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 66-패를 쥐다

밀교신문   
입력 : 2021-03-08  | 수정 : 20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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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패, 지는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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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그만이야. 다음 생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누가 알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내게 묻기도 합니다.
 
“이번 생이 끝나면 정말 또 다른 삶이 펼쳐지나요? 지옥이나 천국이 있나요?”
 
불교가 종교인 까닭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음 이후의 일을 다룬다는 점도 그 까닭 중 하나입니다. 윤리나 철학은 이승에서의 삶을 다루지만 종교는 다음 생, 죽음 이후의 일까지도 언급합니다. 그런데 아직 마음공부가 무르익지 않은 저로서는 다음 생이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 속 부처님 말씀을 인용하며 에둘러 대답하곤 하는데 다음 생 또는 지옥이나 천상과 같은 세계를 궁금해 하는 분들께 언제나 나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걸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다음 세상이 있거나 말거나 지금 이 생을 열심히 노력하고 착하게 살면 되는데 말이지요. 아니나 다를까요. 제게 질문을 한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뭐, 다음 생이 있다면 착하게 살려고요. 그래야 좋은 곳에 가겠지요. 그런데 죽으면 그만이고, 다음 생이 없다면 굳이 희생하고 손해 보면서 착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그만이잖아요.”
 
석가모니 부처님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나 봅니다. 초기경전인 『맛지마 니까야』 60번째 경인 「확실한 가르침의 경」(초기불전연구원 간행)을 보면 이런 생각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이 아주 명쾌하게 등장합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코살라국 살라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지요, 사람들이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잡고 앉자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참으로 합리적으로 믿음이 가는, 마음의 스승으로 삼을 만한 분이 있습니까?”
 
대놓고 “믿습니다”라고 따라서 외치게 하는 선동꾼이 아닌, 진실한 스승으로 믿고 따를 만한 존재가 있는지를 묻는 것이지요. 그 자리에 모여 앉은 재가자들은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에게는 참으로 합리적으로 믿음이 가는, 마음의 스승으로 삼을 만한 분이 한 분도 없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이렇게 대답하니 좀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나를 그대의 스승으로 삼으라”고 하지 않고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대들에게 마음의 스승으로 삼을 만한 이가 없다면 ‘확실한 가르침’을 받아 지녀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면 오랜 세월 그대들에게 이익이 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꼭 누군가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아도 확실한 ‘가르침’ 하나를 받아서 마음에 지니고 실천한다면 마음의 스승, 정신적인 스승을 모시는 것만큼이나 이롭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변에서 누가 아주 용하더라는 소문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또는 어느 곳의 누군가가 아주 큰 도인이더라 하는 소문도 종종 듣습니다. 그런 소문을 들을 때면 마음이 확 쏠립니다. 그런 분을 스승으로 모시면 내 인생이 덜 힘들 것 같고, 복도 많이 지을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도인이라고 내로라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도달했다는 그 경지가 정말로 높고 훌륭한지, 흠 없이 올바르게 잘 도달한 수행자인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합리적으로 믿을 만한 마음의 스승을 찾지 못했다면 확고한 가르침을 마음에 지니고 실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가르침 즉 법(진리)를 실천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를 부처님은 아주 자세하게 말씀하시는데 그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경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만, 너무나 자세하여 저는 간단하고 쉽게 내용을 간추려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주 멋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선악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지으면 그에 따른 과보가 찾아온다고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저 세상이랄 것도 없다. 어머니, 아버지도 없다.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라. 올바른 길을 열심히 걸어가서 바른 도를 이루었다는 수행자 같은 이들도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꽤 멋져 보입니다. 업이니 과보니 인과응보니 스승이니 수행이니 하는 것에 움츠려 들어서 주눅이 들기 보다는 그런 것은 없다고 일갈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와 정반대로,  “선악은 존재한다. 업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있다. 올바른 길을 열심히 걸어가서 바른 도를 이룬 수행자도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진정한 도인일까요?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진정한 도인일까요? 상반된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누가 참다운 도인일지 보통 사람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 만일 선악도 없고 인과응보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면?
 
이게 사실이라면, 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안심하고 마음 놓고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인과응보도 없고 다음 세상도 없다고 믿는 사람 중에는 함부로 악업을 짓는 이들이 많습니다. 무서울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다고 외치면서 함부로 악업을 짓다가 죽고 보니 저 세상이 있고 지옥과 천상의 세계가 있고 인과응보가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 사람은 크게 낭패를 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함부로 살았기 때문에 이승에서의 삶도 엉망이고 다음 세상에서 그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니 다음 세상 역시 괴로울 것입니다.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으니, 경전에서는 이것을 가리켜서 ‘최악의 패(kali-ggha)를 쥐었다’고 표현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지게 마련인 패입니다.
 
이제 반대로 선악도 있고 인과응보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고 주장한 사람의 경우를 보기로 하지요. 선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르며, 이번 생에 지은 업의 과보를 이번 생에 받지 않으면 다음 생에라도 반드시 그 과보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조심스런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과보가 따라올지 빤히 아는데 악업을 지을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 그렇게 선업을 짓고 악업을 피하며 살다가 죽었는데 저 세상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문제없습니다. 살면서 선업을 짓고 올바르게 살았으니 그것으로 그 사람은 된 것이지요. 죽어서 저 세상이 있고 인과응보가 있고 업보가 있다면 그 또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살면서 선업을 지었으니 즐거움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요, 즐거운 과보로서 좋은 세상에 나게 될 것이니까 말이지요. 이런 경우를 가리켜서 경전에서는 “최고로 좋은 패(kaṭa-ggaha)를 지녔다”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반드시 이기는 패라는 뜻입니다.
 
서양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철학자 파스칼의 말을 빌려서 ‘파스칼의 내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이 있다고 믿는 경우와 신이 없다고 믿는 경우로 나누어서 어찌됐거나 신을 믿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말씀은 파스칼의 내기와 조금 다릅니다.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는 자신이 짊어지게 되어 있으며, 그 과정에서 신이나 부처라는 존재는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인과응보가 있느니 없느니 외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선업을 짓고 살기를 권합니다. 그러면 사는 동안 자신과 세상이 더 행복해질 것이니 좋고, 죽어서 다음 세상이 있다면 즐거운 과보를 받을 것이니 좋고! 이렇게 이중으로 행복을 거머쥐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었느니 흙수저를 물었느니 하면서 우리는 불평등을 말합니다. 하지만 최고로 좋은 패를 쥐느냐 최악의 패를 쥐느냐는 출신과 무관합니다. 인과응보의 이치를 믿고 그에 따라 선업을 짓는 일,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일러준 한 가지 확실한 가르침이자 최고로 좋은 패를 거머쥐는 것입니다. 이기는 삶이란 이런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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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마옥경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