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32-황해남도 강서사(중)

밀교신문   
입력 : 2020-10-12 
+ -

벽란도에서 부처를 찾다

20200922093417_3c60e841f4f6c930f79b41229285f764_oja1.png


견불산 강서사
 
고구려와 백제는 ‘반걸양 전투’를 치렀다고 1948년 신채호가 발행한 ‘조선상고사’에 전한다. 기원후 369년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기병과 보병을 합친 2만의 군사를 청·백·적·흑·황 다섯 가지 색깔의 깃발 아래에 거느리고 벽란나루 즉, 반걸양에까지 침공했으나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패하는 전쟁이 치러졌다.
 
이렇듯 양국은 삼국통일 이전까지 벽란도와 장단 등지에서 치열하게 충돌했다. 그로부터 400년 후, 예성강에는 세기적 평화가 도래하고 부의 축적이 이루어졌다. 나라 이름인 고려가 포르투갈어인 ‘꼬리아’로 파생될 만큼 국제 무역도시가 이곳에 탄생했다. 10세기 초기부터 1392년까지 이어진 국제 무역은 불야성의 벽란도를 만들었다. 한편으로 대장경을 비롯한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면서 젊은이들은 대거 개경으로, 벽란도로 갈 것을 외쳤다. 경전 연구에 나선 승려들은 신학문의 인텔리로, 통역과 번역을 통한 저술 활동 그리고 고려대장경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학술적 발전과 보존에 신기원을 이뤘다.
 
상고 때로부터 써 내려온 ‘깨끗한 아침의 나라’인 조선은 1392년 7월에 개국한 조선왕조가 미국인 로웰이 1885년에 출판한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미리 예언이라도 하듯이 코리아를 몽땅 버리고 말았다.
 
조선이 개국한 지 509년 뒤 한라산의 높이를 1,950m로 최초 측량한 독일인 지그프리트 겐테가 1905년에 ‘Korea’란 책으로 출판하고, 그 뒤에 ‘신선한 나라 조선, 1901’로 번역되어 조선의 참 이름을 다시 소환해 놓았다. 나폴레옹은 “공간은 회복할 수 있지만, 지나간 시간을 절대 회복이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지금처럼 북녘에서의 시간이 서서히 움직일 때, 우리 조상들의 성적표인 벽란도의 흔적을 그나마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벽란도의 마지막 유적, 견불사
강물은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강물에 의해 생겨간 삶의 터전은 4대 문명을 낳았고, 내륙과 다른 강안문화를 이루었다. 예성강과 그 물길 따라 찬란하게 펼쳐졌던 벽란도와 광정도를 왕복하던 뱃길은 지금 모두 사라져버렸지만, 그 흔적만은 예성강의 마지막 유산인 강서사에 남아 있다.
 
국보유적 제77호 강서사는 황해남도 배천군 강호리 견불산 혹은 백마산의 남록에 자리하고 있다. 해방 전까지는 황해도 연백군 운산면 강서리가 주소지였다. 1954년 10월 황해도가 남북도로 나뉘어서 황해남도 배천군이 되었으며, 소재지는 배천읍이고, 1981년 6월에 지정된 봉량노동자구와 28개 리가 있다.
 
연백으로 더 알려진 지명은 1914년에 연안과 배천군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이름인데, 두 군의 앞글자에서 딴 것이다. 연백평야를 아우른 연안군은 여말 선초에 권근이 쓴 ‘향교기’에 “해서지방 제일의 고을로서 나라에 복과 이익이 되는 땅이다”라고 소개된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지명은 은 생산지라서 은산이라 하고, 또 흰 연기가 나는 우물 즉, 온천에서 유래했다. 같은 연백군이라도 연안과 배천의 지역적 특성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한자 표기도 백천(白川)으로 쓰지만 읽을 때는 ‘배천’으로 읽는데, 또 재미있는 사실은 연백군은 ‘연배’로 읽지 않고, ‘연백(延白)’으로 부르고 있다.
 
강서사 앞, 한교천의 나루는 광정도이다. 벽란도보다 덜 유명하지만, 알려진 이미지는 똑같다. 광정도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가는 짧은 뱃길의 나루를 말한다. 광정도와 남쪽 벽란도와의 거리는 강 건너 10리였다. 강 건너에는 황해도 강음현의 이포와 전포 구간으로 예성강의 또 다른 이름인 서호를 말한다.
 
“예성강의 서쪽에 있다”라고 하여 불린 강서사는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1665년 왕실 친척이던 정지익이 쓴 ‘강서사사적비’ 비문에 새겨졌다. 9세기 말, 도선국사가 황해도 배주의 부자 양씨로부터 그의 집을 희사받아 견불사를 창건했다. 또 1757년의 ‘여지도서’에도 “강서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황해도 양씨 가문의 보시를 받아 창건한 견불사”라고 했다. 정지익의 <사적기>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산 아래서 위로 보면 부처가 보이는데, 산정에 올라가서 보면 없고, 다시 내려와서 보면 또 보인다고 하여 ‘부처를 볼 수 있는 산’이란 뜻으로 견불산(見佛山)이라 부르고, 견불사란 사명을 붙였다”라고 한다. 이처럼 절에서 보는 경치가 부처의 형상을 이루거나 산 그림자가 크게 부처의 얼굴로 나타나는 경관을 보고 붙인 사명이다.
 
18세기 ‘여지도서’에는 “백마산 영은사는 동방명찰(東方名刹)인데, 도선국사가 떠난 때로부터 마을 사람들이 이 산에 도선국사의 ‘신령이 깃든 곳’ 또는 ‘선령이 숨어 있는 곳’이라 하여 영운사와 영은사라 불렀다”라고 전한다.
 
그 후, 1092년 6월에 문종의 왕비 인예태후가 배주 견불사에서 천태종 예참법 의식을 1만일을 발원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됐다. 이런 사실로 볼 때, 견불사는 개경의 국청사와 함께 고려 천태종의 중심 거점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2세기 초, 대각국사 의천의 고족자인 혜소(惠素)가 견불사에 머물면서 대각국사 ‘행록(行錄)’ 10권을 찬술했는데, 이 ‘행록’은 1125년 7월 영통사에 세워진 ‘영통사대각국사비 ’의 비문을 김부식이 지을 때, 집필의 기초로 삼은 자료였다. 또 그는 감로사를 창건한 이자현의 제문 및 ‘금란총석정기’ 등을 지었다.
 
예성강 견불사는 조선 태종 7년에 나라 안녕과 고을의 복을 기원하는 절인 자복사찰 즉, 국가지정사찰이 되면서 천태종에서 중신종으로 소속이 바뀌었지만, 황해도 연백을 대표하는 으뜸 사찰로 변모했다. 15세기 ‘태종실록’과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 18세기의 ‘가람고’에는 모두 견불사로 기록됐지만, 1467년 4월에 다시 중창하면서 ‘예성강 서쪽의 절’ 또는 ‘서호에 있는 절’이란 뜻으로 이름이 강서사로 바뀌었다.
 
‘중종실록’에는 배천의 강서사로 공식 등장한다. 그런데도 1430년 이전에 변계량은 ‘춘정집 ’시에서 강서사로 적었고, 1476년 가을에 이곳을 방문한 유호인은 ‘유송도록’에서 “벽란도 서쪽으로 돌아서 별포를 따라 들어가 견불사에 올랐다”라고 한 것처럼, 이때까지 두 가지의 사명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서사, 북녘 사천왕이 계신 곳
고려의 멸망으로 벽란도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잊혔던 견불사는 조선 세조가 1467년 한양도성에 원각사를 중창하면서 이때 같이 중건하였으며, 특히 “원각사에 있던 장륙불 2상을 이 절에다 옮겨와 안치하였다”라고 한다. 새로 중창한 견불사가 견불산 강서사로 사명을 바꾼 것은 1757년의 ‘여지도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16세기 강서사는 중종 때 혜정옹주와 부원군 한명회의 원찰로 지정되고, 세조의 진영을 봉안하는 영전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강서사가 모두 소실되어 다시 복구하였으나, 1651년 봄에 화재로 다시 대웅전과 명부전, 만세루 등 동서 건물이 모두 불에 타 버렸다. ‘강서사사적비’에서는 1665년 다시 지은 대웅전과 승방 그리고 고려시대의 석탑 2기가 있다. ‘숙종실록’에는 강서사 뒤에 성(城)을 쌓았다. 19세기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에는 견불산의 강서사성이 모두 터로만 남아 있다고 했다.
 
18세기 말, 화악당 지탁이 1770년경에 “견불산 강서사로 출가하여 성붕의 제자가 되었다”라고, 그의 저서 ‘삼봉집’에 전한다. 1912년 조선총독부의 ‘관보’ 제485호에는 배천군 강서사 박교원이 주지 취임허가를 요청했으며, 1924년 ‘관보’ 제3498호에는 연백군 강서사 주지가 이보담에서 박심월로 교체한 것을, 1940년 3월 11일 ‘부산일보’에는 배천의 강서사가 개축을 착수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국보유적 제77호 강서사 대웅전은 1665년에 중창하고, 일제강점기 때 중수한 건물로 건축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때의 단청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측으로 아미타불, 관음보살을 모신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에 바깥 7포, 안 9포로 짜 올린 합각집이다. 건물 앞면의 축대가 높게 쌓여 있고, 기둥이 유달리 굵고 높으며, 부재들이 장대할 뿐 아니라 내부 구조장식이 화려하다.
 
특히, 대웅전 정면의 동서 벽면에 각기 별화로 남아 있는 2점의 사천왕 벽화는 17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북녘 사찰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1665년 불화승이 섬세하게 그린 것으로 전하는 동쪽 벽면의 동방지국천왕상, 서쪽 벽면의 서방광목천왕상 대형 벽화는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흙벽 면에다 채색한 푸르스름한 쪽색과 얇은 붉은색이 은은하게 비쳐 나오는 사천왕 벽화에는 안타깝게도 이름 모를 사람들이 낙서한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았다. 동네 주민들은 이 사천왕상에 대해, 예로부터 견불산의 신장 또는 장군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승방에는 강서사란 편액이 정면에 걸려 있다. 원래 오백나한전이던 승방은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 명부전에는 고려말 나옹화상이 조성한 것으로 얼굴이 원만하고 신령스럽다고 소문이 난 시왕상과 목조지장보살 삼존상이 봉안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1877년 익종의 왕비인 조대비 신정왕후의 요청과 왕명으로 삼각산 화계사로 봉흔ㆍ위운ㆍ봉림이 이운하였다고 ‘화계사 약지’에 전한다. 견불산 강서사의 그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은 현재, 서울시 수유동 화계사 명부전에 모셔져 있다.
 
마당에 서 있는 보존유적 제985호 강서사 7층 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연꽃 대좌형 기단의 사각 다층탑이다. 기단석의 측면에는 금강상을 새기고 기단 탑신에는 좌상의 천인상, 1층부터 7층까지의 탑신에는 단독 불좌상을 새겼다. 승방의 우측에 자리한 보존유적 제236호 강서사 다층석탑(일명 5층탑)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다른 2기의 석탑을 임의로 다시 포개 쌓아서 하나의 다층 형태를 이룬다. 또 서쪽 마당에는 혜소대사 벼룻돌이 놓여 있다. 좋은 물맛으로 소문난 우물이 승방 서쪽 편에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동쪽 100m 지점에는 사찰관리인이 거주하는 건물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승방 앞쪽에 자리한 5층 석탑과 같이 있는 <강서사사적비>는 1665년 세워진 것으로, 전답을 기증한 많은 분의 이름이 사방에 널리 알려지게 하려고 돌에 새긴 ‘사향초혼위전답기비’과 같이 자리한다. 그 옆에는
 
1665년에 세운 <나무아미타불비> 1기와 다시 복구한 부도 1기도 남아 있다.
 
예성강에 드리우는 부처님과 북녘 사찰을 수호하는 강서사의 사천왕을 꿈속에서라도 한 번쯤 친견할 수 있기를 발원해 본다.
6면-황남 강서사 _  도서출판 양사재.jpg
황남 강서사 대웅전과 승방 (사진출처:북한의 전통사찰, 도서출판 양사재)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