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31-황해남도 강서사(상)

밀교신문   
입력 : 2020-09-22  | 수정 : 202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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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예성강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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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 강서사

 

고려의 해상관문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면서 더 유명해진 예성강은 황해도의 황금 젖줄이다.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에는 황해도 수안의 언진산에서 발원하여 배천·개성을 거쳐 서해 강화만에 흘러드는 강으로 총길이 187.4km이다. 조강으로까지 불리는 한강 어귀에서 합수하는 동쪽의 임진강과 달리 서북쪽에 자리하는 강이다. 한강 입구에서 예성강을 따라 10~15리 더 내륙으로 들어간 지점에 자리한 벽란도는 고려 최대의 해문(海門)이었다.     

 

벽란도는 고려 도읍지 개경의 문호인 예성강항의 언덕에다 송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배웅하기 위해 지은 객관인 벽란정(碧瀾亭)에서 따온 이름이다. 고려와 요나라의 전쟁이 끝나갈 11세기 무렵부터 예성항구가 국제 무역항으로 발돋움하면서 붙여진 통상적인 명칭인데, 강원도 총석정을 한꺼번에 부르는 것과 같다. 그 영화롭던 모습은 한림원의 공사로 1207년에 몇 달 동안 벽란도를 오갔던 고려의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에서 “바닷물이 물결치는 대로, 오가는 배들 꼬리를 무는구나. 아침에 이 누각 밑을 떠나면, 한나절이 안되어 남만에 이르구나”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225년 제갈량의 남만 정벌로 유명한 남만은 중국 윈난성을 비롯해 베트남 북부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또 일본의 규슈 남부 및 오키나와 지역도 같이 부르고, 16세기 때의 네덜란드나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양 세력들도 남만인으로 불렀다.

 

세계 끝까지 연결되던 고려의 벽란도는 지금, 출입조차 불가능한 동항(凍港)이다. 바다를 통해 ‘KOREA’라는 이름을 연호하던 그 시대의 영화가 사라진 다음, 새로운 부활의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지난날의 명성을 기다리는 벽란도엔 푸른 물결만이 넘실대고, 예성강변에 나타나는 부처의 그림자는 강서사에 고요히 묻혀있다.
 
예성강에 담긴 노랫소리
황해도를 대표하는 예성강은 ‘고려사’에 “928년 8월, 신라승 홍경이 당나라 민부(閩府)로부터 받은 대장경 한 질을 배에 싣고, 예성강에 이르니 왕이 친히 영접하였다”라고 기록됐다. 삼국시대부터 이미 예성강으로 불려왔던 지명이다.

 

고려의 휘종은 1185년 송나라에 유학한 이령에게 고려의 <예성강도>를 그리도록 하고, 그림을 본 다음 칭찬하고 하사품을 주었다고 전한다. 그 후 예성강은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에 “고려에서 송나라에 들어갈 때, 모두 여기서 배를 띄우기 때문에 예성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됐다. 민간에서는 송도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강’이라 불렸다.

 

예성강을 노래한 ‘예성강곡’은 10세기에 만들어진 작자 미상의 가사로, ‘고려사’ <악지>에 그 유래만 전한다. 하씨 성을 가진 당나라 상인의 우두머리인 하두강이 장기내기에 이겨서 고려인의 부인을 상선에 끌고 가면서 만들어진 전후 2편의 노랫말이다.

 

고려 후기 이제현은 ‘익재난고’ <눈보라 치는 예성강> 시에서 “한 가락 예성강곡 소리높여 부르니, 하두강의 애간장이 끓는다”고 하였으며, 정포는 <서강잡흥> 시에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공의 예성강곡 노랫소리”라고, 고려 남여상열지사를 예성강 푸른 물에다 풀어 놓았다.

 

고려 멸망으로 사라졌던 예성강의 이름은 매스 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황해도 멸악산이 주목받으면서다. 그것은 1966년 KBS라디오의 반공드라마 <여기 이 사람들>의 주제곡이다. 1951년 2월 8240부대(일명 동키부대)의 유격대를 추모한 노래다.

 

“예성강 모진 바람 강물도 흐느낄 때, 말없이 사라져간 여기 이 사람들”로 시작하는 김강섭 곡, 김상국이 노래한 이 곡은 1980년대에 <예성강>이란 곡명으로 다시 불러진 민중가요다. 그러나 분단 현실과 광주민중항쟁의 현실을 적시한 1980년대의 <예성강>은 전남 화순의 예성강을 배경으로 한 개사곡이다. “예성강 푸른 물에 물새가 울면, … 말하라 금남로여 너만은 알리라. … 통일 위해 쓰러져간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로 끝맺는 노랫말이다.

 
벽란도, 항구가 아니다
고려의 국제 무역항으로 알려진 곳이 벽란도다. 그런데 큰 항구가 아니라 뱃길의 나루였다. 예성강의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짧은 뱃길, 즉 벽란정 밑에서 배로 건너서 오가는 과정을 뜻하기도 한다. 상징적 의미와 내용을 실제 지명으로까지 사용한 것이다. 벽란정이란 호사스러운 관사를 독점했던 송나라 사신 등 관료들에 의해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사용된 지명이다. 당시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부역했던 뱃사공들에게는 호구책이거나 고통스러운 뱃일을 하던 작은 나루였을 뿐이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벽란도는 개성 선의문 서쪽에 있었고, 예성항은 그 남서쪽에 있었다.”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예성항이 벽란도의 하류에 있었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예성항 상류의 나루였을 것이다. 고려 말기에 송나라와의 국교가 끊어진 다음, 예성강 언덕 위에 있던 벽란정이 없어지고, 예성항도 국제 무역항의 기능을 잃게 되면서, 옛 명성대로 벽란도라 부르는 것을 혼동해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벽란도는 예성강항과 달리 백성들이 이용하던 황해도 우도의 동방포 위쪽 벽란나루가 원래 장소이다. 1914년 이전까지 벽란도리였으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개성군 서면 연산리에 편입됐다. 사신이 올 때마다 국가에서 한시적으로 운영하며 관리한 벽란나루가 벽란도였다. 종9품의 나루터 관리직인 도승이 한 명 배치되어 담당하였으며, 수송선과 나룻배를 관리하는 최고위직 우도수참전운판관이 겸직했다.
 
1085년경 중국 송나라의 사신을 위해 건립한 관사인 벽란정의 이름에서 유래한 벽란도는 지명 표기를 섬 도(島)가 아닌 건널 도(渡)로 쓴다. 널리 미치다. 또는 나루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항구를 가리키는 국가ㆍ군사 중심의 진(津)이나 민간ㆍ상업 중심의 포(浦)로 쓰지 않았다.
 
‘푸른 파도가 있는 정자’란 뜻의 벽란정은 1085년 조정에서 세운 것인데, 누각이 아니라 관사라는 수참(水站)의 기능이 더 컸다. 건립한 계기는 1084년 8월 송나라 사신이 문종의 제문과 황제의 조위서를 바친 일로부터 비롯됐다.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도 “흑산도 관사, 군산도 군산정, 마도에 안흥정, 자연도 경원정과 같은 객관이 설치되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송나라에는 원풍 연간인 11세기 중엽, 고려 사신을 위해 세운 정관을 모두 ‘고려정’이라 명명했다. 당송팔대가인 소동파의 안티 고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처음 공개한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 <피서록>에다 “처마 기둥은 담장 밖으로 춤추며 날아갈 듯한데, … 오랑캐에 퍼주느라 종노릇하고 말았으니”라는 소동파의 시를 실어 놓았다. 1085년 등주지사로 임명된 동파가 부임지로 가는 길에 신종황제의 명으로 건립하던 ‘고려정관’을 보고,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한숨 쉬며 시를 지었다.
 
기억의 이미지, 벽란도
실제 고려의 국제 무역항은 예성항구였다. 그런데도 누구나 고려의 최종 도착지, 출항지는 벽란도라고 알고 말했다. 당시 국제여론 또는 표준은 최강대국인 송나라의 사신과 사대부들에 의해 하나같이 좌지우지되었다.
 
1123년 음력 6월 13일 송나라 국신사의 수행원으로 고려에 온 서긍의 여행기 ‘고려도경’에 남아 있다. 이 책에는 중국 명주에서 출발하여 42일간의 항해로 예성항에 도착했는데, 타고 “온 배의 사람들이 초췌해져 거의 산 사람의 기색이 없었다”라고 했다. 또 예성강 외항에서 정사와 부사는 송나라에서 고려에 보내는 사신단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선박인 신주(神舟)로 갈아타고 입항했다. 정오에 (고려 조정에서 제공한)치장한 배(采舟)로 갈아타고 벽란정으로 가서 묵는다. 이 책은 서긍이 그린 삽화와 글이 같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림이 없어져서 상상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고려 공민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 볼모로 20년 동안 가 있을 무렵, 동행했던 류숙은 1349년 귀국하면서 벽란도에서의 감격을 <벽란나루에서>란 시로 남겼다. 그 후, 이 시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과 사명대사가 자신의 시에 차운(남의 음운을 써서 시를 지음)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여말선초의 권근은 ‘식파정기’에서 벽란나루라 이름하고, 1402년 가을에 황해도 우도관찰사 이원이 새로 정자를 세워 ‘건너다니는 괴로움을 풀게 한다’는 뜻으로 식파정(息波亭)이라 했다.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황해를 건너는 해상 교역은 거의 차단되었고,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로 명·청과 주로 교류했다”라고 하여 해로의 벽란도를 찾을 수 없게 됐다.
 
해상 실크로드를 열었던 벽란도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이 중국 명나라의 바닷가를 비우는 해금(海禁, 하이진) 정책을 계승하면서 역사 속의 이미지로 남게 됐다.
 
강서사, 예성강변의 대표사찰
오늘날 백마산(白馬山) 강서사는 예성강 벽란도에 마지막 남은 절이다. 여주 신륵사가 이포와 조포나루 사이에 있는 여강의 절이라면, 강서사는 예성강 서쪽의 이포와 전포 사잇구간을 가리키는 별도의 이름인 서호(西湖)의 강 언덕에 자리했다.
 
1220년 이전, 고려의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서호의 승려 혜소는 내외전에 해박하고, 시 또한 뛰어나며 서예에도 그 묘(妙)가 있다”라고 평하면서, 견불사와 예성강의 다른 이름인 서호까지 처음 기록했다. 특히 견불사는 조선 태종 7년에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기원하는 절인 ‘자복사찰’로 지정되면서 황해도 연백을 대표하는 으뜸 사찰로 위상을 가졌다.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에는 “강서사(江西寺)는 고을 동쪽 광정도 위에 있는데, 견불사라고도 한다.” 또 1521년 10월의 ‘중종실록’에 등장하듯이 강서사로 공식화되었으며, 1757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기록과 같이 강서사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양씨 가문의 시주로 창건한 견불사의 후신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황해도 황주 성불사의 소속 말사로, 영은사ㆍ영운사라고도 했다.
 
개성부립박물관장 고유섭이 1930년대 개성의 유적을 답사하고 실측 조사한 다음, 1946년 간행된 ‘송도고적’에서 “백마산 강서사의 포구 경치가 아름답다”라고 평해졌다. 19세기 중엽 이곳을 다녀간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옛날 도선국사는 강서사에 대해 ‘부처가 보이는 곳’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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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남도 배천 강서사와 예성강 (사진=북한의 전통사찰, 도서출판 양사재)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