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칠존이야기-32. 금강등보살

밀교신문   
입력 : 201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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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광명을 공양하는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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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도 가운데 널리 알려진 ‘빈자의 일등(貧者一燈)’이라는 불교설화가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아사세왕의 초청을 받아 왕궁에서 설법을 하고 밤이 깊어 기원정사로 돌아가는 길을 밝히고자 왕은 대궐에서 절까지 수만 개의 등불을 공양했다. 이때 한 가난한 노파가 거리에서 구걸한 돈으로 등불 한 개를 사서 부처님께 공양을 했다. 이 한 개의 등불은 왕이 공양한 수만 개의 등불보다 밝았고 새벽이 되어 왕의 등불은 다 꺼졌으나 오직 노파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설화는 온 정성을 다해 등불을 밝힌 참다운 공양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자주 반복되어 설해진다.

 

그 등불은 어두운 밤 동안 그 등불을 보는 모든 이의 눈동자에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 바라볼 때에 한 사람의 눈동자에 비추인 등불은 다른 이가 보고, 다른 이의 눈동자에 비친 등불은 또 다른 이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인 사람의 숫자만큼 많은 등불이 동시에 빛났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 거울처럼 비추는 눈동자는 서로서로 빛나면서 끊임없는 상호비춤을 반복한다. 그래서 서로서로 다른 이의 눈동자를 볼 때에 그 속에서 빛나는 또 다른 눈동자에 비친 무수한 등불까지 보게되면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은하수처럼 모든 존재가 등불이 되어 광명으로 휩싸인 장관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노파가 공양한 하나의 등불이 켜져서 뭇 중생들에게 스스로가 광명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던 것이다. 그 등불을 따르면 밝게 빛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하는 본래의 모습이다. 자신을 밝히고 진리를 밝혀서 무명의 흑암을 지워나가는 행자의 모습이다. 자신을 밝히는 것이 진리를 밝히는 것이며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등불을 공양함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으며 <금강정경>에서는 이러한 등공양의 공능을 의인화하여 ‘금강연등천녀’라 하며 또한 금강등보살이라고 한다. 등불은 두루 비추기에 밀호를 보조(普照)금강이라 한다. <금강정경>에 의하면 금강등보살은 서방의 관자재왕여래가 대일여래에 공양하기 위해 자신이 증득한 지혜삼매인 등공양삼매에 들어가서 이 보살을 유출한 것이다.

 

“이때에 세존관자재왕여래는 세존대비로자나여래의 공양사업에 보답하기 위해서 곧 일체여래의 등공양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삼마지에 드신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자마자 곧 일체등공양의 장엄을 나타내어 금강등대명비의 상을 출현하고 세존의 금강마니보봉누각의 모서리 왼쪽 월륜 가운데에 머문다.”

 

등공양이란 다름아닌 등불을 밝혀서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우주를 밝히고 무명의 어두움을 지워나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등은 부처의 지혜로부터 퍼져나가는 등이다.

 

<성위경>에는 비로자나불의 금강등명운해삼마지지로부터 금강등명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어 일체중생의 무명주지를 깨뜨린다고 설한다. 여기에서는 비추어지는 장소가 시방세계로 되어있지만 <금강정경>에서는 이 보살에 대해 삼계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번뇌즉보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삼계의 현재 모습 그대로가 무명이 아닌 지혜의 등이기 때문에 삼계로써 등공양을 표현한 것이다. 공양된 등은 일체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의 등불이므로, <삼십칠존례>에서 상보조(常普照)라 하여 항상 서로 비춘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로 비춘다는 것은 연기적인 입장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러한 상호영향관계를 통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치 두 개의 거울이 있을 때에 하나의 거울은 다른 거울을 비추면서 동시에 다른 거울에 비추어지듯이 모든 존재는 서로서로 비추는 관계에 있다. 거울이 무수하게 많을 때에는 그 모든 거울이 서로서로 중첩해서 비추는 것이 무한하다. 그리고 무한한 상호비춤의 관계는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연결한다. 비록 그 가운데 깨진 거울과 물들어서 잘 비추지 못하는 거울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울간의 상호작용에서 떨어져 있지는 않다. 이와 같이 삼계의 모든 존재는 서로서로 비추는 거울과 같다. 다시 말하면 나는 너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존재하고 너는 나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존재하게 된다. 상호작용하지 않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기에 상호작용이 바로 존재의 참모습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설의 공식에서 이것과 저것은 영향을 줌으로써 이것과 저것으로 있을 수 있다.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고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는 독존자는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영향없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란 바로 작용에서 정지된 한 순간을 포착한 것에 불과하다. 마치 흐르는 강물을 우리 뇌리에 간직하거나 사진으로 찍어서 ‘이것이 저 강이다’라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기억이나 사진으로 남은 강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움직이는 것을 정지시켰을 때에 성립한다. 움직인다는 것은 끊임없이 다른 것들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인데 그 흐름을 정지시켰을 때에 다른 것과 관계성을 상실한

 

단독의 존재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이해를 통해서 사물과 사물 사이를 갈라놓는다. 여기에서 나와 너,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생겨나며, 대립과 갈등이 발생한다. 원래 상호작용 자체가 모든 존재의 실상인데 우리는 찢어지고 떨어져나간 파편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이 가운데에서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사랑과 미움 등의 대립개념이 성립하며, 한 번 생겨난 감정의 에너지 자체도 상호작용의 결과이기에 끊임없이 다른 힘을 불러들여서 반복적으로 전개된다. 그리하여 수행을 통해서 그 힘을 잃기 전까지 우리의 삶을 온통 휘어잡아 빠져나가기 어렵게 한다. 이렇게 괴로움이 반복되는 상황을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설파하셨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무상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먼저 등불을 밝게 비추어서 모든 이들이 보게 하고 ‘그대들 모두가 나와 다름없이 밝게 빛나는 광명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작용이 바로 금강등보살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존재할 수 있게끔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 그 자체뿐이라는 것을 등불이라는 상호공양의 형식으로써 알려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밝게 빛나는 광명이며, 또한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금강등보살의 광명은 낱낱의 거울에 두루 닿아서 온 우주를 비춘다.

 

이것을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는 금강등보살이다. 나는 지금 다함없는 등불을 밝혀서 시방무량세계의 허공 가운데에 가득 채워서 시방의 설할 수 없고, 설할 수 없도록 한량없고 가이 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께 공양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금강권을 결한다. 양손을 서로 합하여 심장 앞에 가까이 하라. 이것을 금강등인이라 이름한다. 이 등인을 결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 있는가. 현재의 몸으로 여래의 청정한 다섯 가지 눈을 획득하리라.”

 

이와 같이 금강등보살은 아미타불이 증장된 수용지혜를 대비로자나불에게 공양하는 모습으로서, 언제나 지혜의 등불로서 온갖 어두움을 깨뜨리고, 또한 방편으로써 중생에게 수여하여 무량한 광명의 구름과 바다같은 공양을 일으키는 묘용이 있다. 또한 중생에게 청정한 지혜로써 자비를 베푸는 보살이며, 중생이 그 가르침을 수용한 뒤 여래의

 

청정한 다섯 가지 눈을 획득하여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모든 것의 참된 모습을 보고 스스로 지혜를 밝혀 다른 이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돕는 보살이다. 금강등보살은 법성의 실상을 관조하고 자성청정을 증득하는 광명삼매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능을 상징하기 위하여 성신회의 상은 백색으로 양손에 등 그릇을 가지고 있으며, 공양회의 상은 연화 위에 등을 세워 양손으로 들고 있다. 다른 회의 존상이나 삼매야형도 모두 연꽃 위의 등으로써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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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교수/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