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35-황해남도 신광사지

밀교신문   
입력 : 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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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의 북숭산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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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숭산 신광사지
 
황해도 해주의 명산, 북숭산(北崇山)은 남숭산(경북 구미의 금오산)과 2대 명산의 짝을 이뤘다. 조선 숙종 때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에도 등장하는 중국의 5대 명산인 태산, 화산, 형산, 항산을 비롯한 가운데 산, 숭산에 비겨 손색이 없다고 하여 고려 후기 때부터 유명해진 산이다.
 
해주 서북쪽의 북숭산에는 이름난 잠양폭포가 있다. 이 폭포와 신광사를 배경으로 조선 정조 때 김홍도가 그린 '산사귀승도'가 전한다. 2018년 9월 20일 단원의 사후 200년 만에 다시 빛을 본 그림이다. 이 그림의 오른쪽 밖에는 ‘김단원홍도’란 제명이 쓰여있고, 왼쪽 밖에는 새로 글자로 “애석하도다. 단원의 낙관이 이미 뭉개졌고, 쓴 시 또한 반은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림을 그린 솜씨가 매우 좋은데, 찍어둔 낙관이 완전하고 볼 만하여 보배로 갈무리할 매우 좋은 작품이다. 위창노인이 쓰다”라고 20세기 초, 오세창의 글과 낙관이 남아 있다. 또 그림 상단의 중간에는 단원의 필체로 보이는 ‘秋…葉…水…落月…’등 5글자와 좌우에 ‘김홍도인’이 찍힌 백문방인이 남아 있다. 가운데 빈 곳에 쓰인 글은 권필의 <해주 신광사에서 소공 극선이 부쳐준 시에 차운하다>의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신광사임을 알 수 있다.
 
산길을 걷는 노승, 계곡과 바위 수풀, 그 사이에 누다리와 정자각 건물을 그린 단원의 그림을 통해서도 이미 명산으로 알려진 북숭산과 신광사의 유명세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의 그림만으로 단원과 신광사와의 인연을 알 수 없지만, 14세기 중엽 중국 원나라 세자가 이곳에 와서 불공을 드린 다음 황제로 등극했다는 실화와 같이 정조대왕 사후에 기울어진 가세로 처자식을 걱정하던 단원에게 북숭산과 신광사는 신앙의 발원처로 기대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 같은 사실이 비록 전설과 같더라도 우리 민족에게 해주 북숭산은 통일의 희망봉처럼 남아 있다.
 
‘동국의 천축’의 북숭산
황해남도 해주 북숭산은 ‘동국의 천축(東國天竺)’이라 불릴 만큼, 14세기에 불교 르네상스를 이룬 곳이다. 북숭산을 이렇게 부른 것은 먼저, 지리적 개념과 함께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가 불교에 귀의한 성지로 불렀을 가능성이다. 1342년 원나라의 순황제가 그의 원찰로 신광사를 대규모로 중건했다. 다음으로는 공민왕의 왕사 나옹선사와 연관된 이야기로부터다. 인도승 지공대사의 제자로 다시 조선의 개국공신 무학대사와의 읽힌 숱한 전설과 신화가 이곳 신광사에서 탄생한 연유이다. '직지심경'을 저술한 백운경한 등을 비롯한 고려 고승들이 활약한 곳이 바로 해주 신광사이다.
 
북숭산이 유명하게 된 또 다른 사연은 조선 후기의 홍경모가 1834년경에 처음 쓴 ‘해서팔경’에 담겼다. 그 시에는 “수양산의 고사리 캐기, 광석천의 비단 빨래터, 부용당의 밤비, 영해루의 가을 달, 눈 내린 신광사 풍경, 지성(수양)폭포 구경, 남포의 밀물썰물 구경, 동정각 손님 배웅”을 꼽았다. 1899년 편찬된 '해주지'에서 원나라 황제의 원찰로 건립된 연혁과 현황이 상세하게 기록된 신광사의 설경은 ‘해주의 팔경’으로 꼽힐 만큼 유명했다. 비록 단원의 그림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에 나오는 오층석탑과 ‘부처님의 뜻을 고루 비춘다’라는 뜻으로 아미타 삼존불을 모셨던 보광명전은 신광사를 대표하던 건축 유산이었다.
 
신광사, 원 황제가 세운 절
1950년대까지 해주에 가면 꼭 찾아보아야 할 곳으로 신광사가 꼽혔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1948년 8월에 해주 신광사를 직접 방문했다. 그러나 1951년 5월 13일 제58 전투폭격비행단 소속 F-84기 20대에 의해 자행된 견룡저수지 폭격을 비롯한 해주 일대의 75%가 피해를 보았다.
 
지금, 사라진 신광사는 읍성 서북쪽의 12km 지점에 자리한 북숭산을 진산으로, 남산으로 불리는 마우산을, 먼 동쪽으로는 금강사, 보현사, 안양암 등 여러 사암과 자리했다. 1938년 해주읍이 해주시로 승격되고, 서변면과 석동면을 합쳐 황해남도 해주시 서석면 신광리가 그 주소지다. '세종실록지리지' <해주목>에도 등장하는 신광사는 폐사지로 오층탑과 무자비만 남아 있다. 1951년 5월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되기 전에는 보광명, 응진전, 명부전, 관음전, 약사전, 천왕문과 승방 그리고 5층 석탑과 무자비 등이 1948년 10월에 재정비됐다.
 
‘숲속에서 신비한 빛을 발하는 부처님을 모신 절’이라는 뜻을 가진 해주 신광사는 14세기 초 중국 원나라 황실의 원찰로 중창됐지만, 670년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라고 동국대 정태혁 교수가 쓴 '북한사찰순례기'에 처음 등장했다.
 
중국 “후량에 갔던 윤질이 고려 첫 외교 성과로 오백 나한상을 받아서 923년 6월 고려 태조에게 바치자, 해주 숭산사에 봉안했다”라고 '고려사'에 전하고, '삼국유사'에는 “851년 후당에 사신으로 갔던 원홍이 가져온 부처 어금니와 923년 양나라에 갔던 윤질이 가져온 오백 나한상은 지금 북숭산 신광사에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면, 나말여초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026년 9월에는 고려 현종이 큰물 피해를 본 해주 신광사에 행차했고, 1053년 9월에는 문종이 북숭산 신광사에서 나한재를 지냈고, 1102년 10월에는 숙종이 북숭산 신호사에 행차하여 오백 나한재를 지냈는데, 신호사는 후대에 잘못 기록한 사명이다.
 
해주 신광사의 가람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하여 ‘동방에서 으뜸이었다’라고 불린 것은 1333년에 원나라의 황제 순제가 자신의 원찰로 중창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어명으로 건립된 8년의 역사에는 원나라의 송골아가 이끄는 37인의 공장(工匠)이 참여했으며, 고려의 시중 김석견과 한림 이수산이 송골아와 함께 감독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보광명전을 중심으로 석탑과 나한전과 해장전향적전 등 24동의 전각이 1341년에 완공됐다고, '신광사사적비'와 '조선사찰사료'에 전한다.
 
'조선사찰사료'에는 고려 때 중창할 무렵, “보광명전은 칡나무 대들보와 싸리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고 하여 특이한 건물로 알려졌다. 또 이 책에는 윤질이 양나라에서 가져온 오백나한상은 조각상이 아니라 ‘오백나한 그림책(幀)’이라고 한다. 문종이 1053년 9월에 나한재를 열 때로부터 무려 28회의 나한재가 조선 후기까지 열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금도 전당과 불상의 금은 단청을 한 것이 완연하여 엊그제 한 것 같다. 남곤의 시에, “천 겹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빠져나와, 십홀(十笏) 선방에서 자리를 빌려 자네. 6월의 무더위가 들어오지 못하니, 절간에 별다른 천지가 있네.”라고 표했을 정도다.
 
고려에서 근세기의 유적들
고려시대에 나한상과 나한재로 유명했던 신광사는 1358년 봄, 원나라 연경에서 귀국한 나옹선사가 머물면서 전국적 명찰이 되었다. 1361년 오대산에 있을 때 공민왕이 사자를 보내 간청하기를 “대사가 나를 버린다면, 과인도 이제 불법에서 손땔 것입니다.”라는 명대사의 탄생으로부터 신광사의 주지를 맡았다가 1363년 7월 절에서 나와 9월에 구월산 금강암으로 옮길 때까지 개성 사신들이 헤아릴 수 없이 신광사를 왕래했다. 특히 1361년 10월 홍건적의 2차 침공 때 향나무에 관한 전설이 전하는 나옹암(懶翁岩)도 있으며, 신광사 터에서 북숭산 향로봉으로 올라가면 암석 사이에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홍건적(紅巾賊)에게 받은 향나무로 향기를 천 년 동안 내뿜고 있다고 한다. 또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유명한《불조직지심체요절》을 집필한 백운화상 경한선사가 1365년 주지로 부임하면서 고려의 경선학당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조선 세종 때는 교종 18사에 포함되고, 조선 후기까지 사격이 그대로 유지됐다. 국가 공인의 한곳으로 지정된 신광사에는 거주승이 120명으로 정해졌는데, 청주 흥덕사, 양주 장의사(서울의 세검정)와도 같았다.
 
'조선사찰사료'에는 한 선비가 절에 머물면서 말하기를 “처음 절을 지을 때 남산에 돌항아리를 묻어 물을 저장함으로써 화재를 막았는데, 이제 그 석옹이 기울어져 물이 새고 있으니 몇 년 지나지 않아 절에 화재가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1677년 4월 5일 일어난 화재로 전각과 요사채 등 천여 동의 건물과 불상 등이 소실되고 말았다. 1678년에 보광전과 약사전, 시왕전, 만세루 등을 중건하고, 다시 1705년에 나한전을 세우는 등 해마다 매염(埋鹽)의식을 가졌다. 그러나 그 뒤의 사찰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황해남도 민족유산보호관리소가 2014년 11월 해주시 역사유적에 대해 보수하고 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소개했다. 폐사지로 정비된 신광사 터에는 1324년에 세운 보존유물 제988호 신광사 오층탑과 보존유물 제1686호 신광사 무자비(無字碑)와 부도 4기 및 비석 1기가 신광사 터에서 약 300m 동쪽 지점, 북암으로 가는 산길에 자리한다. 무자비는 그야말로 비석의 면에 아무런 글자가 없는 비란 이름으로 일명 백비로 불린다.《신광사사적비》는 1720년에 세워졌는데, 사라지고 1919년의《조선금석총람》에 탑본으로 전한다. 원래 7층 석탑이던 5층탑은 남쪽 면에 1342년이라는 기명(記銘)을 새긴 희귀한 석탑으로 파손이 있지만, 석탑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또 보존유물 제1688호 신광사 부도는 무자비와 함께 서 있는데, 고려 말기에 조성된 것이다.
 
국보유물 제70호 해주 9층 석탑은 황남 해주시 해청동의 해주공원 안에 서 있다. 원래 오층탑이었는데, 다른 탑의 부재가 일부 섞여 구층탑으로 되었다가 현재 8층탑으로 보존되고 있다. 높이는 5.93m, 그 모양이 전체적으로 날씬하게 생겼다. 서로 다른 두 개의 탑 부재가 섞인 사실로 5층에서 9층으로 되었다. 국보유물 제82호 해주 다라니석당은 해주시의 해청공원 안에 석탑과 같이 서 있다. 높이 4.64cm인 육각형 화강암에 다라니경을 새겨 기둥처럼 세운 돌 구조물이다. 묘향산 보현사의 용천 다라니석당과 평북 용천 서문밖 석당과 함께 현존하는 3대 다라니 석당이다. 남한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유형의 석조물로 4기의 석당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개성 선죽교 다리 교각에 쓰인 대불정 다라니석당이다. 1780년 정몽주 후손들이 난간 있는 석교를 만들어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하고, 사람이 다니도록 난간 없는 다리를 그 곁에 새로 놓으면서 다라니 석당을 선죽교 상판에다 사용했다. 현재까지도 선죽교에 가면 마구 밟고 다니는 훼손된 불교 유물이다.
 
황해도 해주에는 지금, 현존하는 사찰이 없다. 전설의 고대도시 아틀란티스는 화산폭발로 사라졌으나, 해주의 불교 문화유산은 숱한 전쟁의 화염에 의해 모두 사라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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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신광사 보광전 측면 1939년촬영 목록집3 19쪽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