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39 -황해남도 현암

밀교신문   
입력 : 20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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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황금빛 절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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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산 현암
 
황해도의 명산 장수산은 최고봉인 보적봉과 보장봉ㆍ관봉ㆍ하니봉 등 500∼700m 안팎의 봉우리들이 재령평야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매우 웅장해 보인다. 서쪽 방면에 열두 굽이의 기묘한 계곡이 절경을 만들어 내는 석동 12곡과 맑고 맑은 벽계수로 이름난 벽바위골ㆍ가파른 벼랑으로 된 보적봉 중턱의 천길 바위ㆍ큰 바위들이 가까이 마주 선 관봉석문ㆍ채진암 석문과 금은굴ㆍ관음굴과 같은 자연 굴들이 모두 명소이다. 석동 12곡의 길이는 12km, 너비는 50∼150m이며, 양쪽에는 높이 150∼200m의 높은 벼랑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대협곡이다.
 
원래 ‘산에 꿩이 많아 치악산(雉岳山)’이라 불렀다. 이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많은 피난민이 이 산에서 살아남았다고 하여 그 뒤로 장수산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세 줄기의 단층곡인데, 서쪽 계곡은 12곡(曲), 중앙 계곡은 벽암계곡과 하금강, 동쪽 계곡은 장수산성 계곡이다. 천연기념물 제152호 장수산 석동 열두굽이는 장수산 서쪽 단층곡으로 12회를 굴곡하여 10리나 들어가는 계곡이다. 십이곡의 10번째 모퉁이에는 옥거울처럼 맑은 물이란 ‘옥경정’이라는 맑은 용수 샘물이 있다.
 
장수산의 서쪽에는 “떨어지는 물을 맞으면 마음마저 깨끗해진다.”라는 세심폭포와 그 서쪽에 약수폭포가 있다. 약수 동굴 안의 샘에서 흘러내리는 약 10m의 폭포는 서울과 평양에까지 그 약효가 이름난 곳이다. 장수산에서 발원한 물은 대부분 은파호와 장수호로 유입된다. 그리고 1930년에 처음 발견된 장수만리화, 장수팽나무를 비롯하여 조선곰담초ㆍ잔물푸레나무ㆍ회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개나리와 아주 흡사한 장수만리화는 누워서 자라는 만리화와 달리 곧추서서 자라는 특산종으로, 북한에서는 천연기념물 제153호 ‘장수산 향수 꽃나무’라고 부른다.
 
1930년대 신문 기사에서는 장수산의 자연경관에 대해 “금강산이 동부 산악지대에 군림한 산악미의 왕자라면, 장수산은 서부 벌지대에 혜성같이 나타난 계곡미의 여왕”이라고 표현됐다. 1923년 5월 동아일보에는 ‘서선(西鮮)의 소금강 장수산’으로, 1925년 6월 개벽 제60호의 <황해도답사기>에는 ‘황해금강 장수산’이라 처음 기록했는데, 이후 예로부터라고 덧붙여 표현하면서 오래된 말처럼 쓰였다.
 
황해도 재령군의 장수면ㆍ화산면ㆍ용산면ㆍ하성면 등 4개 면에 걸쳐 있는 장수산에는 현존하는 현암과 7층 석탑만이 남아 있는 묘음사, 보장봉 아래의 채진암을 3대 사찰로 꼽는다. 유일하게 현존하는 현암 그리고 묘음사 터를 찾아가 본다.
 
현암, 장수산의 금빛 보석함
국보유적 제81호 현암(懸庵)은 황남 재령군 은룡면 서림리 장수산의 현존사찰이다. 황해금강으로 불리는 장수산 서쪽의 석동십이곡 입구에 높이 솟은 벼랑 7부 능선 북록에 자리한 단독 건물의 암자이다. 석양이 찾아드는 때면, 현암은 황금빛 사찰로 변신한다. 그때 장수산의 120m 절벽이 모두 황금빛으로 물들기 때문에 현암은 마치 ‘골든 마하라자’처럼 빛난다. 갈색 기와지붕을 가진 현암의 빛깔은 장수산의 다른 어떤 바위들과도 차별되는 독특한 색채를 가지고 있다. 이곳의 황금 색깔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영원히 마음속에 남는 금빛의 보석함과 같다.
 
일명 ‘다람절’ 또는 ‘달암절’이라 불린 현암은 바위 벼랑 위에 달아 매달아 놓은 듯하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보장봉의 북쪽 기슭 아래에서 보면 마치 절벽에 매달려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인데, 실제로 현암은 내금강 보덕굴보다 좀 더 큰 건물이다. 천 년 동안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현암에 대해 최남선은 1947년 <조선의 산수>에서 “12곡의 북쪽 작은 골에 높다란 바위 위에 위태로운 집 한 채를 짓고, 이름을 ‘현암(매단 집)’이라고 한 것이 있어서 금강산의 보덕굴과 함께 아슬아슬한 맛을 다투려 하는 것도 구경거리입니다.”라고 했다.
 
장수산의 얼굴 같은 존재인 현암은 정선현감 이익이 짓고, 1701년에 세운 <장수산묘음사사적비>에는 923년 태조 왕건의 왕사인 “진철 이엄대사가 노년에 현암에 와서 머물렀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 이전 또는 923년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석은 현재, 현암으로 가는 길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전기의 권근이 1398년에 지은 <양촌집> ‘추증 정지국사 비명 병서’에서 “국사는 1324년에 태어나 19세에 장수산 현암사(懸庵寺)에서 머리를 깎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 때에도 대표적인 수행처로 자리했다. 조선 중기까지 여러 차례 중창했는데, 현재의 건물은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현암은 앞면 6칸(11.2m), 옆면 3칸(6.35m)의 익공양식 팔작 지붕집이다. 앞면 4칸, 옆면 2칸은 온돌방으로 만들고, 전체 구성이 일반 사찰의 요사와 비슷하다. 높이 솟은 바위를 축대로 삼은 민흘림기둥 위에는 앞면을 2익공, 후면을 단익공으로 짰다. 천장은 통천장이며, 왼쪽 툇마루에는 우물천장을 댔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했다. 두공의 ‘ㅅ’자형의 활개 모양 그리고 중보머리의 장식수법 등을 보면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후면 문 앞에는 툇마루를 가설한 흔적이 남아 있다.
 
장수산 서쪽의 세심폭포가 현암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물줄기는 은파호수로 흘러간다. 황해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로 유명한 현암에는 그저 명성에 걸맞게 ‘녹족정(鹿足井)’이라는 이름의 맛 좋은 바위샘이 있어 모든 이로부터 방문해 보기를 소원한 곳이다. 이 샘은 실제로 현암 뒤편으로 산 등을 넘어가면 우물이 있는데, 여기저기 바위 등을 깎아 올라가는 층계를 만들어 두었다. 이 샘터는 현암을 창건한 이엄대사와의 전설이 전하는데, 대사를 사모하던 암사슴 몸에서 녹족부인이 출생한 곳이라 전한다. 아직도 우물 앞 돌바닥에는 사슴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신비스러운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현암 뒤쪽에는 수십 명이 한꺼번에 앉아 참선 등을 할 수 있는 반석도 있다.
 
조선 후기의 민간 전설은 1983년 간행한 <우리나라 역사유적>에 보면, “옛날 어떤 오누이가 장수산에 와보고 경치가 그토록 아름다운 곳에 집이 없는 것을 섭섭히 생각하다가 오누이는 집을 각각 한 채씩 지어 놓고 가기로 하였다. 그중 누이가 지은 집이 오늘 현암으로 남아 있다.”라고 한다.
 
1757년 <여지도서>에는 “묘음사와 현암ㆍ백운사가 장수산에 있고, 철현산에 신흥암이 있다.” 1894년 동학 농민전쟁 때 절의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1901년에 중수됐다. 1909년 <사찰고>에는 묘음사의 말사인 현암에는 주불로 ‘관음보살’을 모셨고, 주지 금성대사가 있다고 했다. 1913년 조선총독부 <관보>제150호에는 김영수가 현암의 주지로 취임인가를 받았고, 1920년 <관보>제2242호에는 강구봉이 주지를 맡았다. 또 1926년 동아일보에는 장수산 현암사가 사진으로 실렸다.
 
오늘날 재령군 인민위원회에서 관리하는 현암은 민족유산 보호정책에 따라 민족의 국보로 보존 관리하고 있다. 한편, 황해남도 민족유산보호관리소는 2005년 10월 당 창당 60주년을 맞아 장수산 명승지에 대한 유원지 곡선도로와 탐승로 확장공사를 비롯해 명승지의 정각과 식당, 여관을 비롯한 편의 봉사시설, 후생시설 정비사업을 했다고, 같은 해 9월 6일 평양방송에서 보도했다.
 
묘음사, 현존사찰로 기억된 절
10세기 초에 창건된 황해도 장수산 묘음사(妙音寺)는 1950년 12월에 사라진 절이다. 그런데 모든 기록에서 현존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묘음사의 산내 암자 현암이 있어서 생긴 기록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또 두 사찰을 한꺼번에 묶어 기록했다. 묘음사는 보존유적 제243호 장수산성의 가운데로 외성 한복판에 있었던 사찰인데, 산내 암자인 현암은 장수산 석동 12곡의 제1곡 7부 능선 벼랑에 있는 한 채 건물의 절이다.
 
묘음사는 고구려 때인 313년에 처음 축조되고, 둘레 10km가 넘는 장수산성의 서쪽 봉우리를 가리키는 하니봉의 북서록 아래에 자리했다. 벽바위골(벽암계), 금은탑이 있었던 금은굴과 영험한 약수가 흘러나오는 관음굴을 지나서 묘음사 터에 이른다. 조선 중종 때인 1701년에 세운 <장수산묘음사사적비>에는 “진철 이엄왕사가 노년에 현암에 와서 머물렀다.”라고 하여, 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적비에는 “장수산에 묘음ㆍ운점ㆍ쌍문ㆍ자복ㆍ불지ㆍ석천사가 있다.”
 
1901년 <선교양종묘음사중건비>와 1903년 <축성문>과 <묘음사중수기>, 구한말 권상로가 지은 <장수산묘음사중건비> 등에 의하면 1679년에 재난이 일어나 절이 모두 불타 버리고, 1701년에 벽암선사가 중건하면서 ‘묘음보살’에서 따와서 이름을 바꾸었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묘음사(妙陰寺)로, 신위의 <청수부용집>에도 <승람>과 같이 기록했으나, 조선 말기의 조두순은 <심암유고>에서 묘음사(竗音寺)로, 1876년 김윤식은 <유장수산기>에서 “치악산 가운데 절이 있으니 묘음사라 한다. 군민들이 왜병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는데 모두 살아서 만수를 누렸다. 그래서 산 이름을 장수산으로 절 이름을 묘음사(妙陰寺)로 바꾸었으니, 사람을 장수하도록 남몰래 도운 공덕이 있다고 여기고, 후대 사람이 묘음사(妙音寺)로 이름을 고쳤다. 규방의 회랑을 들어가듯 사중, 오중의 돌문을 들어가 깊숙한 길 몇 리를 굽이굽이 돌아가서야 비로소 골짜기의 하늘이 열리고 희미하게 경쇠와 탑에 걸린 방울 소리가 들리니 바로 묘음사이다.”라고 했다. 1834년 김정호의 <청구도>에도 묘음사가 등장한다. 1884년 동학 농민항쟁 때 소실된 것을 1901년 금순대사가 옛 절터에 중건했다. 1903년 영친왕이 기도소로 인정하면서 왕으로부터 향과 초를 하사받았다. 패엽사의 말사로 등록된 묘음사는 1909년 <사찰고>에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셨고, 두 명의 승려가 상주한다고 했다. 그 후 1934년 봄, 주지 박혜명이 대웅전과 비로전, 미륵전, 청풍루와 일주문, 승당을 중건했다. 이 전각들은 모두 1950년 전쟁 시기에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보존유적 제905호 묘음사 터에 남아 있는 5층 석탑은 고려 전기의 양식으로 창건 당시에 세운 것인데, 일명 금은탑(金銀塔)으로 불린다. 1926년 10월 동아일보에는 장수산의 사진을 싣고, “금은탑은 묘음사 부근에 있다.”고 했다. 오층탑은 조선총독부가 1930년 촬영한 사진에도 나온다. 이 석탑이 남아 있는 묘음사는 1937년에 조선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백백교 사건’을 소설화한 박태원의 장편소설 <금은탑>에 등장하는 그 장소이다.
 
황해도 장수산에 자리한 묘음사 터와 현암은 1970년대 폭우로 허물어진 장수산성의 성문, 사다리골로 통하는 북문과 동산골로 통하는 남문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던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이 살아 있는 금빛 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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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남도 장수산 현암 전경(사진 : 월간 금수강산 2019년 제361호)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