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33-황해남도 강서사 (하)

밀교신문   
입력 : 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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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아난존자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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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산 강서사
 
오늘날 황해남도 배천군의 강서사 화단에는 아주 유명한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161호 ‘강호 염주나무’는 1913년에 발견되었는데, 피나무류와도 비슷하고 열매는 10월 말에 여무는데, 이를 따서 염주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또 한 그루는 참중나무에 감겨 올라가는 강호 능소화 때문에 같이 유명해졌는데, 실제로는 세 그루인 셈이다. 천연기념물 제162호 ‘강호 능소화’는 1840년대에 참중나무와 함께 옮겨심은 것으로 일명 ‘능소나무’라 불린다. 강호 능소화는 높이 20m, 밑 둘레가 55㎝, 가슴높이 둘레가 48㎝가 되는 큰 덩굴나무다. 특별히 고운 꽃 색깔로 유명한 이 능소화는 7~8월경에 긴 나팔 모양의 꽃이 약 한 달 동안 피는데, 색깔은 노란색이 감도는 붉은색이다.
 
조선 후기까지 강서사에서 유명했던 물품은 돗자리 ‘용수석(龍鬚席)’이었다. 1798년 정약용은 ‘여유당전서’ <자찬묘지명>에 기록했을 정도다. 또 다산은 인장, 석장이라 부르는 돗자리 짜는 장인을 위해 특별히《다산시문집》<장천용전>을 남겼다. 1799년 1월 유행성 독감이 돌 때, “다산이 하루는 뜬금없이 관리를 불러 황해도 강서사에서만 나는 용수석을 준비하라고 한 후, 황제 죽음을 알리는 칙사가 와서 돗자리를 사용한 일화를 적었다.” 강서사에서 만들었던 용수석은 등심초ㆍ인초ㆍ조리풀이라는 용수초 즉, 골풀로 만든 돗자리로 등나무 줄기로 만든 등석과 꽃무늬를 넣은 채화석은 중국에 수출한 최고급품이었다.
 
조선 후기의 민속무용으로 연안ㆍ배천 지방의 도리깨 춤이 유명하며, 읍내에는 배천과 연안온천 2곳이 인기 있는 휴양지이다. 배천 치악산 남쪽 기슭에 선조 병오년에 중건하고, 안향을 배향하는 문혜서원 마당에 서 있는 천연기념물 제160호 배천 은행나무와 연백벌 서남쪽의 홍현리에는 매년 수 천마리가 모여드는 천연기념물 제163호 백로살이 터, 배천군 역구도리 바닷가 벌 지대에는 천연기념물 제164호 재두루미살이 터로 잘 알려진 곳이다.
 
강서사, 고려 아난존자의 절
황남 배천의 천연기념물과 민속문화재보다도 더 유명한 역사적 사실은 고려 후기에 대각국사 ‘의천의 아난존자’로 불린 혜소(惠素)대사의 일화이다. 인터넷 검색에서 맨 먼저 나오는 그분이 아니다. 기원전 543년에 80세의 나이로 입멸한 붓다는 그 당시 아난존자에게 “이제 늙어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내 나이 지금 80이 되었구나.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끈의 힘으로 가듯이 여래의 몸도 가죽끈의 힘으로 가는 것 같구나”라고 마지막 행적을 알린다.
 
쿠시나가르 사라쌍수에서 열반할 것을 예고한 내용이 ‘대반열반경’에 기록되었듯이, 1101년 음력 10월 5일 대각국사의 열반도 혜소가 견불사에서 편찬한 대각국사 ‘행록’ 10권에 섬세하게 다 적혀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진감국사 혜소의 기록이 넘쳐 나는 것과 달리, 200년 후의 고려 혜소대사에 대한 기록은 생몰연대조차 미상이다. 고려 11대 왕 문종의 아들이었으나 늘 아웃사이더의 인물이었다. 문헌에서는 혜소(慧素) 또는 혜원(惠袁·惠遠)·혜대(惠臺)으로 표기됐다. 그가 남긴 비문은 ‘대각국사탑비’ 음기와 ‘제청평산거사진락공지문’ 음기가 있다. 의천 이후, 한 시대를 풍미한 혜소대사에 관한 행장이 ‘기록의 나라’로 불릴 만큼 인쇄 매체가 발달했던 고려에서 기록되지 않은 까닭은 그 누가 보더라도 이상할 정도다.
 
11세기 고려의 대스타, 대각국사 의천을 스승으로 섬김으로써 그의 고족제자(학업이 뛰어나고, 행실이 훌륭한 제자)가 된 혜소는 부처님께 아난존자가 늘 곁에 있듯이, 대각국사의 아난존자였다. 그는 “항상 의천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문장을 토론하였다”라고, 12세기 말 이인로의《파한집》에 전한다.
 
또, <파한집>에는 “대각국사가 승선(僧選)에 나가 보라고 권하니 대답하기를, ‘제가 무슨 천구마(天廏馬)라고, 그 보취(步驟)를 시험하겠습니까’라고 했다. … 국사의《행록》열 권을 편찬하고, … 서호 견불사에 머물 때 쓸쓸한 방장에 다만 앉을 자리만 한 청석 한 개가 있어 때때로 붓을 휘두르며 잠깐의 흥을 쫓았다”라고 한다.
 
고려 왕들의 초청으로 궁궐에서《화엄경》을 강론했던 혜소대사의 세납은 1185년 8월 <문수원기> 음기의 비문을 썼다는 것을 기준으로 할 때, 의천에게 직접 사사 받은 고족자였음으로 1101년으로 하면 84세인데, 일찍이 사사 받은 때가 15세부터라 하더라도 99세로, ±100세의 고려 최고령 인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구한말 일제가 문화재 도굴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쁜 의도로 퍼뜨린 고려장(高麗葬) 풍습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실증 사례이다.
 
고려 문방사보의 광장, 강서사
12세기 때 견불사는 정·관료를 비롯한 시인ㆍ묵객의 발자취가 끊이지 않았던 절이다. 모두 견불사에 모여 강 건너 감로사에서 가져온 현판의 글들로 차운하기를 소원했다. 오늘날 국무총리격인 고려 시중을 비롯한 학자, 유생 심지어 내시청의 환관에 이르기까지 앞다투어 견불사 왕래를 즐겼다. 그 자리는 고려 문사들이 문방사보(文房四寶)의 진수를 펼쳐 보인 광장이었다.
 
그 중심에는 혜소대사가 늘 계셨다.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과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서호 견불사의 승려 혜소는 내외전에 해박하고, 시문 및 필법에도 능하다. 특히 화엄학에 조예가 깊어 ‘화엄경’을 강론했다.” 또, 이 기록에는 “혜소가 머무는 견불사에 김시중이 당나귀를 타고 자주 와서 날이 저물도록 도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신증’ <개성부>에는 “이자연이 창건한 감로사에서 시승(詩僧) 혜소가 주창하고, 시중 김부식이 이어서 듣는 것은 모두 화답하여 거의 천여 편이 되어, 마침내 한 권의 큰 시집을 이루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공민왕 때의 민사평은 ‘급암시집’에서 <이제현이 동방의 네 가지 일을 노래하다> 시에 차운했다. 이제현은 1145년 이후, <김시중이 나귀 타고서 강서의 혜소 상인을 찾아갔다>는 일을 가장 먼저 시로 지었는데, 상인(上人)은 곧 나이가 많은 이를 높이는 말로 승려에 대한 경어이다. 이제현은 동방의 가장 아름다운 풍류를 즐긴 인물로 김부식ㆍ최당ㆍ정서·곽예를 ‘동국사영(東國四詠)’으로 꼽았다. 여말 선초에까지 전승된 이 풍류는 고려 이제현으로부터 조선시대 김시습에 이르기까지 약 300년 동안 이어졌다.
 
그 첫 번째 인물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다. 1145년에 ‘사기’ 편찬을 완료하고 은퇴한 후, 견불사와 감로사를 자주 찾았다. 김부식은 당나귀를 타고 자주 왕래했는데, 노새쯤으로 여겨지는 나귀는 벽란도 마구간에 두고 나룻배로 예성강을 건너 광정도의 견불사 혜소대사와 밤을 지새웠다. 민사평은 ‘급암시집’에서 이 광경을 “혼자 푸른 나귀를 타고 푸른 산을 찾았노니, 그 산의 어느 승은 아마 풍간의 후신이었으리라. 이 늙은이가 실없이 싼 입이 아니더라면, 누가 그를 황비의 상상으로 보았으리”라고 하여,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불린 당나라 승려 풍간(豐干)에다 혜소를 비유했다. 또 혜소대사가 김시중의 신분을 말하지 않아서 다른 이가 정승인 줄 모를 만큼 야인의 행색으로 노새를 타고 절을 찾았는데, 신분과 형식에 구애되지 않은 망형지교의 만남을 가졌다고 평했다.
 
그러나 김부식은 1125년 7월 ‘영통사대각국사비’의 의천 비문을 지을 때, 혜소의 ‘행록’을 근거로 집필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오관산 영통사에 세워진 비석에는 혜소가 아니라 의천의 직계 제자로 숙종의 다섯째 왕자인 원명국사 징엄이 가져온 국사의 행적으로 지었다고 대각국사 비문에다 새겼다. 공교롭게도 김부식이 찬한 ‘영통사대각국사비’의 음기와 김부식의 막내동생 김부철이 찬한 ‘청평산문수원기’ 뒷면에 새긴 <제청평산거사진락공지문>의 음기도 모두 혜소대사가 지었다. 이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고려 후기의 최고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혜소대사가 쭉 머물던 견불사와 재상 이자현이 당대 최고로 지었다는 오봉봉 감로사는 서강을 가운데 두고 동서 뱃길 10리로, 요즘 서울의 강북과 강남으로 비교될 만큼 쌍벽을 이뤘던 절이다. 감로사는 원나라 때 윤주의 자화사를 모방하여 지은 것으로 벽란도에서 가장 이름난 절로 꼽혔지만, 지금에는 폐사되었다. 견불사는 예성강 가녘에 자라는 골풀로 용수석 돗자리를 짜서 팔거나 가뭄에 콩 나듯이 왕궁 등에 강의하며 살아갈 정도의 가난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예성강을 대표하는 절이다. 혜소대사는 ‘화엄경’ 강의로 왕실에서 준 백금을 모두 송나라 상인의 사탕(설탕)으로 바꾼 기록을 보면, 가난하고 탐관오리에게 강탈당한 사람들의 비상약으로 사용했다. 혜소대사가 김부식 등의 초대로 자주 감로사에 건너간 것도 알고 보면 권선 차원의 일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사실을 제대로 본 사람은 백운거사 이규보이다. 그는 ‘동국이상국후집’에 이인식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연기 낀 절간의 저녁 종소리>에서 수탈당하는 민중들의 아픔을 적었다. “산중의 아름다운 경치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아지랑이 맑은 놀에 비치니 비단결을 이루었네. 이것이 만약 제나라의 비단 노나라의 비단이라면, 토호(土豪)가 몇 집에서 수탈한 것인지 모르겠네.” 특히, 병자리 누었던 그는 혜소대사로부터 받은 시에 화답하면서 “말씀마다 법어라서 일천 게송이 엄숙하고, 맛은 정녕 진수라서 팔진미를 능가하네”라고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고려 최고의 감성 시인 정지상이 그의 애도문을 직접 썼다.
 
14세기 이제현은 ‘기마도강도’에서 호복 차림의 다섯 명이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렸지만, 혜소대사를 직접 만나지 못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가장 사실적인 표현으로 대사와 서호 견불사를 잘 고증해 놓았다. 그의 시, <동방의 네 가지 일을 노래하다>에서는 김부식이 나귀 타고 견불사에 갔다는 광경은 지금 상상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 이후에도 견불사는 강서사로 이름을 바꿔 조선에까지 그 유명세를 치렀다. 여말 선초의 변계량은 ‘춘정집’에서 “강서의 옛 사찰이 파도를 제압하니, 그곳에 시료(詩料)가 풍부하다 들었다네.” 성종 때 김수동의 시에는 “좌중에 있는 미인, 파란 눈에 푸른 머리”라 하여, 조선 전기에도 서양인이 벽란도에 왕래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강희맹은 ‘소상팔경’시에서 “목어 소리 홀연히 산 모양 흔드니, 서른여섯 차례 그 종소리”라며, 강서사의 새벽예불 광경을 소개했다.
 
이처럼 백마산 강서사의 풍경은 사라진 감로사와 함께 선가종파와 강서시파(詩派)의 보이지 않는 격론이 치열했다. 1939년 배천에는 강서사와 호국사 등 사찰이 50개 있었다. 지금, 벽란도와 광정도는 예성강의 옛 나루터로 자리할 뿐. 그 너머로 멀리 서해의 푸른 물결이 하늘에 잇닿은 듯 펼쳐있다. 언젠가는 가 볼 수 있기를.
12면-황해도 연백군 운산면 강서사 - 오다(小田)위원 조사_정리.jpg
혜소대사를 닮은 강서사의 금동불상 (조선총독부 사진첩, 1930년 촬영)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