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십칠존 이야기- 29.금강무보살

밀교신문   
입력 :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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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공양하는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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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삼법인(三法印)은 세상 모든 것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일체는 항상 하지 않고 괴로움이며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세 가지이다. 여기에서 첫 번째의 항상 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일체가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정된 실체로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물질적이나 정신적이든 일체는 언제나 변화한다. 움직이든지 다른 내용으로 바뀌든지 끊임없는 인연생기가 전개되며, 이러한 연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천년만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 같은 높은 산일지라도 지구라는 별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작은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초속 29.8km의 속도로 돌아 하루에만 258만km를 공전한다. 그것도 하루에 한 바퀴씩 자전하면서 가는 거리이다. 자전의 속도는 지구의 둘레가 가장 넓은 적도에서 1초에 약 456m라고 한다. 지구가 태양주위에 머물 수 있는 조건은 엄청난 공전 속도와 끊임없는 자전의 움직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 태양계를 벗어날 것이고 느린 속도로 움직이면 태양에 빨려 들어가 불타 없어질 것이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지구로 하여금 태양 주위에 머물 수 있게 한다. 서로 끌어당기면서 움직이는 것이 존재의 조건인 것이다.
 
지구라는 행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구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끊임없는 움직임이 그 존재를 유지하게 한다. 어떤 존재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자리를 지킨다 해도 지구의 중력과 상호작용하면서 지구와 함께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속도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나 사물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주고받는 움직임 그 자체이다.
 
그러나 분별로 쌓아 올린 우리들의 인식은 그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한다. 인간은 존재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 존재를 고정된 형상으로 알아채고 그때 존재라는 인식을 성립시킨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우리가 보았을 때 이미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지구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우리의 인식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모든 존재도 생성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가지만 고정된 인식에 습관 되어온 우리들의 사고는 그 움직임 가운데 임시의 가상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대상에 대해 분별할 수 없다. 그래서 높은 산은 천년만년 그 자리에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는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실제로는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빠른 움직임이 있기에 그들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존재와 존재 간에 서로 영향을 주는 상호작용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존재는 다른 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으면 주어야 하고 주었으면 받아야 한다. 다른 존재와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 움직이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사랑하고 미워하며, 뺏으려 하거나 베풀려는 것, 우리 중생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따라 움직이는 그 몸짓은 모두가 상호작용의 원칙에 따르며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중생들은 상호작용에서 이로움을 느낄 때 기뻐하고 손실을 입었다고 느낄 때 슬퍼하지만, 전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로움이나 손실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움직임은 하나라는 전체에서 볼 때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는 작은 세포들의 어울림이다. 중생들에게는 아름답게 보이고 어떨 때는 추하게도 보이지만 그 움직임의 근원적인 표현은 춤과 같이 아름다운 몸짓이다.
 
보통 무용수가 가락에 맞추거나 절로 흥겨워서 팔다리나 몸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동작을 춤이라 한다. 그러나 누구나 가슴 벅찬 감동을 받았을 때, 흥겨운 음악에 도취되었을 때에 일어나는 흥겹게 몸을 움직인다면 그 자체가 모두 춤이 된다. 자아의 경계가 모두 사라지고 한없이 자유로워지는 상태가 바로 춤의 상태이다. 이렇게 세상 모든 존재가 작은 세포처럼 어울리는 광경을 아름답게 보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온 우주는 무용수가 추는 춤 못지않게 아름다운 춤으로 드러날 것이다.
 
온 우주를 춤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춤을 추어서 우주 대생명이 걸림 없이 자재하게 생명 활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의인화하여 금강계만다라에서는 금강무(金剛舞)보살로 표현한다.
 
금강무보살은 밀호를 신통금강, 묘통금강(妙通金剛)이라 하며, ‘금강정경’에 의하면 일체여래의 춤이라는 공양의 삼매로부터 출생한다. 즉, 불공성취불의 공양에 보답하기 위해서 비로자나여래가 무공양삼매로부터 묘한 춤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 금강무보살이다. 비로자나여래가 일체여래무상공양의 갈마지삼매에 들어가는데, 그 갈마지는 위로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갈마지의 삼마지를 춤의 공양이라 하는 것이다.
 
금강무에서 무(舞)는 춤을 의미하는데, 춤이란 다름 아닌 신통한 몸의 놀림으로 ‘삼십칠존례’에서는 이 보살을 ‘신통업’이라 찬탄하고 있다. 대비로자나의 입장에서 모든 존재의 몸의 놀림은 신통한 활동이다. 그래서 ‘금강정경’에서는 신·구·의 활동을 비롯한 일체의 활동을 신변유희, 신통유희라 하고 있다. ‘성위경’에서는 이 보살의 삼마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법무신통유희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이 삼마지로부터 금강무의 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춘다. 일체여래께 공양하고 일체중생의 무지와 무명을 깨뜨리며, 육신통을 획득하여 자재로이 유희하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법무천녀형의 보살이 되어, 비로자나불의 동북쪽 모퉁이 월륜에 머문다.”
 
여기에서 비로자나불이 금강법무천녀를 유출한 것은 그 내용상 휘돌아 추는 춤을 의미한다. 그 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는 것처럼 틀에 박힌 고정된 것은 아니다. 돌고 뛰고 또는 느리게 움직이는 가운데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것이 몸짓을 통해 흘러나온다. 춤춘다는 것은 무아 속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상호작용해야 할 존재라면 그 작용이 이타를 위해서 전개될 때에 그 몸짓은 아름다운 춤이 된다. 이 춤은 불공성취불의 삼마지로서 신통유희 자재의 작업임을 보이고 있다. 양손을 들어 춤추는 자세를 취하며 불공성취여래의 활동성을 찬탄, 공양한다. 그 작업의 목적은 일체중생의 무지와 무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 보살이 금강계만다라 대월륜의 동북에 위치하는 것은 왕성한 교화활동을 나타내는 불공성취불과 동일한 성격임을 나타낸다.
 
중생의 무명을 깨드리는 것이야말로 무량세계의 중생과 제불보살 모두에 대한 광대한 공양이 될 수 있다. 이 공양으로 말미암아 쉼 없이 창조작업을 계속하는 불공성취불의 활동이 더욱 증장된다.
 
따라서 금강무보살은 대비로자나불이 불공성취불에게 그 창조의 활동을 찬탄하는 모습으로서 공양되는 보살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들로 하여금 대비로자나불의 신통변화상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중생들의 일체 활동도 또한 신통유희의 자재한 활동임을 알게 해 주는 춤으로 활동하는 지혜가 금강무로 표현된 것이다.
 
이 보살의 인계에 대해서는 ‘제불경계섭진실경’에 “금강권을 결하고 양팔로 춤을 추라. 이것은 바로 금강무인이다. 이 무인을 결하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바로 크게 환희하여 온갖 원을 들어주며 행자의 몸을 보호하리라”고 한다. 이 인상은 금강무보살의 휘돌아 추는 춤의 법에 상응하여 널리 모든 부처에게 공양 올리는 상이므로, 금강무의 공양하는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일체를 따르게 한다고 그 인계의 공덕이 찬탄된다. 또한 금강무의 인계를 결하면 그 인계의 가지력에 의해 속히 정진바라밀을 채운다고도 한다.
 
금강계만다라 대월륜의 동북에 위치하고 성신회의 형상은 청색이고 좌우의 손을 벌리고 다섯 손가락을 뻗치고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허리 부분에 붙여서 춤추는 자세를 하고 있다. 공양회의 상은 연화 위에 보주를 얹고 양손으로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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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교수/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