대, 목탁과 요령도 없는 법당에서 월정사 주지인 광덕 김병호와 함께 육성으로 불공과 합동 기원법회를 가졌다. 그 당시 40대 초반의 주지 광덕대사는 1968년 부임하여 29년을 봉직하다가 1997년 가을에 입적한 주지 김원철의 아들이었다고 전한다. 2001년 미주 한인들의 방문에서는 월정사 주지 광덕대사와 부전을 맡은 형제가 머물렀는데, 그 당시 부전은 2001년도에 출가하였다고 한다. 2015년 9월 미주 한인 방북순례단에 의하면 월정사 주지는 범성(梵性)인데, 은사가 광덕이라고 했다. 강원도 함흥화학공대를 졸업한 주지 범성대사는 평양 광법사의 불학원에서 수행을 하고, 1990년부터 월정사에서 활동하다가 1995년에 주지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남포시를 경유하여 찾아가는 구월산 월정사는 단군성전을 친견하고, 임꺽정과 장길산의 흔적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아미타 도량이자, 지장보살 본원의 귀의처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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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산 월정사 극락보전과 전각(사진:미주현대불교 방문단, 2015년도)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