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29-개성특급시 화장사(상)

밀교신문   
입력 : 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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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명당의 절을 찾다

봉악 화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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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중환은 1751년의 <택리지>에서 화장사 지역을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관대작의 무덤이 많아 사람들이 (중국)낙양의 북망산에 견준다”라고 했다.
 
저승의 수미산으로 불리는 북망산은 중국 허난성 낙양 북쪽에 있는 낮은 산인데, 중국의 통일왕조인 한나라 이후 제왕과 귀인, 명사 무덤이 만들어졌다. 사람이 죽으면 묻힌다는 ‘북망산천’에서 유래했다.
 
이 말이 유명하게 된 때는 1194년 주자가 당시 송나라 황제에게 상소한 <산릉의장(山陵議狀)>이란 글로부터 비롯됐다. 그 후, 이 상소문은 중국과 조선 풍수지리에 관한 일종의 지침서였다. 심지어 주자의 이 글은 조정에서 풍수를 논할 때마다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까지 언급될 정도였다.
 
개경의 북망산으로 부르는 만수산과 화장산은 저승의 명당으로 꼽혔다. 서북쪽의 만수산 남쪽 일대에는 고려왕과 왕후의 무덤 20여 기가 남아 있다. 개성역사유적에 포함된 왕릉은 태조 왕건릉과 공민왕릉, 충목왕의 무덤인 명릉과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무덤군인 칠릉 떼 등이 있다. 동남쪽의 장단군 대원리 화장산에는 경릉리에 고려 문종의 능인 경릉, 눌목리에 고려 숙종의 능인 영릉 등이 있으며, 대세현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화장산과 잇대어 있는 봉악(鳳嶽) 또는 보봉산 화장사는 인도승려 지공대사의 종형 부도를 비롯한 여러 기의 승탑이 자리하는 등 승가의 열반당으로 유명했다. 또 화장사는 조선 초기에 2대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의 후릉을 지원하는 조포사로, 구한말에는 만해 한용운의 불교혁신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이다.
 
화장사, 사명을 바꾸다 
개성의 보봉산 화장사는 현존하지 않는 사찰이다. 1950년 12월 25일 UN 연합군의 폭격 등으로 말미암아 소실됐다. 개성 사람인 송경록이 2000년 6월에 출판한 <개성이야기> 책에서도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이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그가 화장사에 방문하지 않고 기록한 것은 1983년 북측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역사유적>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연유일 것이다. 2011년 8월에 국내 출판된 <북한의 전통사찰> 도록에는 정자각 형태의 관리인 집 한 채만이 있고, 아홉 채가 넘었던 전각들이 자리한 곳에는 주초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개성의 화장사가 현재, 전각 등 건물이 없으면서도 현존하는 것처럼 알려진 것은 북측의 몇몇 출판물과 더불어 이를 남측 언론과 출판물에서 여과 없이 인용한 결과다. 옛 문헌에서 보봉산 화장사는 묘향산의 화장암, 강원도 통천 황룡산의 화장사, 황해도 구월산의 화장사, 평남 용강 봉곡산의 화장사, 평북 태천 향적산의 화장사와 함께 같은 사명으로 다뤄지고, 6대 동명의 사찰로 유명하였다.
 
화장사의 원래 이름은 계조암 또는 계조굴이라고,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편에 처음 기록됐다. 이 문헌에서는 “지공이 처음에 터를 보고 크게 절을 지어, 마침내 큰 총림이 되었다. 불전과 승당의 제도가 매우 굉장하여, 매년 여름이면 중들이 모여들어 참선하는 것이 양주 회암사와 어금버금하다. 이 절에 지공이 가져온 서축패엽경이 있어 지금까지 전해진다”라고 했다.
 
1657년에 대덕 숭해가 중창하면서 기록한 <보봉산화장사전후중창기>에는 “1385년 을축년에 계조암의 난야 유적에다 창건했다”라고 한다. 이 내용은 1706년에 사찰을 중수하고 세운 <화장사 중초비명>에도 같이 기록됐다. 그렇지만 화장사의 창건 시기는 지공대사가 14세기 초기 고려에 방문했던 시기설과 대사의 입적 후인 고려 공민왕 때의 건립설이 혼재되어 있다.
 
1934년 간행된 <전등본사말사지>에서 “개성 화장사는 1353년에 조정에서 중건했다”라고 한 것이 가장 앞선 기록이다. <고려사>에서는 1370년 1월 24일에 “왕이 왕륜사에 행차하여 부처의 치아 및 호승 지공의 머리뼈를 관람하고, 몸소 스스로 머리에 이고 궁궐 안으로 맞아들였다”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대사의 유골이 고려에 처음 이운됐다. 그 이전에 고려를 방문했던 지공대사가 극찬한 바 있는 화장사에 편액이 하사되는 등 1373년에 대규모로 중창되고, 나옹선사가 직접 쓴 승탑 비문과 부도가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이 왕사인 나옹선사를 위해 건립한 화장사는 나옹화상이 잠시도 머물지 못했지만, 그의 스승 지공대사를 위한 추모 공간, 경전을 학습하는 불교학당으로 이용됐다. 현존하는 지공화상 부도는 1393년에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건의로 세우도록 한 것이다.
 
봉악 화장사는 화장사(花藏寺)·화장사(華莊寺)로도 표기됐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승려 지공대사가 1326년 3월부터 1328년 9월까지 2년 6개월간 고려에 방문하기 이전부터 화장사란 이름으로 존재했었다. 1115년 삼중대사 묘응국사가 화장사에 머물렀다. 1229년 화장사에서 입적한 정각국사 지겸은 1216년부터 주지로서 13년간 머물렀다고 이규보가 쓴 <비명·묘지명>에 전한다. 현재 국사의 비는 전하지 않는다. ‘고려사’ <김이전>에는 1288년에 “김이의 나이 24살에 우연히 화장사에서 잠을 자다가 왕을 돕는 꿈을 꾸고, 그해에 왕을 도와 장흥부의 수령이 되었다는 출세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말엽에 들어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화장사는 지공대사의 제자인 나옹선사와 무학대사의 후원에 힘입어 대가람으로 변모했다. 그 이름과 같이 부처님의 또 다른 원음이 전해지는 전당으로, 꽃 피는 화원으로 알려졌다.
 
고려와 조선의 절, 화장사
화장사의 진산은 봉악으로 불리는 보봉산이다. 개성시에서 장풍군으로 가는 큰길로 쭉 가면 회령(檜嶺)고개에 도착하게 된다. 이 고개에서 본 “산 모양이 봉황이 춤추는 것과 같다”고 하여 산 이름으로 붙어진 봉악 쪽으로 5리쯤 더 가면 산 중턱에 화장사가 자리했다.
 
개성특급시 용흥동의 동북쪽에 자리하는 화장사는 10세기 이전에 개창되어 1115년 삼중대사 묘응과 1216~1229년까지 정각국사 지겸이 주지를 역임하면서 머물렀다. 그 후 인도승 지공대사가 1326년 3월~1328년 9월까지 고려에 왔다 간 이후, 1349년에 수공이 중수하고, 1353년에도 고려 조정의 지원으로 중수했으며, 1358년 3월 송나라에서 귀국한 나옹화상이 머물면서 패엽경 약 10축을 봉안했다. 특히 1370년 1월에 지공대사의 유골과 사리가 고려에 전해지면서 1373년에 중창했다. 이때 유골은 묘향산 안심사와 화장사에 안치하고, 지공대사 사리탑과 석비가 건립됐다.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 등 10여 채가 넘는 전각을 갖춘 이름난 절이 되었다.
 
1385년 고려 공민왕에 의해 중건된 화장사에는 지공대사의 목조 등신불이 조성되어 봉안되고, 1393년에는 지공대사의 부도가 회암사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됐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 건의로 지공대사 사리탑이 건립된 이후, 1400년에는 내탕고의 비용으로 석가삼존상과 오백나한상을 봉안함으로써 정종의 원당이 되었다.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사찰에 지공대사가 가져온 서축패엽경이 있어서 당시까지 전하였다.” 중종 때는 화장사의 대규모 불사에 대해 비판 여론이 멈추지 않았다. 1539년에는 화장사에 안치되어 있던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의 영정을 모셔와 궁궐의 선원전에 봉안하였는데, 그 사실이 문젯거리가 되어 다시 돌려주었다. 이덕형은 <송도기이>편에서 1629년 개성 유수 때에 화장사 대웅전 뒤 바위 구멍에 전하는 고양이 머리를 가진 구렁이인 묘두사와 박만호의 이야기 전설을 기록하고, 1373년에 옛 계조암 터에 중건하였다는 내력까지 실었다.
 
1645년에는 장로 숭해가 8년에 걸쳐 사찰을 중창했다. 1657년 대덕 숭해가 중창하면서 “을축년에 계조암 난야 유적에 창건했다”라는 <화장사전후중창기>를 남겼다. 1671년 김창협이 쓴 <송경유람기>에는 “화장사는 근래 들어서야 중건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단청이 선명하였다. 불당 왼쪽의 작은 집에는 공민왕의 영정을 모셨고, 또 그 왼쪽은 수백 수천의 나한상을 모신 나한전이었다. 불당 오른쪽이 지공의 소상이 있는 적묵당이고, 또 그 남쪽이 가섭 이하 여러 조사가 있는 조사전인데, 생생한 그 그림들은 매우 정밀하고 아름다웠다. 함에는 패엽서와 전단향이 들어 있었다. 글은 모두 범자(梵字)였고, 향은 한 대만 태워도 40리까지 일시에 향기가 퍼진다는 것이었다. 지공이 서역에서 가져온 것을 지금까지 보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동쪽 요사에서 묵었는데, 새벽 불공 때 범패 소리가 요란했다.”
 
또 1706년에는 <화장사사적비>를 중수하여 세웠다. 1727년에는 화재로 나한전 한 채만 남고 전부 불타버렸으나, 1779년에 대웅전 등을 복구하고 후불탱화를 다시 조성했다. 1865년에 적묵당이 화재로 소실되어 용파대사가 중건했다. 1878년에 우담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명부전을 지었으며, 학림사로부터 시왕상을 가져와 봉안했다. 1850년경 조수삼은 <추재집>에서 “경종 때까지도 화장사에 패엽경이 보관되어 있었다”라고, 장경각에 보관한 패엽경 이야기를 기록했다. 1927년에 화재로 모두 불탔으나, 화주 초암과 경화 등이 7년간 걸쳐 중창했다. 그 후 1950년 12월 전쟁 때 모두 파괴되었으나, 1983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대웅전 등 3동과 사리탑 등이 복구되었다. 종의 손잡이를 닮은 지공대사 사리탑 등은 현재 화장사 동쪽 기슭에 그대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1990년 초에 일어난 산불로 사찰이 전소되고, 관리인 거주하는 요사채 1동이 건립되어 남아 있다.
 
화장사, 불교혁신운동의 발원지
만해 한용운 선사는 1912년 3월 경기도 장단의 화장사에서 <여자단발론>을 탈고해서 세상에 알렸다. 이 원고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댕기 머리가 여성의 상징이 아님을 대변하는 ‘단발랑(斷髮娘)’을 주창했다. 요즈음과 같이 짧은 숏컷 헤어스타일을 가리키는 버즈 컷처럼 여성 이미지의 변화를 제안했다.
 
근대에 홍사용은 1938년 ‘매일신보’ <처마의 인정>에서 “옛날에 장단 화장사는 처맛기슭으로만 돌자 해도 삼천리나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요새 세상에서는 사원도 그렇게 수천 간 늘려 지을 필요가 없어진 모양인지 몇 층집 단채집을 좁은 터에다 세워 놓고, 가다가 어쩌다 단월가의 불공종(佛供鐘)이나 올리곤 한다.”
 
1631년 이덕형의 설화집 <송도기이>에서는 “번성했던 곳이 황폐해지곤 하는 것은 흔한 일이오니, 청산을 향해서 시비를 걸지는 마시오소서”라고 했듯이 최근 세기에 사라진 화장사는 이제, 후세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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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화장사 1942년 모습. (사진출처: 《화장사 엽서》, 부산시립미술관 소장본)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