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30-개성특급시 화장사(하)

밀교신문   
입력 : 2020-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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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미술관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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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봉산 화장사
 
실학자 박지원은 1771년에 송도유람 때, 화장산 연암골에 은거하기를 기약하여 자호를 연암이라 했다. 연암에게 은둔과 자조의 땅, 통곡의 장이던 연암 골짜기는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황해도 금천군에 있는데, 고려말에 목은 이색, 익재 이제현 등이 살았던 곳이다. 연암이 장단의 화장사에 가서 동쪽으로 아침 해를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 듯하여 별천지가 있겠다 싶어서 가 본 곳이다.
 
이처럼 연암이 점지한 땅을 다시 보기 위해서는 보봉산 화장사로 가야 한다. 또 이 절은 고려 후기에 공민왕의 예술 마당이었다. 1671년 김창협의 ‘송경유기’에는 화장사에 가면 꼭 봐야 하는 보물로 공민왕 자화상, 지공의 등신상, 패엽경과 전단향을 지목했을 만큼 고려 말의 미술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14세기 고려왕실의 지원으로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던 고려 불화(佛畵)는 세계적으로 160여 점밖에 남아 있지 않는다. 고려 후반기에 귀족의 원당과 같이 사적인 공간에 봉안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 1310년에 제작된 <수월관음도>가 20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트뮤지엄에 전시됐을 때, “모나리자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찬사가 서방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사라져간 고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거울인 고려불화와 마찬가지로 고려 회화는 전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 11세기 ‘초조대장경’ 속에 포함된 <어제비장전>은 고려 회화를 대변하는 또 다른 작품이다. 중국 북송의 태종이 직접 지은 것으로 불교비법을 시부형식으로 설명한 목판화인데 산과 나무, 구름, 등장인물이 표현된 회화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
 
“그림에 그림자가 생긴다”라는 표현은 고려 불화를 한마디로 집약하는 말이다. 이처럼 불화적 요소를 반영한 공민왕의 자화상을 비롯해 등신불, 글씨 그리고 고려의 예술 작품이 산적했던 곳이 14세기 개경의 화장사이다.
지공, 국빈 방문하다
 
개성 화장사는 황해도 안악의 패엽사와 함께 북한 지역에 전해진 패엽경(인도와 티벳에서 나뭇잎을 엮어 그 위에 새긴 경전)이 보관됐던 사찰로 유명하다.
 
14세기 초, 패엽경이 화장사에 전래하기까지 주인공은 지공화상이다. 서역에서 온 지공대사는 이미 한역대장경이 전래한 고려에 방문의 주요한 선물로 산스크리트어 패엽경을 가지고 왔다. 인도 마갈타국 출신의 지공 선현(禪賢)은 1326년 3월에 중국 원나라의 한림원 승지 샤라발과 같이 사신 자격으로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들어왔다. 이미 그 이름이 잘 알려진 지공대사는 금강산을 찾아 예배하고, 개경의 숭복사에 머물렀다. 대사가 개경 인근 사찰을 방문할 적에 화장사는 마치 인도의 아란원사와 꼭 같은 터라면서 절을 짓도록 요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 고려왕실은 지공으로부터 받은 패엽경과 전단 향나무로 만든 불상을 1370년에 화장사로 다시 옮긴 것으로 비정된다. 1328년에는 고려 조정에서 계율도량을 만들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설법했다. 그해 9월까지 2년 반 동안 개경에 머물다가 원나라 연경(베이징)으로 돌아갔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 사찰에 지공이 가져온 서축 패엽경이 있어 당시까지 전하였다.” 지공대사가 직접 써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전하는 패엽경과 우두전단(牛頭栴檀) 향나무로 만든 조각 불상이 있었으나, 1371년 7월 신해환국 사건 때에 없어졌다고 전한다. 고려 말기의 이숭인은 ‘도은집’의 시에서 “듣건대 전단 향나무 조각 불상이, 서역의 계빈 나라에서 떠내려 왔다고. …지금은 텅 빈 채 폐쇄된 전각, 아마도 병진 속에 파묻혔을 듯”하다고 향나무 불상의 훼손을 우회적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19세기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화장사에 패엽경이 있는데, 고려의 승려 나옹선사가 서역의 지공대사에게 가서 사사하고 돌아올 때 가져온 경이다. 이 경의 길이는 옛 자로 반 자쯤 되고 너비는 4촌쯤 되는데, 그 빛깔은 희고 무늬와 결은 마치 자작나무 껍질과 같으며, 두께도 그와 같다. 한 잎에 6~7행씩 범자가 쓰였고, 가는 글자가 쓰인 것까지 합하면 모두 천여 잎이나 되는데, 위아래 두 군데에 구멍을 뚫고 실로 꿰맸으며, 겉에는 양쪽으로 나무 조각을 대어 꼭 끼워 놓았다. 그리고 패다 잎을 구하여 몸에 지니면 온갖 귀신들이 공경하고 복종한다고 한다.”
 
이 내용은 1934년의 ‘전등본사말사지’에도 같이 기록이 됐다.
 
19세기 초, 조수삼의 ‘추재집’에는 “장경각에 올라가니, 날씨가 맑게 개어 좋은 날씨이다. …아자방에 들어가니, 휴반(시렁)에서 꺼내온 붉은 비단 주머니가 있는데, 그 주머니 속에 800의 패엽이 다섯 축으로 나뉘어 길이가 1척인데, 흰 실로 엮어 남목으로 장식하였다. 조사의 수택이 섬세히 남아 있다. 중국 비단으로 짠 주머니는 부드럽기 비길 데 없고, 초엽죽피가 모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두 머리가 20행인데, 한 행에 7자씩 씌어 있으며, 가운데에 3행의 저의가 씌어 있다. 글자의 모양은 마치 파리 대가리와 새 발과 같은데, 단엄하게 쓴 품은 보통사람의 글씨가 아니다.”라고 했다.
 
화장사, 고려 후기의 미술관 
화장사에는 14세기 말에 만든 지공의 목조 등신불이 있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할 때 화장사 적묵당에 봉안되었으며, 1942년 촬영한 사진에도 등장한다.
 
한반도에 거의 없는 사실적 초상조각인 지공대사 좌상은 일종의 미라상인데, 조선 후기의 도식화된 승(僧)의 형상과 달리 이국적 풍모의 조각상이었다. 1385년 왕실 후원으로 사찰을 중수할 때 나옹 문도의 주도로 만들었거나, 1393년 무학대사가 화장사에서 부도를 세울 때 함께 조성한 것이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지공의 좌상은 머리에 쓴 보관, 긴 눈썹과 수염, 화려한 문양의 복식 등이 특징이다. 서역의 출신답게 피부가 검고 눈이 푸른 이국적인 용모가 조형적으로 반영되었다.
 
1353년 중국 베이징 법원사에서 만나 시작된 지공-나옹-무학의 법맥은 오늘날 삼화상도(三和尙圖)로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 사람이 한 장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삼화상의 진영이 다수 그려졌다. 현재, 경북 의성 대곡사에 소장된 삼화상 진영은 1782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존 진영 중에서 가장 오래된 탱화이다.
 
또, 화장사에는 고려 제왕의 유일한 초상이 있었다. 공민왕이 직접 그린 자신의 도상이 있었는데, 1916년 찍은 사진에 등장한다. 허목은 ‘미수기언’에서 1667년부터 1672년에 걸쳐 세 차례나 공민왕의 진영을 언급하면서 “황해도 화장사에 공민왕이 거울을 보며 그린 자화상이 있다.” 또 허목은 이 그림이 17세기까지 전하게 된 까닭에 대해 고려의 “흩어진 백성들이 비용을 모아 진전에 제사하는 오래된 풍속이 조선 후기에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1799년의 ‘범우고’에도 “화장사에 고려 공민왕의 영정이 있다”라고 소개됐다. 신위의 ‘경수당집’에는 “불당 안에 그림이 보이는데 후리후리하게 큰 사람 그 허리 대단히 크구나, 허연 용의 수염을 보자 문밖에서 깜짝 놀라 다가가면서 얼굴색을 고치며 옷을 매만진다”라고 시로 소개했다. 이 초상화와 등신불은 1950년 12월 말, 경인전쟁 때 사찰이 소실되면서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공민왕의 진영 실체를 알 수 있는 기록은 1928년에 출판된 ‘근역서화징’으로 공민왕상 한 폭은 길이가 208.2㎝, 폭 154.8㎝라고 기술했다. 또 유물로는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조선고적도보’에 1916년 촬영한 진영이 실려 있다. 그 진영은 너무 희미해 구체적인 인상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우측에 ‘고려성군공민대왕진’이라고 묵서가 쓰여 있다.
 
고려 공민왕은 염제신, 윤해 등 신하의 초상을 직접 그려 선물했다고 한다. 1481년의 ‘동국여지승람’에는 “공민왕이 염제신의 얼굴을 친히 그려주면서 ‘중국에서 공부했고 성품 또한 고결하니, 다른 신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전언을 기록했다. 또 자신과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
 
서울 종묘의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에 걸려 있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상> 그림은 주로 원나라 때부터 유행한 것인데, 신화가 된 세기의 사랑을 나눈 그림이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우리나라에는 명화가 별로 없다. 근래로부터 본다면, 공민왕의 화격이 대단히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간혹 큰 부잣집에 산수를 그린 것이 있는데, 비할 데 없이 뛰어나다”라고 평한 것으로 보아, 15세기 말까지도 공민왕의 작품 상당수가 남아 여러 사람이 구경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공민왕의 글씨도 유명했다. 1359년 6월에 이제현은 ‘익재난고’에서 “주상전하께서 ‘직지당 월담’이란 다섯 자를 대자로 써서 회암 심선사에게 내리셨는데, …하늘이 낸 솜씨”라고 평했을 만큼, 당대 최고의 명필로 소개했다.
 
부도의 꽃, 지공 사리탑
화장사 명부전 동쪽 언덕 위에 놓여 있던 이 사리탑은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하여 파괴되었다가 1983년에 다시 복구됐다. 국보유물 제134호 화장사 사리탑은 고려시대 석종형 부도를 대표하는 양식인데, 지공대사의 제자 무학이 1393년에 세웠다. 이 사리탑 인근에는 다른 부도 4~5기와 비 1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화장사 부도의 몸돌 앞면에 ‘지공정혜령조지탑’이라는 암각자가 새겨져 주인이 지공화상임을 알 수 있다. 전체 높이가 1.94m로, 직경 10여m 되는 8각으로 쌓은 밑기단 위에 세웠다. 2층으로 된 8각의 밑기단을 쌓고 다시 그 위에 8각으로 된 탑신으로 올려놓았다. 대돌에는 아름다운 연꽃잎 16개를 양각으로 새겼다. 대돌 위에는 반구형으로 된 탑신석을 올려놓았는데, 그 높이는 95cm이다. 탑신석 어깨 부분에 큼직큼직하게 두 겹으로 된 9개 연꽃잎을, 그 아래에 7잎의 보상화와 비슷한 꽃잎 장식을 새긴 조각 솜씨는 매우 훌륭하다. 사리탑의 머리 부분은 마치 종(鐘)의 손잡이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탑의 보륜과 같이 둥글고 납작한 돌을 여러 겹 겹치게 포개어 쌓고, 그 위에 보개를 올려놓은 형식으로 그 생김새가 독특하다.
 
일제강점기에 도굴된 지공 사리탑의 라마탑형 사리구와 사리는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 평양 양각도호텔 48층에서 해외반출문화재 환수를 위한 남북공동 협약식을 체결하고,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공민왕의 미술 공작소라 불리며, 17~18세기 성행했던 문인들의 송도유람기에 자주 등장한 화장사는 사라졌으나, 고려시대로 떠나는 시간여행은 아직도 유효하다. 통일되는 그날, 조선 최대의 절 회암사와 고려 최후의 절 화장사를 잇는 도보 다리 순례를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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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화장사와 지공대사 사리탑(사진출처:조선의 명승고적, 1995년판)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