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36-황해남도 송월암

밀교신문   
입력 :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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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땅끝마을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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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암과 학림사지
 
‘삼국유사’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의 서쪽 바다’라고 하여 서해로 불렀지만, 1961년 4월 22일 국립지리원 지명위원회가 의결, 고시한 명칭은 황해(黃海)로서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지칭한 것이 참으로 의아스럽다. 중국 황하로부터 다량의 토사가 실려 내려와 바닷물을 누렇게 물들인다는 뜻으로 쓰인 황해는 중국에서 붙인 이름이고, 서해는 우리식의 이름이다. 18세기 이전 동양의 문헌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황해라는 이름의 바다는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말이다. 황해란 이름은 역사의 주도권을 움켜쥐었던 서양세력에 의해 붙인 이름이다.
 
중국 청나라 강희제의 지시로 오라총관 목극등과 프랑스 선교사인 조아생 부베와 레지스 등이 1717년 공동 제작한 ‘황여전람도’에 황해가 등장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지리학자 당빌이 1734년에 제작한 ‘신중국지도첩’에 ‘HOANG-HAI OU MER JAUNE’이라고 처음 표기했는데, 조선 팔도의 하나인 황해도를 차용하여 바다 명칭으로 사용한 것일 뿐. 그는 한반도 동쪽바다의 명칭을 당시에 파악하지 못하고 지도에 기록조차 하지 못했다. 13세기 서긍의‘고려도경’에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라며, 황톳빛 바다를 가리키는 ‘황수양(黃水洋)’을 기록했지만, 그 표현으로 보아 넓은 바다를 가리키는 용어로 하기에는 부족하다. 9세기 장보고가 썼던 청해(靑海)는 전남 완도 일대의 바다 지명으로 서해를 뜻하는 용어와 다르다.
 
우리나라 지도에서 서해를 향해 소뿔 모양으로 반도를 이룬 황해도 장연군 장산곶은 서쪽 땅의 끝머리다. 민요 <남한산성>에 나오는 ‘해동청 보라매’를 가리키는 ‘장산곶 매’의 고장 장산곶은 백령도와 물길로 30리 북쪽에 자리한다. 서해의 몽금포와 한 동네인데, “산을 이룬 모래가 무엇이 부족하여 해변까지 죽 내리깔린 곳”이라고, 근세 소설가 강경애의 ‘어촌점묘’에도 등장하는 동네가 몽금포다.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했던 김형진이 1895년 기록한‘노정약기’에는 “서쪽으로 장연에 갔더니 장산(長山)의 정상이 끝난 곳에, 전후좌우로 석벽이 이어져서 비록 나는 새라도 출입하기가 어려웠다. … 동구에 돌문이 있었고, 석문 밖에는 큰 바닷물이 드나들어 마음대로 출입할 수가 없었다. 동구 안에는 식량을 마련할 땅과 염정이 있어 난리를 피할 만한 곳이었다”라고 했다. 이처럼 피난처로 여겨진 곳의 사찰까지도 조선 후기에는 빈대 절터로 바뀌었다. “유독 절에 빈대가 들끓어서 승려가 절을 불태우고 떠났다”라는 빈대사찰의 구전설화는 유자로 지칭되는 빈대들의 산천 유람길 시중과 엄청난 조세 부역에 견디다 못해 생긴 폐사지가 전국적으로 다반사였다.
 
마지막 남은 절, 송월암
보존유적 제908호 송월암(松月菴)은 황해도 땅끝마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황해남도 장연군에 현존하는 사찰로서 창건시기는 학림사와 비슷한 삼국시대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송월암에 관한 기록은 1893년 9월 하순에 김종원이 쓴 ‘송월암 중수기’에 나타나 있다. 암자의 일주문이자 누각인 백운당 가운데에 걸려있는 중수기 현판에는 삼한시대에 창건한 쌍계암(雙溪庵)이라 기록하고, 김연원이 중수하면서 송월암으로 개칭했다.
 
송월암은 황해남도 장연군 순택면 학림리 동네에서 북쪽 약 8km 거리에 있는 옛 괴림산 지금의 송월산 남동쪽의 절골부락 맨 위쪽에 자리한다. 그 아래쪽 500m 지점에는 학림사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황해도 순택면 괴림산 태자봉 남록에 폐사된 학림사의 산내 암자인 송월암은 1894년에 제작된 조선 말기의 회화식 군현지도첩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지도첩에는 태자봉 동남록의 학서사(鶴栖寺, 옛 학림사),소전산 남록의 중암사, 불타산 서록의 천불사, 불타산 남록의 임해사, 미나산 북서록의 금사사 등의 사찰들이 기록됐다.
 
특히 임진난 때에 황해도 학서사를 비롯한 이곳에서 사명당이 활약했다고 하여 <송월암 중수기>에는 ‘사명당의 자취가 깃든 곳’이라고 했다. 그 이전에는 1456년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된 된 무장김씨의 시조 김자무가 황해도 장연으로 도피하여 신분을 감추고, 관향도 무장(茂長)으로 바꾸고 은거했을 때의 기록인 ‘김씨분관록’에 장연의 쌍지암이 있어서 혹시 연관된 지명이나 사명으로도 볼 수 있다. 무장김씨는 4세 김유광의 후대에서 크게 번성하여 장연군 11개면 일대에 집중 분포되었다고 한다.
 
장연의 송월암은 1892년에 보수하면서 사명을 고쳤으나, 일제강점기에는 패엽사의 말사인 쌍계암으로 등록됐다. 조선총독부가 1909년에 만든 ‘사찰고’에는 쌍계암이란 사명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 신북면 4리가 주소지로 기록됐다. 종파는 청허(淸虛), 본전 건물의 유물은 아미타불·관음보살·석가여래·정광여래·지장보살상을 모셨다. 관리자는 금순대사, 두 명의 수행자가 머물렀으며, 전답이 40두를 경작하고 쌀 3석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에 다시 중수한 송월암에는 편액이 붙인 본전 건물과 서쪽에 자리한 관음전은 동향의 전각으로 앞면 4칸(9.30m), 옆면 3칸(5.50m)의 2익공 합각집이다. 그 내부에는 일반적인 단위에 청동 아미타여래좌상 1기만이 남아 있다. 남쪽에 일주문과 같이 가운뎃길을 낸 백운방 또는 백운대의 3칸 건물에는 널마루를 깔았다. 백운방과 같이 붙은 건물인 요사채는 3칸으로 방 3개를 두었다. 동쪽은 건물이 없고 계곡으로 트여있는데, 산길과 통하는 길을 냈다. 그 후 송월암은 1954년에 전체적으로 보수했으며, 1978년에 황해남도 민족유산보호관리소와 장연군 인민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중수하고, 사찰관리인을 별도로 두어 관리하고 있다.
 
폐사지로 남은 대가람, 학림사
빈대 절터라고도 불리는 폐사지의 흔적은 폐사지 탑의 부처와 보살도 석양을 안고 좌선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새들도 곁에 앉아 명상하기 일쑤다. 폐사지의 맛과 멋은 바로 텅 빈 충만이다. 아무것도 없지만 무언가 가득 차 있는 무한함과 탑 한 개만으로도 다 채울 수 있는 유한함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영고성쇠의 흔적들, 깨침과의 사투를 벌이던 고승들의 파토스(pathos)가 가득한 곳이 폐사지다. 지금, 황해도 장연의 학림사와 천불사 등 절터에서도 그렇다. 이 절들에 대해 아는 이들도, 또 찾는 이도 이젠 거의 없다. 땅 위에서 사라진 지 1,500년이 지났다.
 
‘백학이 둥지를 튼 숲’이라는 데서 붙여진 보존유적 제907호 학림사지(鶴林寺址)는 1710년 5월 최도가 글을 짓고, 김진서가 해서로 비문을 써 새겨서 세운 ‘괴림산 학서사사적비’에는 5세기 말, 아도화상과 묵호자가 창건한 절터다. 서림산으로도 불린 괴림산은 물이 길게 모이는 곳인 황남 장연군에 있었던 학림사의 진산으로 산에 태(胎)를 묻었다 하여 부르는 태자봉이 있고, 근처에는 9개의 못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상좌저수지를 비롯한 15개의 저수지가 있다.
 
황남 장연군 순택면의 비석포(碑石浦)·갈사(葛寺)·눌산·두현·박산·상좌·승탑리 등은 모두 학림사가 있어서 생겨난 지명들이다. 삼장봉 또는 태자봉 남록에 자리한 학림사 터는 장연군 순택면 학현리에 있던 절로 장연읍에서 서쪽으로 약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영조 때의 신경준이 편찬한 ‘가람고’와 ‘정조실록’에서도 장연의 학서사(鶴棲寺)로 기록했으나, 1911년의 ‘조선사찰사료’에는 송월산 학림사로 기록됐다.
 
고려 후기에 학림사는 9칸의 장엄한 보광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보응당, 남쪽에 무집당, 서쪽에 청심당, 북쪽에 심검당이 있다. 보광전 뒤쪽에 있는 청풍루와 향적전은 화려하기로 널리 알려졌고, 명부전과 용화전은 장중한 건물이었다. 천왕문 및 좌우의 낭무(廊廡)는 42칸인데, 성행당ㆍ탁룡구 등이 여기에 속했으며, 해탈문·영송문·금강문·조계문·불이문·단속문 등이 차례로 건립되었다. 조선시대 학림사는 ‘숙종실록’의 기록과 같이 1714년 7월 24일 황해도 장연의 유생 김경유 등이 소를 올려 기자 화상을 본부에 묘향할 것을 청하였다. 그 내용은 원나라 순제가 가져온 ‘기자상(箕子像)’이 행방불명되었다가 학림사에 발견되었다고 한 당시의 상소문이다.
 
조선 후기의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에도 비슷하게 기록하고 곡서사(鵠棲寺)로 적고, 절 뒤에는 사명의 영당이 있었다고 했다. 정조 연간에 편찬된 ‘심리록’에서도 1800년 학림사의 승려 취은이 찾아서 학림사에 보관하고 있다가 훗날 평양의 인현서원에 보관하였다고 전한다.
 
또 학림사에는 흰 닭과 지네에 관한 전설과 100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괴림산의 전설’이 전한다.
 
근대 시기에 학서사의 4백 근짜리 범종과 칠성목탱, 삼존불상은 1854년에 왕명으로 경기도 고양 흥국사로 옮겨와 봉안했다. 현재, 학림사의 개문(開門)은 첫 입구에 있는 문이라 하여 개선문으로 부르던 것을 줄여서 ‘개문’이라 하는데, 일종의 석장승과 같은 모습으로 두 개의 석불이 자리하고 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보광전·용화전·청심당·심검당·채풍루·해탈문 등 많은 전각이 있었는데, 전쟁 때 모두 소실되고 5층 석탑과 사적비, 부도만 남아 있다. 학림사 5층 석탑은 6.62m 높이로 5층 탑신에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무늬를 새겼다. 고려 초기의 형식인 오층탑은 전체적으로 구도와 기법, 조각 등이 정교하며, 은율군 홍문리 5층 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국보유적 제83호 석탑은 그 모양은 나무를 깎아 만든 듯이 돌을 잘 다듬어 쌓았다.
 
‘사슴의 노래’ 시로 유명한 시인 노천명은 1945년 ‘망향’ 시에서 “아이들이 하눌타리 따는 길, 머리론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라며 학림사 등 고향의 추억을 노래했다. 장연읍 서북부에 두견산이 있고, 그 남쪽 끝에 종유동굴인 ‘꽃재굴[花窟]’이 있어 사계절 소풍ㆍ행락지로 유명하다. 굴의 길이가 260m인 화굴에는 많은 종유석과 맑은 샘물이 시내를 이루어 흐르고, 단오절에는 굴 앞에서 씨름판이 벌어지며, 굴 안에는 등불을 켜 놓아 굴의 신비를 만끽할 수 있다. 또 곡암리에 천불사의 사적비가 남아 있어, 이곳 불적들의 이름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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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남도 송월암 2010년도 전경 (사진:북한의 전통사찰, 양사재)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