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칠존이야기-36. 금강쇄보살

밀교신문   
입력 : 2019-11-11 
+ -

중생의 마음을 불도에 매어두는 보살

20191004094259_9428c4737f0126d2e5a1318db18bee1c_9ie8.jpg

 
반야심경은 그 첫머리에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물질과 정신, 즉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텅 비어있음을 보고 모든 괴로움을 벗어남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인간의 다섯 가지 감관으로 알아채는 모든 것들이나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된다. 270자로 구성된 짧은 경전이면서 반야심경에는 무(無)자가 21번, 공(空)이 7번 등장할 만큼 계속되는 부정이 진행된다. 그러다가 경전의 후반부에서는 부정의 연속이 그치고 반전이 일어난다. 이 크게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에 대한 찬탄과 함께 진언으로 끝맺고 있다. 공한 세상의 이치를 비추어보고 생노병사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진언을 염송하도록 일러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하기에 집착을 벗어놓게 하되 그 방법으로써 수행을 통해 체험할 수 있도록 마무리짓고 있다.
 
마무리를 수행으로 귀결짓는 스타일은 대부분의 불교 경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경전의 끝을 장식하는 여러 가지 서술 가운데에 단연 많이 보이는 글귀에 신수봉행(信受奉行)이 있다. 경전에서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잘 이해하였으면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할 것을 강조하며 끝맺는다. 그다음은 경전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무한한 수행이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다. 우리가 경전을 단순히 읽기만 하였다면 잠깐의 감동으로 남을 수 있을지언정 우리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우리가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할 때에라야 그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 구현되고 그에 따른 이로움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시킨 뒤에, 그 이해를 통하여 얻게 된 환희한 마음이 실천으로 전개되도록 유도한다. 경전의 구조가 대부분 믿음[信]으로 들어가 그 가르침을 잘 이해[解]하여 환희한 마음으로 직접 실천[行]하며, 실천함에 따라 단계적인 증득[證]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음은 경전 성립의 목적이 중생들로 하여금 실천을 일으키도록 권유함에 있는 것에 말미암는다. 경전의 규모가 큰 경우에는 짧은 문구가 아니라 아예 품의 제목을 ‘촉루품’, ‘부촉품’, ‘유통분’ 등으로 하여 받들어 행해야 할 내용에 대한 구체적 서술뿐만 아니라 이 가르침을 널리 펴도록 권하고 있다.
 
그런데 경전에서 누누이 설했건만 실천의 노력이 약한 중생들이 있을 수 있다. 마음은 불도에 두면서 현실의 삶에서 정진과는 거리가 멀어진 사람들이 있다. 붙잡아두면 호시탐탐 탈출할 방법만을 모색하는 동물처럼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불도를 향한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자물쇠처럼 방편으로나마 꼭꼭 잡아맬 필요가 있다.
 
자물쇠란 문 따위의 여닫는 물건으로 잠그는 장치를 가리킨다. 견고하게 붙들어 매어서 문이나 금고 등을 잠그는 데 사용되는 도구로서 안에 있는 것을 굳게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현대적인 자물쇠가 만들어지기 이전 옛날에는 쇠사슬 등으로 묶어서 동물 등이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칭하여 쇄(鎖), 즉 자물쇠라고 불렀다.
 
자물쇠로 견고하게 묶인 데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몸이 아닌 마음이 묶여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어딘가에 마음이 끌려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 우리는 마음을 빼앗겼다, 또는 사로잡혔다고 표현한다. 넋을 잃고 바라보거나 몰입해 들어갈 때,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기는 어렵다. 불법의 깊은 뜻을 알아 환희심이 벅차 더 이상 다른 어떠한 가르침도 들어오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불법에 사로잡혀 꽁꽁 묶인 것이다. 불법에 들어오기 전에 가졌던 수많은 속박은 반야심경에서 설하는 무수한 무(無)자와 공(空)자로써 부수고 진리의 가르침에 굳게 머무르며 그 상태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진언을 염송하게 되는 것이다. 또는 중생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다양한 법문을 믿고 이해한 뒤에 신수봉행해 나가는 것이다. 다시 그 이해가 견고한 지혜가 되어 이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중생으로 하여금 세속의 번뇌를 벗어나 불법에 몰입해 들어가 안주하면서 널리 이롭게 하는 행은 깊은 감동을 통해 자물쇠에 묶인 것처럼 견고한 결박으로부터 전개된다.
이렇듯 중생의 마음을 견고하게 붙들어매는 역할을 금강계만다라 37존 가운데 금강쇄보살이 담당하고 있다.
 
금강쇄보살은 ‘금강쇄천’, ‘구쇄박’이라고도 하며 중생을 확실하게 붙잡는 공덕을 상징한다. 그래서 밀호를 견지금강이라 한다. 붙잡은 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금강정경>에서 금강쇄보살의 출생을 밝힌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일체여래의 삼매쇄대사의 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삼마지에 들어가, 곧 일체여래삼매를 자심으로부터 낸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자마자 구덕 지금강자는 일체여래의 견고한 삼매의 인을 이루고 출현하고 나서, 금강쇄보살의 몸을 출생하고 세존금강마니보봉누각의 법문의 월륜 가운데에 이치답게 머무르며 일체여래께 오묘하게 결박하는 형상을 짓는다.”
 
대일여래가 일체중생을 이익케하기 위하여 삼매쇄대사삼매, 즉 쇄박삼매에 머물러 이 보살을 유출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매어 둔 것이다. 따라서 금강쇄는 자물쇠를 가지고 사람들을 불도에 매어둠을 상징한다. 이 보살은 사섭법 가운데 이행(利行)의 덕에 상당한다.
 
자비의 서원으로 모든 악취문을 걸어 잠그고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에서 물러서지 않도록 이로움을 주려고 하는 금강쇄보살의 삼마지를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견고한 금강쇄계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견고한 금강쇄계삼마지지로부터 금강쇄계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춘다. 일체여래의 성자들을 금강계도량에 들어가게 하고 나서 대비서원의 결박에 머물며, 내지 모든 중생들이 갖고 있는 외도의 온갖 견해를 부수고, 위없는 보리에서 물러서지 않는 견고하고 두려움 없는 큰 성에 머물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쇄계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지혜의 집을 지키며 서쪽문의 월륜에 머문다.”
 
이처럼 금강쇄보살은 대비로써 중생을 보리도량에 견고하게 결박해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나라연이 견고한 힘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금강정경>에서는 ‘잘 붙잡는 자’라 하고 <삼십칠존례>에서는 ‘견고하게 하는 지혜’라 한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이 보살의 관상과 인계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다시 다음에 행자는 이 삼매로부터 일어나 정북방의 금강쇄보살의 관문을 관해야 한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나는 금강쇄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금강쇄인을 결하자마자 행자로서 훌륭히 가르침의 법을 베풀게된다. 손에 인을 결하는데 먼저 좌우의 엄지, 검지로 서로 구부리는 것을 마치 쇠로 만든 자물쇠처럼 하고, 좌우의 나머지 손가락 모두로 주먹을 쥐라. 이것은 금강쇄인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금강쇄보살임을 자각함에 의해 이미 들어온 중생을 깨달음의 성, 정진해 나아가는 불도수행에 단단히 매어둘 수 있다. <약출염송경>에서도 금강구쇄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묶어서 중생들을 진리에 머물게 한다고 그 인계의 공능을 설한다. 또한 자물쇠모양의 금강구쇄인을 결함으로써 본존으로 하여금 견고하게 머물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성신회의 모습은 옅은 황색으로서 왼손으로 권을 하고 허리에 붙이고, 오른손으로는 굵은 쇠사슬을 쥐고 있다. 이 인상은 금강쇄의 법에 상응하는 까닭에 곧 일체의 묶음을 감당하는 상이다. 공양회의 삼매야형은 견고한 결박을 의미하는 연꽃 위의 사슬이다. 이 보살의 진언을 송하면 이미 들어온 중생을 깨달음의 성에 붙들어매어 번뇌장과 소지장을 단멸함을 나타낸다.

5면-금강쇄보살1.jpg

김영덕 교수/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