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기고문

정토(淨土)로 가는 길

밀교신문   
입력 : 2021-03-23 
+ -


20210125091827_957286a264d3b57a26303da9800f331f_d1n9.jpg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歲寒圖)’는 겨울 들녘 풍경입니다. 그림에는 황량한 들판에 노송 한 그루와 잣나무로 보이는 두 나무, 그리고 노송 밑에는 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상물은 딱 넷, 주위에 갈잎을 단 참나무도 있을 법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배경도 없어 황량하기 그지없습니다. 추사는 왜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요? 일단, 그림의 주제는 추운 겨울을 지난 후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푸름을 안다(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입니다.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학자들은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배경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되어 온통 마른 갈 빛 세상(자신의 유배생활)이 되니, 비로소 참사람이 보이더라고.

 

추사(秋史)’하면, 전통필법을 벗어난 자신만의 고유하고 특유한 풍의 필법인 추사체(秋史體)를 떠오르게 합니다. 서화에도 많은 글을 남겼지만, ‘다산초당에서 등 수많은 현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그의 제자 남병길에게 남긴 유재(留齋)’라는 현판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합니다. ‘유재에서 스스로 학문을 닦거나 남을 교육하는 건물이라는 뜻의 ()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뜻은 남길 유()에 있습니다. 추사는 현판 글자 옆에 이런 글을 함께 적어두었습니다. 모두 유()로 시작됩니다.

 

유불진지록이환조정(留不盡之祿以還朝廷)

유불진지재이환백성(留不盡之財以還百姓)

유불진지복이환자손(留不盡之福以還子孫)

 

풀이하면, 녹봉을 다 쓰지 않고 남겨서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 쓰지 않고 남겨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 쓰지 않고 남겨 자손에게 돌아가게 하자는 뜻입니다.

 

오로지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고 다 쓰지 않은 자세, 그렇게 하여 남긴 것은 다른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미덕. 어쩌면 추사의 마음이야말로 진정 보살의 마음이요, 정토에서의 삶입니다. <유마경> ‘보살품에서도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쌓은 선행을 남에게 돌려보내는 마음이 곧 보살의 정토니라.’라고.

 

사바세계에서는 흔치 않는 미덕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에서는 날이 갈수록 그 마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다 쓰고도 모자라 아우성을 치고, 흘러넘쳐나도 멈출 줄 모르고 부어댑니다. 조화도, 아량도, 도리도 없습니다. 혼자만 챙기려는 탐심,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으려는 치심, 더 가지기 위해서 악다구니를 쓰는 진심. 그래서 세상이 이리도 어지럽습니다.

 

겨우내 마른 갈색과 푸름뿐이던 산과 들이 다채로워지기 시작합니다. 늘 푸른 나무들의 녹음은 더욱 투명하게 짙어가고, 갈 빛 마른 잎들은 진분홍색 진달래, 연분홍의 산 벚꽃, 노란 개나리와 생강나무, 그리고 연둣빛 새싹들에게 서서히 자리를 내주고 있습니다. 이어 찔레꽃과 아까시가 흰 꽃들을 피워내면 더 조화로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꽃들이 벌 나비에게 꿀을 돌려보낸다면, 그야말로 세상은 정토(淨土)가 됩니다.

 

조화로운 세상이 곧 정토입니다. 조화(調和)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들이 서로 어긋나거나 부딪침이 없이 서로 고르게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서로 나누고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 부처님의 세상, 정토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렇게 남김으로서 두루 돌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법신세계의 흐름이며, 참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다 챙기고 탕진하려는 마음, 넘치는데도 모자란다고 아우성치는 세상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늘 자기 것이 넘치지나 않는지 경계하고, 주위를 돌아보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정토로 가는 바른 길입니다. 정토는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리가 곧 정토입니다. 곁에 늘 부처님과 함께 있습니다. 탐진치에 눈이 멀어 바라보지 못할 뿐입니다.  

 

덕일 정사/무애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