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존사찰 27-개성특급시 영통사 (하)

밀교신문   
입력 : 2020-07-13 
+ -

고려 천태종을 창종하다

관모산 영통사

thumb-20200622094209_267fe09fbc49bada03e46e11fddf1fda_re60_220x.png

2007년도 이후, 영통사를 취재했던 남측 언론이 오관산의 봉우리가 흡사 관모를 덮어쓴 것 같다고 하여 관모산이라 보도한 것은 사실과 같다. 박달산으로 지칭한 것은 문헌 기록에도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지명을 쓴 것이다.
 
흔히 오관산으로 부르고 사용하는데, 옛 문인들과 일부 학자는 보관을 쓴 산이란 의미로 관모산이라 했다. 이 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 영통사는 1027년에 창건되어 고려와 조선 전기까지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1598년경 임진ㆍ정유재란을 전후한 시기에 폐사되었다가 2005년 10월 30일을 기해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됐다.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2002년 9월 발간한 ‘영통사유적발굴보고’에 의하면, 영통사는 “우리 민족사에서 첫 통일국가로 등장한 고려의 이름 있는 절간의 하나다. 고려의 숭불정책의 역사적 배경에서 세워진 절 건물 중의 하나다. 또 고려 천태종의 시조 대각국사 의천의 사적이 깃들여 있는 절이다”라고 했다.
 
16세기 말에 폐사되어 농토와 나대지로 남았던 영통사지 유적은 1997년 가을에 조ㆍ일 공동조사팀으로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일본 다이쇼대학 불교연구소, 재일총련 고고학협회가 현지답사를 진행하고, 이어서 1998년 4월 중순부터 1999년 10월 중순까지 4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추진했다. 그리고 2000년 봄과 가을에 두 차례의 보충발굴이 이루어지고, 2007년 10월을 기해 관모산 영통사는 남북공동 복원공사를 통해 완성됐다.
 
천태종, 교장프로젝트 설계하다    
대각국사 의천은 세계 최초의 인문학술 콘퍼런스를 열었던 주인공이다. 2011년 10월 5일 사망한 미국의 스티브 잡스가 저승에서 만났다면 당장에라도 스승으로 모실 그런 분이다. 그것은 의천이 19세이던 1073년에 지은 ‘대세자집교장발원소’에 기록한 바와 같이 무수한 철인들이 만들어 낸 독특한 종파적 사관으로 정립된 대장경의 이론서를 하나로 묶어 유통하려고 한 생각과 실천한 일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의천과 스티브 잡스가 생을 마감한 날이 10월 5일로 겹친다. 그들이 처음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이승이 아니라 저승일 뿐. 천년의 시간을 교차하여 잇댄 과거 고려와 현재 미국에서 학술지식정보 콘텐츠의 황제로 살았던 그들이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과언 어떤 프로젝트를 구상할까? 이들의 꿈조차 궁금하다.
 
고려 11대 문종의 넷째 왕자였던 의천은 1055년 9월 28일 출생하여 1101년 10월 5일 입적했다. 영통사 ‘대각국사비’에는 “불행하게도 47세의 단명이었으나, 그의 세운 바 업적은 이처럼 위대하였다. 자사가 말하기를, ‘자신의 정성으로 발명한 자’라 하였으니, 그와 같은 유형이라고 하겠다.” 이 비문을 지은 김부식은 대각국사 의천을 공자의 손자요. 공리의 외아들인 자사(子思)와 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 위대한 출발은 의천의 출가로 비롯됐다. 영통사 <대각국사비> 앞면과 ‘고려사’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9살이던 1063년 4월 4일 “어느 날 문종 임금께서 모든 왕자를 불러 놓고, ‘누가 능히 스님이 되어 복전으로 국조와 국민의 이익을 위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왕에게 출가를 요청했다고 전한다.
 
‘고려사’에는 “1065년 5월 14일 왕이 경령전에 나아가 영통사 경덕왕사 난원을 불러 왕자의 머리카락을 깎게 하고 계율을 받게 하여 승려로 만들었다.” 11세 어린왕자 의천은 경령전에서 아버지 문종과 왕후 등이 바라보는 가운데, 외삼촌인 왕사 김난원의 수계에 따라 삭발을 하고 계를 받았다. 그날 은사 난원을 따라 오관산 영통사로 가서 수행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067년 7월, 문종은 '광지개종홍진우세승통'의 법호를 하사했다. “세상을 돕는다”라는 우세란 법호와 승통의 직위를 받은 13세 의천은 ‘부처의 불심과 상통하는 나라를 기원하는 절’인 영통사에서 송나라 구법 순례를 떠나기 전, 1085년 4월 7일까지 20년간 경선원에서 지냈다. 우세승통이 19세에 지은 <세자를 대신하여 교장 모으기를 발원하는 소>의 내용과 같이, 승통 의천은 영통사에 머물던 20년 동안 이미 ‘고려 제종교장’의 국책프로젝트 구상과 설계를 모두 마친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절 의천은 1085년 4월 7일(음력)을 기해 개경 남동쪽의 정주(지금의 승천포)에서 상선을 타고, 중국 산동의 밀주에 입국하여 14개월간 송나라에 구법 순례했다. 왕명으로 어쩔 수 없이 1086년 5월 29일 개경에 돌아왔지만, 송나라에서 의천의 구법은 1천 권의 불경들이 대거 고려에 들어오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7월에는 흥왕사의 초대 주지를 맡아 그곳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송나라와 요나라ㆍ왜국에서 불경과 고서를 수집하여 세계 최초의 장소 목록집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1090년 8월 8일에 편찬했다. 이 목록집은 세기의 문헌학자로 불리는 16세기 네덜란드의 수도사 에라스뮈스보다도 무려 425년을 앞서서 편찬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1091년부터 1101년까지 흥왕사 교장도감에서 일명 <속장경>으로 불리는 ‘제종교장’의 4천7백40여 권의 나무경판 작업을 총괄했다. 40세 때 해인사로 퇴거했던 의천은 1097년 2월 17일 인예태후와 숙종의 원찰로 창건된 국청사의 초대 주지로서 낙성식 때 천태교관을 처음 강의하고, 1100년 6월 4일 개경 오정문(五正門) 밖의 국청현(國淸峴) 국청사에서 고려 천태종의 개창을 선포하였다.
 
영통사 ‘대각국사비’에는 “천태불롱(天台佛隴)에서 천태종지를 전래하여 중흥하기로 서원을 세운 이후로는 하루도 이 맹서를 마음에 잊은 적이 없다”라고 했다. 그날 개창식에는 중국 천태종의 개조인 지의가 지은 ‘법화경현의’와 ‘법화경문구’를 설법했다. 1078년, “23세에 처음으로 신역 ‘화엄경’과 ‘화엄경소’ 50권을 강의하고, 20년 동안 강연은 비단을 뒤집어 삼백 권의 꽃다운 경전 꿰뚫었네”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098년 봄에는 “내가 … 요즘 점차 심해져서, 경전을 보고 읽는데 매번 가슴에 통증을 느껴 학업이 황폐해졌다”라며, 요즈음과 같은 심근경색증(心痛)을 앓았다고 ‘대각국사문집’에 기록됐다. 스스로 열반을 예언하듯이 1097년 2월 의천은 ‘대각국사문집’ <국청사를 새로 짓고 강의를 열며>라는 글에서 “옛사람들의 말에 ‘간절히 생각하면 돌아갈 곳이 있고, 몸을 잊으면 하는 바를 얻으니, 죽는 날이 오히려 사는 때’라고 하였다. 옛날에 그 말을 듣고 오늘 그 사실을 보니, … 지극하여 손으로 춤춘들 어찌 끝이 있으랴! 감격하고 경사스러우니 바라건대, 성현들은 살피소서.” 평소 의천대사가 말한 대로 “진리의 수레를 다시 이 세상에 굴리고, 불법의 광명이 천년토록 거듭 비치며,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새긴 비문은 영통사 마당에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영통사, 대각국사의 열반지
11~12세기 대각국사 의천에게 영통사는 수행의 첫 출발지인 동시에 마지막 회향처였다. 1065년 5월 14일 출가하여 영통사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4개월간의 송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개경 흥왕사와 흥원사, 합천 해인사, 국청사 등에 머물다가 1101년 10월 5일(음력) 개경 총지사에서 입적했다. 세수는 47세이고, 승랍은 36세였다. 국사의 법구는 유언에 따라 제자들이 이튿날 4km 떨어진 영통사로 옮겨서 16일에 다비를 마치고, 고이 열반에 들었다.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우세 승통의 사리탑은 1998년부터 99년까지 4단계에 걸쳐 영통사지 일대 3만㎡를 발굴조사하면서 절이 폐사된 지 400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대각국사의 영골 사리는 전하지 않는다.
 
국사의 ‘흥왕사 묘지명’과 그의 제자 징엄의 묘지석은 흥왕사 터에서 모두 발견됐다. 무덤 속의 역사 코드라 불리는 <흥왕사 묘지명>은 입적 후, 한 달이 지난 1101년 11월 4일 만든 것으로 고려의 문신 박호가 짓고, 고세칭이 해서로 썼다. 이 묘지명은 1948년 겨울, 국립박물관에서 흥왕사지 발굴 조사할 때 반출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국보유물 제155호 ‘대화엄영통사대각국사비’ 뒷면에는 “1101년 10월 16일 다비장에서 다비를 마치고, 수습된 유골은 동쪽 석실에 안치됐다. 이때 묘지석도 함께 묻는다. 2년(1103년) 뒤 영통사 서북쪽 방면에는 대각국사의 사당으로 쓰일 경선원이 완공되고, 전각의 편액은 숙종이 선왕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곳이란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 국사의 부도를 만들어 동쪽 석실에 모셨던 유골을 이장”하였으며, 이 무렵 윤관이 왕의 조서를 받들어 지은 국사의 탑비도 이 자리에 함께 건립했다. 8년이 지난 후, 지세가 좋지 않다는 건의로 1112년 12월 지금의 남쪽에 비를 다시 세웠다. 두 개의 비가 세워진 것은 대각국사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종파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영통사 비는 왕명으로 화엄종파에서 1125년 7월 경오일에 세운 것으로 김부식이 짖고, 오언후가 해서로 썼다. 경북 칠곡 선봉사의 비는 1137년 8월 천태종파에서 고려 천태종 시조임을 밝히기 위해 세운 것으로 한림학사 임존이 짓고, 국사의 법제자 덕린이 해서체로 썼다.
 
대각국사의 저승가람, 경선원
‘흥왕사 묘지명’과 영통사 ‘대각국사비’에 새겨진 <대각국사의 묘실과 비명을 세운 사적기>는 박호가 비문을 지었는데, 이를 통해 경선원을 엿볼 수 있다. 이때 동북쪽 묘실구역과 서북쪽의 부도 즉, 사리탑 구역이 별도 구분된 것을 알 수 있다. 2007년 10월 30일 복원과정에서는 경선원을 부도 구역으로 확정하여 복원했다.
 
국사가 입적하고 한 달 후에 건립된 경선원은 동북쪽의 묘실과 제당 3간을 묘의 남쪽 영통사에 건축하였는데, 중대사인 득엄과 법선 등 50명이 작업하고, 또 영통사 450명도 공사에 동참했다. 1113년 11월에 낙성한 경선원은 예종이 국사의 초상을 보았던 것처럼 진영을 처음 봉안했다. 오늘날 경선원 마당에는 사리탑이 서 있고, 본당에는 대한불교천태종에서 기증한 국사의 진영과 회랑에는 발굴하고 복원할 때 나온 여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한편, 경선원의 서쪽 언덕에는 높이 10m에 지름 12m의 거대한 호경바위가 두 동강 난 채 서 있다.
 
11살의 어린왕자 의천이 출가하여 20년간 머물던 영통사는 흥왕사에서 장경을 만들고, 국청사에서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후, 1101년 10월 16일 영통사 다비장에서 다비를 끝으로, 46살의 생애를 마친 의천이 불후의 불적(佛蹟)을 펼친 곳이다.
6면-영통사 비 _20151103_이지범2.jpg
새로 복원된 영통사와 대각국사비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