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27-개성특급시 영통사(말)

밀교신문   
입력 : 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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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협력사업의 표본이다

오관산 영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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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영통사는 오관산(五冠山)의 남쪽 기슭에 있다. 북쪽은 5개의 기묘한 봉우리를 가진 오관산과 애기봉의 기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쪽에는 문수봉, 서쪽에는 재봉이 솟아 있다.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쌌지만, 남쪽은 얼마간 트인 편이면서 나지막한 흙산이 자리하고 있다.
 
사찰의 산천경계는 ‘고려사’에 “산수의 수려함은 송경에서 으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영통사는 오관산 아래에 있는데, 그 골짜기가 깊고 멀다. 주위는 산으로 둘러 막히고 시냇물이 감돌아 흐른다. 수림은 울창하다. 그 시루의 경개는 송도에서 제일이다”라고 했다. 절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북쪽 오관산에서 시작된 시냇물이 재봉의 동쪽 기슭을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동쪽으로는 시루봉 골짜기에서 시작된 다른 하나의 자그마한 시냇물이 남쪽으로 흐른다. 이 물줄기는 영통사 입구에 이르러 서로 합쳐서 아담한 못을 이루고, 저 멀리 동강으로 흘러간다.
 
영통사 인근에는 여럿의 절이 자리했다. 동북쪽의 2km 지점에 옛 흥성사 또 약 7km 지점에는 칠성암 터, 동쪽으로 약 6km 떨어져 현화사 터와 불일사 터·복흥사 터, 북서쪽의 성등암 터와 약 8km 거리 떨어진 곳에 화장사가 있다. 서북쪽으로 4㎞ 떨어진 총지사 터, 서남쪽으로 약 6km 거리에 귀법사 터가 남아 있다.
 
국보유적 제192호 영통사의 현주소는 개성특별시 용흥동이다. 1988년 7월 개성직할시 용흥리가 2004년 1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명칭이 바뀌었다. 개성시 중심지에서 동북 방향으로 10여km, 고려 도읍지인 개경 나성의 탄현문 터에서 동북쪽으로 8km 남짓한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영통사, 창건과 폐사의 기록 
‘기록의 나라’로 불리는 고려와 조선에서조차 영통사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다. “부엉이가 울었다.”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기록했는데, 고려왕과 명나라 사신까지 다녀갔던 영통사에 대해 한 줄의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것이 기이할 따름이다.
고려 현종의 명으로 1027년에 창건된 영통사는 태조 왕건의 선대 이래의 원찰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도 창건과 폐사에 관해 분명하지 않지만, 1215년 각훈대사가 왕명으로 편찬한 ‘해동고승전’권제1에 “1027년(현종 18년)에 창건되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946년 원공국사 지종이 17세 때 영통사 관단에서 수계를 받았다.” 또 법상종의 고승 혜소국사 정현이 “980년대 영통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각국사의 은사이자 외삼촌인 경덕국사 김난원은 “영통사에서 수도하였으며, 왕명으로 문종의 넷째 왕자 후를 승려가 되게 하여 화엄교관을 가르쳤다”라는 기록을 볼 때, 영통사는 11세기 초에 이미 대찰로 자리했다.
 
고려 왕씨 가문의 원찰인 영통사는 마하갑 일대의 사찰을 통괄하는 사찰로 1027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초조대장경’의 판각과 인쇄작업에 따른 고급인력과 종이 제조에 필요한 노동력의 수급, 닥나무 등 원자재 공급이 원활한 곳으로 선정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므로 영통사는 제8대 현종의 비원이 서린 사찰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1065년 5월 14일에 대각국사 의천이 영통사에 출가하면서 고려왕실에서는 다른 어떤 사찰보다 많은 참배를 하고, 왕실 주관의 재나 기신도량 등이 개설되었다. 1101년 10월 대각국사 의천이 입적하자 2년 뒤에는 영통사 서북쪽에 제사 지낼 사당으로 쓰일 경선원이 완공되고, 이곳에 국사의 부도를 만들어 동쪽 석실에 모셔져 있던 유골을 이장하면서 대가람으로 변모했다.
 
조선 세종 때는 교종 18개 사찰의 한 곳으로 지정됐고, 거주 승려 100명만이 허용되었다. 또 성종 때에는 수륙사로 지정됐다. 1502년 박은의 ‘읍취헌유고’에는 영통사에 스님들이 살고, 흙다리를 고쳤다고 했으며, 1510년대 김안로의 ‘희락당고’에서는 파괴된 절을 다시 세웠다고 했다. 16세기 이행은 ‘천마록’의 시에서 “옛 절은 퇴락하여 풀들만이 밝힌다”라고 했다. 1554년 주세붕은 ‘무릉잡고’에서 "밤새도록 서쪽 누방에 베개를 누이다”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영통사 전각들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영통사와 숭복원의 후신인 흥성사는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이전까지 고려 때의 위용은 아니더라도 중수와 보수가 수차례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1671년 김창협이 쓴 ‘농암집’ <송경유람기>에는 “이 절은 옛 송경의 대가람으로,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건물이 열 중에 두셋 정도만 남아 있다. 뜰에는 세 개의 석탑이 서 있고 문밖에는 고려시대 승려 의천의 비가 서 있는데, 중간 이하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 없었다. 채수가 ‘유송도록’에서 매우 칭찬한 명승지 서루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았다.”
 
표암 강세황이 1757년에 그린 ‘송도기행첩’ <영통동구> 그림은 표암이 이곳을 방문할 즈음에 영통사가 폐사되어 표암은 절로 들어가는 입구의 경관만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나귀를 탄 선비와 하인 두 사람과 중량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상징처럼 그려 놓아 이채롭다.
1998년과 1999년 두 해에 걸쳐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일본 대정대학이 공동으로 추진한 영통사 유적발굴조사에서 명나라 세종 때 연호로 쓰인 ‘가정 43년’이 찍힌 수기와 막새가 출토됨으로써 영통사는 적어도 1564년 명종 때까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통사의 폐사에 대한 원인은 화재 등 자연 재해설과 전쟁에 의한 외적 요인을 들 수 있다. 1671년 김창협이 ‘송경유람기’에서 “두셋 채의 건물이 있을 뿐. 송도제일의 서루가 남아 있지 않고, 석재 유물이 남아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화재에 의한 원인도 있었겠으나, 임진ㆍ정유재란 때 가람 대부분이 소실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2005년 북측 기관에서 “1901년 5월 화재로 사찰이 전소되었다”라고 하는 내용은 고려 중기의 규모가 아니라, 전각 1~2동의 영통사 건물이 존재하였거나 이 사찰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말한다.
 
남북 협력사업의 모델, 영통사
오관산과 함께 산악미ㆍ계곡미ㆍ수림미의 세 가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영통사는 1799년 편찬된 ‘범우고’에 “영통사는 동서로는 약 150칸, 남북으로는 약 80칸이나 되는 대규모 사찰이었다”라고 했으나, 1592년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년 전쟁 이전까지 가람의 모습일 뿐이다. 그 후 1901년에 폐사된 영통사지는 개인 집과 농지로 전용되는 등 백 년 가까이 ‘숲 풀에서 잠자는 유적’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와 고려의 전설로만 전해오던 이 사원은 2002년 11월 대한불교 천태종과 북측 조선경제협력위원회가 함께 개성영통사복원위원회를 구성하고, 2003년 봄부터 복원공사에 착수하여 2007년 10월 30일을 기해 2만여 평 부지에 29개의 전각을 다시 복원했다. 그중 1천2백여 평의 경내 중앙회랑 안에 들어선 전각은 여섯 곳이다. 일주문을 지나 중문을 통과하여 처음 마주하는 2층의 중심 건물이 보광원이다. 그 앞마당에 서 있는 국보유물 제37호 오층석탑은 1113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중앙탑이라 불리는데, 탑머리인 옥개석 윗부분의 상륜부가 없어진 상태이다. 전체 높이는 약 6.75m, 기단 한 변의 길이가 2.25m, 너비 4.10cm이다. 국보유물 제38호 서3층탑은 높이가 4.23cm이다. 상륜부에는 보륜의 석조물이 남아 있으나 일부 파손되었다. 보물유적 제35호 동3층탑은 서3층탑과 같은 양식으로 총 높이가 4.23cm이다. 석등은 8각형의 지붕돌과 받침돌만이 남아 있다.
 
보물유물 제37호 영통사 당간지주는 일주문 앞 서쪽 마당에 서 있다. 1113년경에 세운 당간지주는 높이가 4.47m, 너비 1.01m, 두께 20cm이다. 또 가장 유명한 영통사 ‘대각국사비’는 일주문 뒷 동쪽 마당에 세워져 있다. 국보유물 제155호인 비석은 1125년 7월 검정색 청석으로 만든 것인데, 전체 높이가 4.52m, 비신의 높이 3.05m, 너비 1.60m, 두께 24cm에 이른다.
 
보광원 뒤의 중층 건물은 중각원이다. ‘고려사’에서 왕과 법사들이 50여 차례의 강의를 진행했다고 기록했던 강당이다. 그 뒤에 있는 건물은 숭복원이다. 행궁이던 숭복원은 태조 왕건의 원당으로 사용했으며, 그 후에는 사찰을 찾은 왕의 숙소로 이용됐다. 사방을 모두 회랑으로 막아 경계와 부속건물로 사용했다. 일주문의 우측 동쪽편에는 2개의 건물이 남북으로 위치하는데, 앞쪽의 동문에 들어서면 관세음보살을 봉안한 보소원이 있고, 뒤쪽에는 영통사와 인연 있는 역대 고려 왕들의 초상을 봉안한 영녕원이 건립되어 있다. 중문의 좌우에는 회랑에서 돌출한 형태의 종루와 경루가 있는데, 경주 불국사의 회랑 형태와도 비슷하다.
 
영통사 서쪽 언덕에 경선원이 있다. 국사의 사리탑(부도)을 만들면서 지은 3동의 건물과 산문 1동이 복원됐다. 또 입구의 계곡에는 1104년경 처음 만들어진 흙다리인 심해교는 15세기 중엽에 홍수 등에 의해 유실되고, 2005년에 영통교라는 잘 다듬어진 돌다리로 바뀌었다. 다리 동쪽 끝의 계곡에는 영통동문과 오관산이란 암각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다. 국사의 묘실구역 뒷산에는 머리 부분만이 형상화된 미완의 2상 마애불이 큰 바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영통사지 발굴조사는 1999년 하반기에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평양건설건재대학 건축사연구실을 중심으로 추진한 다음, 2003년부터 시작된 복원사업 기간에는 육로 방북 16회에 걸쳐 천태종 스님 69명과 종단 실무자 83명, 대한통운 운송기사 155명 등 연인원 307명의 인적교류를 가졌으며, 기와 약 46만여 장, 단청재료 3천 세트, 중장비 차량 7대, 조경용 묘목 1만 그루, 비닐 자재 100톤, 각종 건축 마감재 등을 남측에서 지원하고, 북측에서 건축 인력과 기술자, 장비와 시멘트, 모래, 철근 등 건축자재를 투입하여 약 3년에 걸쳐서 완공됐다.
 
북측 ‘조선중앙방송’ 등에서 여러 차례 보도한 영통사 발굴조사와 복원사업은 대각국사의 출가 사찰로서 국사의 입멸 후, 1113년에 중창된 건축양식을 기본모델로 하여, 총 4만 평의 부지에 기본사찰, 동북 무덤, 서북 건축지구 등 세 구역으로 나누어 복원하였으며, 고려시대 사원건축 기법을 구현한 총 건축면적 2천800여 평에 이르는 공간에 29동의 전각 등과 석탑, 다리가 복원됐다.
 
2007년 10월부터 영통사 주지를 맡고 있는 혜명대사를 비롯하여 4~5명의 승려가 상주하는 오관산 영통사는 고려 천태종의 발원지로 알려진 만큼, 남북한의 불교계가 함께 힘을 모아 복원한 협력사업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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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관산 영통사 복원 전경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