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38-황해남도 자혜사

밀교신문   
입력 : 202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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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의 원찰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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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봉산 자혜사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해주 광조사를 원찰로 삼고, 수양이란 군호까지 수양산에서 차용하였다. 효령대군이 황해도 자혜사를 원찰로 정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불교에 심취했던 효령대군이 무슨 이유로 자혜사를 원찰로 정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관세음보살의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한 자혜보살 신앙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관음보살의 능력과 자비와 복덕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경전에서는 관음보살의 이름을 마흔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관음보살의 뿌리는 아미타불에게서 나왔기에, 자혜사 본전의 주불로 아미타여래를 봉안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황해도 자혜사에 관한 창건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그 유일한 단서는 1010년 12월 거란군이 침공했을 때, 고려의 군사를 자혜사에 주둔시켰다는‘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뿐이다. 이전의 기록은 사찰의 이름을 통해 추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혜대사가 680년경에 창건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의상대사이다. 직접 사찰 건립에 관여하였거나 그의 제자들이 절을 건립하면서 스승의 존호를 사명에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장 확실한 기록은 1610년에 한무외가 쓴 ‘해동전도록’의 부록 편이다. 조선 중기에 이식이 다시 쓴 발문 뒤에 선조 무렵 활동한 신돈복이 쓴 부록에는 “자혜(慈惠)는 의상대사이며, 최승우는 신라 말년의 명현 최문창이다.”라고까지 단정했다. 이는 이식의 문제제기에 대해 답변을 한 것으로 신돈복보다 한 세대쯤 뒤에, 홍만종의 ‘해동이적’에도 자혜는 의상대사의 호로 나와 있다. 이에 관련한 책은 북송 때 장군방이 당나라 때, 선사들의 자료를 모아 편찬한 ‘운급칠첨’ <속선전>에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7세기 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황해도 신천의 자혜사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홍련암과 의상대의 관음송 등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남아 있는 관음보살의 이적이 펼쳐진 북녘의 현존사찰이다.

 

자혜사, 신라에서 조선까지
신라 원성왕 때 당나라에 유학 갔던 김가기의 기록이 확실한 상황이고 보면, 신라 말엽 당나라에 유학을 갔던 최승우ㆍ김가기ㆍ자혜는 당나라 때 신선에 올랐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 종리권으로부터 도교를 전수하여 해동의 도교를 열었다. 19세기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 <원효와 의상에 대한 변증설>에서 “신라의 의상대사 자혜존자(慈惠尊者)가 ‘청구비결’을 지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자혜대사가 창건한 절은 곧 의상대사가 그 중심이다.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10년만인 670년에 귀국한 의상대사는 그 후 부석사·해인사·옥천사·범어사·화엄사와 원주의 비마라사 등 전국에 화엄전교 십찰을 건립하는 등 통일신라의 영토 관리정책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다. 그 일환으로 670~690년대에 대동강 남쪽인 황해도의 거점사찰로 자혜사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5층 석탑과 석등도 고려 초기에 다시 중창하면서 세운 것이다.

 

1932년 6월 ‘동아일보’에 보면, “신천군 자혜사는 금불상을 도난당했는데, 천오백여 년 전 신라 때 것으로 가격은 만원(萬圓)에 달한다.”라고 기사화됐다. 여기서 도난 분실된 금불상의 제작연도를 가리키지만, 자혜사가 천년의 사찰임을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고려 전기에도 자혜사는 황해도 북부지역의 대찰이었다.

 

‘고려사절요’, ‘고려사’ <열전>에는 “1010년 12월에 지채문이 서경에서 거란 침략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이원과 함께 자혜사로 나가 주둔하였다. 탁사정 및 승려 법언이 함께 군사 9,000명과 임원역 남쪽에서 적을 맞아 싸워서 3,000여 수급을 베었지만, 법언은 전사하였다.”

 

이처럼 자혜사와 승장이 등장하는 등 전란 시기의 군사적 요충지로 기록했으나, 그 후 몽고와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전국의 사찰들은 거의 다 소실되거나 피해를 보았다.

 

조선 전기에 이르러 자혜사는 조선 왕실의 사찰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원당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더 유명해진 것을 보면 현존하던 사찰이다. 1411년 의성군이 효령대군과 예성부인 해주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날 무렵, 양녕대군과 같이 전국 산천을 행차 때의 일로 짐작된다.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천군>에는 “고을 남쪽 15리에 있는 천봉산 위에 용정이 있어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며, 낙달사·자혜사·광복사·반야암·망일사가 있다고 기록했다. 1572년 신천군 현감 이의봉이 대웅전과 승방 등을 중수했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협시보살을 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익공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이 정방형이지만 정면보다 측면의 칸수가 많은 것이 특이하다. 이후 임진년 전쟁 때 피해를 보았지만, 다시 복구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 후기의 자혜사는 1716년에 찬술된 ‘자혜사중수기’에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 시기에 가람의 대규모 중수가 이루어진 것이다. 18세기 중엽, 영조 연간의 ‘여지도서’에는 “천봉산(天奉山)은 자혜사의 주산이다. 석조, 3층 석탑, 승방 앞에 우단사(右壇社)가 있다.”라고 했다. 1859년경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자혜사 석탑에는 거미줄이 처져 있다.”라고 했다. 이규경의 책은 1930년대 초, 최남선이 한양에서 길거리 군밤 장수가 포장지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몇 장이 떨어져 나갔지만, 책을 사들여 전한다. 1872년에 제작된 ‘지방지도’에는 1871년 군수 어석응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해제 편에 남아 있다. 또 1899년에 편찬된 ‘신천군읍지’에는 자혜사·망일사·정수암·광복사가 있다. 1912년 11월 조선총독부 <관보> 제0096호에는 김탄응이 주지로 취임했고, 1924년 2월 <관보> 제3439호에는 주지 이정환이 사찰 토지를 매각했다. 1927년 7월 ‘동아일보’에는 자혜사에서 한시(漢詩)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해방 이후 시기의 자혜사
황해도 자혜사는 2002년 10월 28일 “국보유적 제80호로 지정하였다.”라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앞면 툇간이 있는 현재의 대웅전은 1572년에 중건한 것으로 1950년 12월 전쟁 때 일부가 파괴된 것을 1961년에 다시 복구했다. 지금 경내에는 조선 중기에 중건한 대웅전과 승방 건물 그리고 고려 초기의 양식을 갖춘 국보유물 제169호 5층 석탑, 국보유물 제170호 석등과 석조 등이 남아 있다. 또 일종의 일주문 기능을 하는 쪽문 건물과 회랑과 같은 담장을 두르고 있다.

 

황남 신천군 용문면 서원리의 서원저수지를 지나 절골에 있는 천봉산(萬京山) 자혜사는 신천읍에서 남쪽으로 약 6km 거리에 있다. 그 좌우에 낮은 산줄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아늑한 곳이다. 주변의 낮은 산들에는 다복솔(소나무의 희귀종)을 비롯한 갖가지 나무들이 우거졌으며, 봄이면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어나고, 가을이면 단풍이 붉게 물들어 이 사찰의 경치를 한층 높여준다.

 

1983년에 간행된 ‘우리나라 역사유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남북 중심축 위에 대웅전과 5층 석탑, 석등을 놓고, 그 사이 동쪽 편에 ㄷ평면의 승방을 놓은 가람 배치형식은 북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특이한 형태이다.

 

대웅전의 기단은 화강석을 다듬어 2단으로 나지막하게 쌓았다. 기단에는 주춧자리돌을 놓고 그 위에 북처럼 둥글게 생긴 주춧돌을 올려놓았다. 이것은 주춧돌이 내려앉는 것을 미리 예방하도록 한 것이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으로 정방형 평면을 이루어 보기 드문 것이다. 가로지른 면에서 보면 마루도리가 뒤쪽으로 치우쳐 비대칭으로 조성되었고, 앞쪽이 한 간만큼 넓어졌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앞면에서 3.1m로 서로 비슷하게 하고, 옆면에서는 셋째 칸만을 3.5m로 하여 넓혔다. 여기에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하고, 두공은 2익공 바깥도리식으로 간결하고도 아담하게 한 것은 고려 건축기술의 영향이다. 두공은 현재 바깥 모습이 앞면과 뒷면에서 다르게 되어 고려 후기에 보수하면서 증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액방과 장여 사이에는 정면의 칸마다 화반을 하나씩 놓았다. 화반은 특수하게 고사리무늬를 새긴 것인데 그 기교가 섬세하다.

 

지붕은 배집지붕으로 앞면은 겹처마로, 뒷면은 홑처마로 되었다. 평면구조가 정방형인 조건에 맞게 용마루를 높이고 몸체와 지붕이 잘 어울리게 균형을 맞추었다. 용마루의 위치가 뒤쪽으로 치우쳐 있어 지붕면은 뒷면보다 앞면이 훨씬 큰 비대칭이다. 앞칸이 툇마루로 되어있는 것만 제외하고는 전남 송광사 국사전과 거의 비슷한 맞배형의 익공식으로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이다. 정방형의 대웅전은 비단 무늬의 금단청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액방, 도리, 대들보 등에는 모루초를 그린 다음 빈틈이 없이 비단무늬를 입혔으며 천정판, 순각판과 지어 천청의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화려한 무늬를 그려 눈부시게 장식하였다.

 

건물 내부의 제공과 첨차, 화반대공과 그 밖의 조각들이 모두 섬세하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지은 정방산 성불사의 극락전 내부조각과 아주 비슷하다. 건물 안 바닥에는 널마루를 깔았고, 깊숙이 들여세운 안 기둥에 잇대어 불단을 조성하였다. 천정은 통천정으로 하고 중도리, 마루도리는 아름다운 화반동자와 화반대공으로 떠받들게 하였다. 화반대공은 좌우에는 활개를 달아 뻗침대로 삼았는데, 고려 목조건축에서 전승된 것을 보여준다. 불단 위에는 균형이 잘 이루어지고 섬세하게 만든 11포로 만든 닫집이 있어 건물 안이 더욱 화려하게 보인다. 불단 위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가여래상을 비롯한 4분의 부처를 모셨다. 아미타여래 좌상은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동(銅)으로 주조되어 안치되었는데, 1930년대 사진에도 등장한다.

 

자혜사에서 가장 유명한 ㄷ자 승방과 원래 7층 석탑이던 5층탑은 살아있는 듯한 24개 연꽃잎과 인왕상을 새긴 석탑으로 높이 5.94m이다. 매 지붕돌 추녀에는 바람방울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 높이 3.88m의 석등은 정육각형의 형태로 간결하면서도 조형적으로 독특한 모양을 이룬다. 또 식수를 저장하던 석조는 이곳 터가 풍수적으로 누워 있는 소의 형국이라서 소에게 여물을 먹이는 구유를 만들어 둔 것이라고 전한다.

 

언젠가 어느 날에는 황해도 땅, 자혜사에서 의상대사를 만나고, 효령대군의 불심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를 발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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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남도 천봉산 자혜사 2002년도 전경 (사진:<조선의 절 안내>2003년판)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