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칠존이야기-31. 금강화보살

밀교신문   
입력 : 2019-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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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꽃을 공양하는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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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는지 그 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불교설화에 따르면 불교와 연꽃과의 인연은 아기부처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보요경>에 의하면 부처님이 탄생하였을 때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향수로 부처님의 몸을 씻고 지하에서 연꽃이 솟아 나와 그 발을 받쳤다고 한다. 또한 아기부처님이 맑은 눈동자로 사방을 돌아보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을 때에 그 걸음마다 아름답고 깨끗한 연꽃이 피어났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부처님의 거룩한 탄생을 기리기 위하여 아름답게 묘사한 설화이지만 이 설화에 담긴 내용은 깊은 상징성을 지닌다. 부처님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누구든 수행하면 청정한 본성을 드러낼 수 있음을 상징하며,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것은 육도윤회를 초월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발자국을 디딜 때에 연꽃이 피어났다고 하는 것은 꽃이 지니고 있는 출생이라는 개념이 승화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꽃의 목적은 씨앗을 맺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개체를 다음 세대에 이어주기 위해서 꽃이 피어나기에 꽃에는 생성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꽃을 생명의 창조로 여기는 전통은 인도에서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인도의 고대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서는 천지창조의 신화로서 연꽃이 묘사된다. 즉 비슈누신이 아난타용왕 위에 누워서 명상에 잠겨있었는데, 그 명상에서 깨어난 비슈누의 배꼽에서 황금빛의 연꽃이 피어났다. 그 위에 범천이 앉아 있으며, 이 범천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즉 창조의 신 브라흐마가 광명의 신 비슈누의 배꼽에서 피어오른 연꽃 속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연꽃이 빛과 생명의 상징, 신성한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되어 인더스 문화에서 어머니신은 머리에 연꽃을 꽂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어머니가 상징하는 출생의 의미를 연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신화에서 연꽃이 가지는 출생이라는 의미에 육신의 출생만을 내포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 언어 가운데에서도 악한 사람이 개과천선할 때에 ‘새롭게 태어난다’고 표현하거나, 새롭게 안목이 트일 때에 ‘새 삶을 얻었다’고 하는 것처럼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것이 시작하는 것은 정신적인 출생으로 간주한다.
 
세친의 <법화경론>에서는 연꽃에 대하여 ‘물에서 벗어남과 꽃이 피어남’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진흙탕물에서 벗어남은 끝이며, 꽃이 피어남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연꽃이 오염되지 않고 진흙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은 혼탁함 가운데 청정이 생하는 것으로서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을 획득하는 정신적 출생을 상징하는 것이다.
 
원래 불교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무상하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을 기본 가르침으로 하기에 생과 멸은 부정된다. 불교경전 곳곳에 보이는 생과 관련된 서술에서는 육도를 윤회하는 생이 환상이나 아지랑이와 같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기부처님이 육도를 상징하는 여섯 걸음을 넘어서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데에는 부처님의 탄생에 육체적 탄생뿐만 아니라 윤회를 초월한 성자로써의 태어남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겹쳐진다.
 
일반적인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이 부정되어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하는 불교에서 오직 유일하게 인정되는 마지막은 윤회의 끝, 즉 중생으로서 더이상 생을 받지 않음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멸을 초월한 그 위의 상태는 다시 생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여섯 걸음을 지나 일곱 번째에 내딛은 발걸음은 육도윤회를 벗어난 새로운 시작이기에 생이라 하는 것이다. 생사를 초월한 성자로서 펼쳐지는 거룩한 시작이 여기에 있다. 
 
석가모니부처님 이후에도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출생을 의미하는 연꽃에 앉는 것은 중생들의 윤회하는 생멸을 끝내고 새롭게 전개되는 공덕생으로서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다.
 
밀교의 만다라에서도 연꽃이 지닌 출생의 상징성을 강조한 것이 <대일경>에 근거하여 건립되는 대비태장생만다라이다.
 
<대일경소>에서는 ‘세간 사람들이 연꽃을 가지고 길상하고 청정하다고 하며 중생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처럼 지금 비밀한 가르침 가운데에도 역시 대비태장의 묘법연화로써 가장 깊고 비밀한 길상을 삼으니 모든 가지법문의 몸이 이 연화대에 앉는다’고 설하며, ‘부사의한 법계를 연화대(蓮花臺)로 비유할 수 있고 갖가지의 방편도를 연꽃의 잎에 비유한다.
 
이 연화대는 실상자연의 지혜이다. 연꽃잎은 바로 대비방편이며, 꽃술은 모든 삼매문·다라니문·6바라밀 등으로서 이 낱낱의 꽃술로부터 가지신력으로 삼중만다라 가운데의 한 종류의 장엄권속을 출생한다. 정방향의 네 잎은 여래의 네 지혜이고 모퉁이의 네 잎은 여래의 네 가지 행이다. 여기에 의거하여 나타나 여덟 종류의 선지식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여덟 개의 연꽃잎에 네 부처와 네 보살이 자리한 중대팔엽원이 성립되며, 이는 바로 연꽃이 지닌 출생이라는 의미가 불심을 열어 펼친다는 의미로 전화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만다라의 세계에 들어오는 행자는 안으로 대비의 공덕을 갖추고 밖으로 모든 부처님의 호지를 받으므로, 생사에 처하여도 물들지 않는 새로운 생을 받게 된다. 연꽃에서 출생한 불보살에 의해서 거듭 중생들이 연꽃과 같은 청정한 보살의 생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금강정경>에서는 이러한 연꽃의 의미를 의인화하여 금강화보살이라 부른다. 금강화보살은 금강과 같은 연꽃을 사방에 뿌리는 금강산화천녀, 또는 꽃 그 자체를 미화하여 금강묘화보살이라고도 한다. 꽃은 봄에 피기에 금강춘(金剛春)이라고도 하며 밀호는 묘색금강이다. <금강정경>에 의하면 금강화보살은 남방 보생여래가 대일여래를 공양하기 위해 보장엄공양삼매에 들어가서 이 보살을 유출한 것이다. 즉 만개한 연꽃을 손에 들고 대일여래에 공양함을 의인화하였다.
 
<이취경의술>에 ‘능히 보리로써 깨달음의 꽃을 피워 구름과 바다처럼 공양한다. 또한 방편을 중생에게 수여하여 공덕의 이익을 행하게 한다’고 하는 것처럼 보생불의 시현인 오묘한 연꽃을 가지고 비로자나부처님께 공양올리며, 다시 방향을 바꾸어 세상의 모든 중생들에게 공양되는 꽃이다. 이로써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깨달음이라는 덕성을 일깨우고 이를 장엄하게 된다.
 
<성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구름이나 바다처럼 광대한 금강의 깨달음이라는 꽃의 삼마지로부터 금강각화광명을 유출한다’고 하였는데 그 금강의 깨달음이라는 꽃은 중생의 미혹을 깨뜨려 깨달음의 심화(心花)를 꽃피우는 것으로 결국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이 공양의 근본적인 의미가 된다.
 
이처럼 금강화보살은 보생불이 증장시킨 보리심의 장엄상을 비로자나여래에게 공양하는 모습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숨어있는 깨달음의 덕성을 찾아내게 하고 그 가치를 증장시켜 활짝 꽃피우도록 돕는 온갖 공양의 행을 상징한다. 꽃이란 만행이 청정히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기에, 꽃으로 공양함이란 깨달음으로 향하는 모든 행위에 그 가치를
 
새롭게 부여하여 승화시키고자 하는 공덕행이다. 더 나아가 보생불이 일체 수행에 대해 가치와 공덕성을 증진시키고 다시 이것을 일체에게 회향하는 모습이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삼십칠존례>에서는 훌륭한 장엄이라는 뜻의 승장엄(勝莊嚴)이라 한다. 
 
성신회의 상은 옅은 황색으로 연꽃봉우리를 얹은 소반을 오른손으로 들고 왼손으로 이것을 받치고 있다. 이 인상은 금강의 오묘한 연꽃의 법에 상응하여 세간에서 경애하는 일을 행하는 상이며, 금강화보살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장엄을 획득한다고 한다. 금강화보살은 청정한 보리심의 무진장엄을 그 내증으로 삼으므로 이 진언을 송함에 따라 청정보리심 장엄의 덕을 성취하고 각화해운삼마지(覺華雲海三摩地)에 들어가 머문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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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교수/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