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37-황해남도 금사사지

밀교신문   
입력 : 202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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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대장경의 본찰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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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가산 금사사지
 
우리 사회에서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있다. 바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 대해 평가절하는 것이 안 된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탄생한 영웅 이야기는 어느덧 사회적인 합의 수준에까지 이른 담론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편에는 그늘진 곳이 있듯이 세종대왕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에도 오늘날의 상황 인식과는 다른 대목이 있다.《세종실록》에서와 같이 세종은 왜(倭) 나라의 대장경 요청에 대해 ‘그냥 주어버리면 될 일’이라고까지 평했다. 무슨 곡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다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겠지만, 자꾸 달라고 조르던 타국에 자국의 문화재를 한꺼번에 줄뻔한 아찔한 일까지 있었다. 실제로 이행된 것은 아니지만, 유교 이념과 명나라 사대주의를 표방한 조선에서는 고려가 만든 대장경과 같은 민족 문화재를 소홀하게 여겼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신수대장경》이 세계 대장경을 평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굴곡은 반복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가장 앞선 디지털 대장경은 1996년 12월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졌지만, 진작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실정이다. 더욱이 대장경의 학술적 평가는 국내보다 일본과 한자문화권이 아닌 미국, 유럽의 평가에만 의존하고 있다. 태국과 베트남, 대만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조차 국책사업으로 대장경 전산화를 추진하고 있다.
 
천 년 전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바로《밀교대장경》이다. 고려 말의 문하시중 이제현이 지은 <금나라 서책인 밀교대장경 서문>이 실린《동문선》에는 “이른바 다라니라는 것은 중국에서도 번역할 수 없는 것이요. 오직 중국만 그럴 뿐 아니라 서역 사람들로도 역시 들어서 해득하지 못하는 것이며, 오직 부처가 부처끼리 만나야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 옛사람도 그것이 이와 같음을 알고 모아 편찬하여 90권을 이루고, ‘밀교대장(密敎大藏)’이라 이름하여 발간해서 세상에 돌아다니는데, 이 90권은 수천만 권의 근본이 된다.”라고 책의 서문을 썼다. 1251년 9월 해인사판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이후,《밀교대장경》이 완성된 곳은 황해도 장연의 금사사이다.
 
금빛 모래밭의 절, 금사사지
금사사(金沙寺)는 1894년에 제작된 조선 군현 지도첩에 표기된 낙가산 남록에 자리했던 금사(金寺)를 가리킨다. 절 앞의 해안을 특히 백사정(白沙汀)이라 부른다. 황해도 장연 고을 서쪽 50여 리에 위치한 모래밭 이름으로 모래 산을 이루었다. 충남 태안의 신두리해안사구와 비슷한 모래 산의 길이는 7~8리이고, 넓이는 3~4리에 이른다. 몽금포(夢金浦)는 우리나라 8경으로 꼽혀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온 곳으로 조선 중종 때의 남곤이 쓴《유백사정기》가 유명하다. 몽금포를 아랑포라고도 부르는데, 신라 때의 영랑ㆍ술랑ㆍ안상ㆍ남석 등 화랑이 이곳에 들러 풍류를 즐겼다는 데서 연유한다고 했다.
 
근세기의 양주동은 1941년에 몽금포를 ‘신비의 백사정’이라 부르고, “정작 금사십리는 그곳보다도 장산 저쪽 승선봉ㆍ비로봉 밑 백사정이 워낙 그 본고장으로 몽금포의 그것보다도 더한층 풍광이 다채 기절하다. … 승선봉 및 그 금사 한가운데 예전에 금사사란 큰절이 있어 '모래펄 위에 탑묘가 굉장 화려하되 끝내 매몰되지 않으니 실로 괴이하다. 어떤 사람이 이르되, 바다의 용이 이룩한 바다라 한다.'《팔역지》라 하여 오래 그 절이 신비 장려하게 모래펄 위에 진좌해왔던 모양이나, 중간에 매몰되어 내가 어렸을 적엔 거기 절이 있음을 듣지 못했더니, 몇 10년 전에 절의 상반부가 다시 드러나 한때 굉장한 이문과 기관을 전하였다.”라고 했다.
1570년 이율곡은 금사사에 와서〈금사사에서 신기루를 보다〉라는 시를 썼다. “송림 사이 거닐자니 낮 바람이 시원하여라, 금모래 주무르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네. 천년 지나 아랑의 발길 어디서 찾을 건가, 신기루 다 걷히니 수평선은 더욱 멀어라.” 그리고 양사언, 허균, 유몽인 등 당대 문인들이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사슴의 시인 노천명은 학림사 바로 옆의 비석포가 고향이다. 8살 때까지 고향에 살았던 노천명은 해방 전, 함경도 영흥의 송도원을 다녀와서 쓴 수필《송전초》에서 “바다 빛이 곱기는 동해바다, 모래가 곱기는 서해다. 구미포나 몽금포의 모래란 문자 그대로 명주 모래다.” 해풍에 의해 형성된 사구의 황금빛 모래사장과 모래 언덕에서 어릴 적에 놀고 보았기 때문이다. 원산의 명사십리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서해 몽금포는 황금빛을 띠어 금사십리(金沙十里)라고 달리 부른다.
 
우리나라 8대 비경으로 꼽힌 몽금포는 이인행의《장연팔경》시에 ”금빛 모래톱에 비낀 저녘노을, 말등바위에서 손님 배웅하기, 무산의 비 갠 달맞이, 두견산의 봄맞이, 화굴 속의 돌고드름, 죽강의 기이한 경치, 불타산에 비낀 구름, 아랑포에 돌아오는 돛배”라고 했다. 장연의 장산곶을 배경으로 한 서도민요 <몽금포타령>은 ‘장산곶 타령’이라고 불린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로 산봉에 님 만나 보겠네. 풍세가 좋아서 순풍에 돛달면, 몽구미 관암포 들였다 댄다네.”라는 노랫말의 몽구미는 몽금포의 원래 지명이다. 장산곶의 옛 이름은 ‘장잠(長岑)’으로 황해의 절경을 지배하는 최고의 전망대이다. 그 밑은《심청전》의 전설지 ‘인당소’로 알려진 인당수(印塘水)이다. 그 옆에는 물을 찾아 물가로 나가는 듯한 몽금포 코끼리 바위가 천연기념물 제143호로 지정됐다.
 
금사사, 밀교장경을 품은 절
황남 용연군 해안면 몽금포리의 금사사는 6.25 전쟁 때 사라지고, 폐사지가 아니라 ‘몽금포 제염소(염전)’가 자리하고 있다. 금사사는 용연의 몽금포 백사장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승선봉 서북쪽에 자리한 연지봉 또는 사봉(沙峯)인데, 낙가산이라 부르는 남록에 자리했다. 이곳은 ‘하얀 모래가 있는 물가’란 뜻의 백사정이라 달리 부른다. 바닷가의 모래가 바람에 의하여 육지로 날아가 쌓인 낮은 언덕의 해안사구가 이십 리에 걸쳐져 있다. 1530년의《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사사의 바닷가는 모두 금빛 모래밭인데, 바람이 불 때마다 혹은 동쪽에 언덕이 생기고, 혹은 서쪽에 언덕이 생겨 좌우로 갑자기 이동함이 일정하지 않다.”라고 했다.
 
바다 용이 비상하는 곳, 신기루가 나타나는 곳으로 알려진 백사정에 자리했던 금사사는 6세기 중엽, 신라 진지왕 때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553년 가을 신라 진흥왕이 한강 하류 지역까지 점령하면서 황해도의 거점으로 금사사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기록은 고려 이규보의《동국이상국전집》시에서 “늦게야 흰 모래 물가에 배 대어, 푸른 나무에 붉은 닻줄을 매었네. 지는 해 반쯤 숨었는데, 산에 이르러 저녁 범패소리 들었네.”라며, 그때 배를 대고 한 절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색은《목은시고》시에서 해주 목사가 소라 젓갈을 보내 준 것에 감사를 전하며, 금사사 앞의 백사정을 노래했다. 이를 통해서 보면, 염불 소리가 들리고 들어갔던 절과 해산물이 생산되고 유통하던 곳이다.
 
조선 초기까지 금사사는《진언대장경(眞言大藏經)》의 경판을 직접 보관했던 곳이다.《세종실록》22권, 1423년 10월에는 “유후사에 전지하기를, ‘금사사의《진언대장경》과 영통사의《화엄경》등에 있는 판자와 운암사의 금자삼본《화엄경》1부와 금자단본《화엄경》1부 등을 수참의 배로 운송하도록 하라.’고 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금사사에 밀교대장경판이 소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록 기록에서와같이 판자(板子)와 배로 운송토록 하라는 교지에는 무거운 것과 다량의 물품을 이동하려는 방법을 제시했다. 또 태종 때까지 경판이라 하던 것을, 판판하고 넓게 켠 나뭇조각인 나무판자로 표기한 것은 숭유억불 정책에 따른 유학자들의 의도적인 표기법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황해도 금사사에서 밀교대장경판을 직접 새겨 조성했거나 개경의 총지사 등 밀교사찰에 있었던 진언 경판을 모두 모아 절에 보관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같이 조선 개국의 국가 기념행사로 1251년 9월 25일에 완성된《팔만대장경》을 1398년 5월 10일 강화도 장경판당에서 한양의 용산과 지천사를 경유하여 합천 해인사로 옮기는 대장경 이운 퍼레이드를 대규모로 개최하는 등 최종 이운된 다음, 24년이 흐른 세종 때의 일이다. 세종의 교지를 보면, 금사사의《진언대장경》판자를 지명한 것과 육로보다 해상로를 통해 배로 운반하는 방법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대목이 나온다.
 
또 1449년 장연의 금사사에서 육경합부(六經合部)라 일컬어지는《금강반야바라밀경》,《관세음보살예문》등 조선 초기에 널리 독송하던 여섯 가지 경전의 판본을 한 권으로 묶어서 간행됐다. 1387년에 인쇄된《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말미에는 ‘판유경도금사사(板留京都金沙寺)’란 묵서를 통해 경판이 황해도 금사사에 보관했던 사실로 확인된다. 또 금사사에는 지성ㆍ각호대사가 참여하고, 이색이 발문을 짓고, 각지가 필사한 기록이 남아 있는《금강경천로해》의 경판이 금사사에 보관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잘 알려진 금사사의 유물은 1595년에 제작되어 지금,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금사사 동종’이다. 종의 명문으로 확인되는 높이 118cm의 범종이다. 실학자 이덕무가 1768년에 쓴《서해여언》에는 “당시 절에는 4채의 불전과 8채 승방이 있었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이 협시하고, 주위에는 18 아라한이 있었다. 사천왕문에는 사천왕을 모두 갖추었다. 당시 나이 여든이 넘은 승려 혜심이 지은 상량문과 중수기가 있었다. 절의 승장이 승병 200명을 거느리고 번갈아 해안을 방비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숙종과 영조, 1868년에 이르기까지 서해를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 국가에서 승장(僧將)과 승병을 배치하여 서해 방비를 한 곳이었으나, 1950년 12월 전쟁 때 모두 소실됐다.
 
읍저반도의 마지막 절, 청련사
 
황해도 옹진군 서면 연봉리에 남아 있는 고찰이다. 연봉산(泰行山)의 남서록에 자리한 청련사(靑蓮寺)는 고려 중엽에 창건되었는데, 절이 서해를 마주 바라다보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처음에는 망해사(望海寺)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구월산 패엽사의 말사로 등록된 청련사의 본전에는 아미타불을 모셨고, 이외에는 요사채 1동만 있다. 강화도의 청련사ㆍ황련사ㆍ흑련사와 같이 옹진에도 3개 사찰을 세웠다고 전해졌지만, 모두 폐사되고 청련사만이 남아 있다.
 
고산자 김정호의《대동여지도》에 표기된 금사사는 1984년 완간된 역사소설《장길산》에 등장하는 등 분단 이후에도 황해도 몽금포의 절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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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장연 몽금포 패총 1916년촬영 _국박 유리원판목록집1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