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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심을 평등심으로

밀교신문   
입력 : 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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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역시 봄이 오는 둥하더니 바로 자취를 감추고 무더운 여름이 왔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겨울의 찬바람을 겪고 난 후 따스한 햇살로 몸을 녹이면서 한해 살림살이를 느긋하게 시작하던 봄이 어느 새 우리 곁에서 사라져버렸다고요. 봄만 그러한가요? 폭염에 시달린 몸과 마음을 느긋하게 다스리곤 했던 가을이란 계절도 마찬가지로 오는 듯 바로 사라집니다. 우리가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유정물 그리고 무정물로 존재하는 것들에 분별심을 두어 계속 차별한 결과입니다.

 

문득 내 고향의 옛 자연이 생각납니다. 그중에서도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여름날의 맑은 개천이 먼저 머리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맘때쯤이면 어린 아이들은 시간만 나면 개천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즐기고 놀 거리라곤 흔치 않은 시절이었거든요. 맑은 물에 첨벙 뛰어들어 더운 몸을 식히는 만큼 재미있는 일이 또 없었습니다. 멱을 감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남의 밭 감자를 캐다가 구워(감자 서리) 먹기도 했고요, 물고기를 잡아 불에 구워먹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 투도 살생이 십악(十惡)의 하나라는 진리를 크게 인지하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반두나 낚싯대가 다 무엇입니까? 그런 장비를 가지고 있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더러는 손으로 잡기도 했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의 것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개천 변에 무수하게 자라고 있는 여뀌(우리 고향에서는 약국때라 했다)였습니다. 여뀌는 한해살이풀로서 여름에서 가을까지 물가에 자생하는 소위 잡초입니다. 매운 성분을 가지고 있는 이 풀을 한 움큼 잘라서 바위 위에 놓고 돌로 잘게 찧으면 탁한 녹즙이 나오게 되는데, 물이 흐르다 소를 이루어 잔잔한 곳에 이 즙을 뿌리면 오래지 않아 물고기들이 비틀거리면서 둥둥 떠오릅니다. 여뀌의 매운 성분에 잠시 정신을 잃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바삐 건져내면 운이 좋을 경우 바가지 한 가득 잡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동(河童)들에게는 어찌 쓸모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어른들은 여뀌를 그저 쓸모없는 잡초라고 여기어 아주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나마 논밭에서는 군락을 이루지 않으니 애써 뽑으려 애쓰지 않았지만, 하등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풀로 취급 받지 못하던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 도움도 못주는 잡초로만 여겼던 여뀌가 최근 새 모습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여뀌 추출물에서 염증을 제어하는 약효와 함께 항산화 작용을 하는 성분이 발견되어 의약계의 큰 기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 고전인 <동의보감>에서도 이미 여뀌가 혈액순환을 개선하는 성분이 있다고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뀌는 더 이상 인간에게 무익한 잡초가 아니라 매우 유용한 풀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 잡초라고 이름 지어 차별하는 것은 사람일 뿐, 세상의 모든 동식물들이 저마다 살아갈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연초에 세상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것이 변종 바이러스였다면,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또 다른 혼돈의 세상으로 몰아넣은 것은 미국에서 발생한 흑인 사망사건일 것입니다. 이 사건이 그저 한 경찰관의 독단적인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러운 차별심인 백인우월주의에 의해 그간 흑인들이 죄 없이, 또는 죄가 있다하더라도 체포과정에서의 과잉진압으로 너무나 많이 희생되어 왔습니다. 미국만이 아닙니다. 프랑스에서도 영국에서도 그래왔습니다. 흑인들이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에 제 발로 들어간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가난했지만 평화롭게 살고 있는 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데려온 노예들의 후손들이 대부분입니다. 일제가 강제 징용으로 데려간 조선인들의 후예인 재일동포들이 일본에서 차별받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과 프랑스가 영국이 강대국으로서 자리하고 있는 저변에는 그들이 끌고 와서 거친 일을 시킨 흑인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백인에 의해 숱한 차별을 받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차별하는 나라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습니다. 동남아시아와 중동 등 여러 나라에서 온 근로자들이 차별받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뉴스에서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험한 일을 기피하는 한국인들을 대신하고 있는 그들이 왜 차별을 받아야 할까요? 그저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며,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며 피부색이 검다는 분별적 이유에 불과합니다. 같은 우리 민족이라 해서 다를까요? 아직도 우리 곁에는 남녀 간 차별, 지역 간 차별, 세대 간 차별, 빈부 간 차별, 이념 간 차별 등등 숱한 차별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이런 차별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기인한 것일까요? 우리의 가당찮은 분별심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잡초란 없듯이, 세상에 차별 받아야 할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어찌 잘난 사람이 따로 있고 못난 사람이 따로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런 생각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아시아인이든, 배운 것이 많든 적든, 돈이 많든 적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개로 말하면 자성自性이요, 서로 연결 지으면 법성法性으로서, 법신세계에서는 서로 분별하여 차별할 수 없습니다. 법신세계의 모든 존재는 독립되어 있는 것 같지만 서로 씨줄날줄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형상이 달라도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분별심을 일으키는 원인은 딱 하나입니다. 자신만이 독립되어 있다는 착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착각이 분별심을 일으켜 차별함으로써 세상을 어지럽히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자신만 독립되어 있다는 그 착각을 고칠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처방은 딱 하나, 평등심을 가지고 실천하는 길 뿐입니다. 분별심을 평등심으로 바꾸어야만 세상이 달라집니다. 차별의 역사가 아무리 장구해도 많은 사람들이 평등심만 실천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불평등의 지수가 높아질수록 세상은 더욱 휘청거리게 됩니다. 불평등을 평등으로 수렴시키자는 까닭은 우리 모두가 안전해지자는 데에 있습니다. 평등으로 가는 길을 공동체에 대한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거나 브라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이미 기원전 5백년 경에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차별이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기만 할까요? 아는 사람은 많지만 실천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성현들의 충고가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모든 진리는 그저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소통하면서 사는 것이 부처님의 진리를 따르는 불자의 올바른 삶입니다.

 

회당대종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십니다.

 

부부는 평등하게 나아가야 한다. 몸과 마음, 사원과 임원, 외도(外道)와 남녀의 행실 등도 평등하게 해야 한다. 평등으로 나아갈 때는 물처럼 내려가고 계급을 주로 할 때는 산처럼 올라간다.”<실행론 4,3,12>

 

덕일 정사/무애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