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칠존 이야기-28. 금강가보살

밀교신문   
입력 : 2019-05-14  | 수정 :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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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노래하는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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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감정은 기쁘거나 슬픈 감정이 격앙되어 흥분된 상태가 되면 외침이라는 형태로 분출된다. 외침이 반복될 때 리듬을 갖게 되며, 이것은 노래의 형식을 구성하게 된다. 이처럼 감정을 소리로 나타내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노래가 시작되었고 한다. 또는 후렴처럼 반복되는 공동작업의 맞춤소리 등을 노래의 기원이라 하기도 한다.
 
노래가 곡조를 갖추면서 소리를 내는 악기와 만나고 또 노랫말을 만난다. 처음에는 무의미했던 노랫말이 차츰 의미를 갖추어나가면서 가사가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곡조에 맞추어 노랫말이 지어지기도 하고, 노랫말에 맞추어 곡조가 생성되기도 한다. 노래에는 노랫말과 곡조가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기능이 뒤따른다. 그래서 노래를 통해 어떤 가치를 추구하게 하고 그 가치에 따른 행동규범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인류의 문명과 함께 발전한 노래는 곡조와 말소리의 형식을 갖추면서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종교적인 의례에서도 노래는 필요하고 생활의례나 교육의 측면에서도 노래는 사람들의 삶과 뗄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노래는 즐거움을 주는 기능이 있기에 연희나 오락 등에서 그 역할이 대단하였다.
 
이것은 노래의 우리말 기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중세 국어자료를 보면 그 당시에 노래는 ‘놀애’로 표기되어 있다. 놀다[遊]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짐작되는 노래는 놀이의 성격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노래는 함께 부르는 것이고 떼창하듯이 서로서로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떼창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공동체라는 인식이 생겨난다. 노래를 통해서 개인과 개인 간의 단절을 넘어 원래 하나라는 자각이 깨어나며 흥을 함께하는 것이다.
 
슬픔은 나누면 줄어들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는 것처럼 너와 나의 단절이 원래 없기에 모두가 하나라는 진리를 알게 된 환희가 노래로 드러난다. 이러한 벅찬 감동의 오묘한 노래를 금강계만다라에서는 금강가보살이라 부른다. 비로자나불과 사불 사이의 상호공양의 공덕으로 일으킨 환희를 흥겨운 노래로 부르는 보살이다. 
 
밀호를 무외금강, 묘음금강이라 하는 금강가보살은 ‘금강정경’에 의하면 일체여래의 묘가삼매(妙歌三昧)로부터 출생한다. 묘가삼매란 비로자나여래가 서방 지혜문 법부의 주인 아미타여래를 공양하기 위하여 내심에서 노래로 찬탄하는 묘법음을 일으키고자 우선 그 삼매에 들어가 이 보살을 출생한 것이다. 아미타불의 설법에 의한 법열의 경지에 보답해서 가영공양삼매야, 즉 묘한 노래로서 공양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 가영은 법을 찬탄하는 것이기에 가영공양은 법찬미의 환희이다. 그러므로 이 가영공양이라는 법의 기쁨에 의하여 소리에 따라서 메아리지는 것처럼 제법의 진실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나는 너에게 영향을 주고 너는 나에게 영향을 주어서 서로서로 만들어가는 것이 모든 존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서로 통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연등을 만들기 위해 내가 만진 종이연잎의 물감이 손가락에 물들고, 내가 먹는 음식이 내 몸에서 소화되어 내 몸의 일부를 만들거나 활동의 원천이 되는 것은 나와 다른 존재 사이에 애초부터 아무런 장벽이 없음을 알려준다. 생명체인 나와 무생물인 색종이가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내 손가락에 물감이 들어올 리가 없으며, 나와 내 입으로 들어오는 식물과 동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이 소화되어 내 몸을 구성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남이라고 보았던 것들이 나에게 들어와 내 몸과 마음을 구성함을 바라볼 수 있다. 처음부터 내 것인 것은 없었고 모두 남으로부터 옮겨온 것뿐이다. 서로가 의지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진리, 어떤 하나의 존재는 그것이 있게 한 다른 모든 것의 결과이며, 동시에 다른 것들의 형성에 관여한다. 즉 너는 나에게 들어와 내가 되고 나는 너에게 들어가 너를 이룬다.
 
서로서로 영향을 주어 끊임없는 변화의 물결을 이루게 하는 것이 세상 모든 것의 본질이다. 나와 관련한 모든 존재는 나의 생성에 관여하며 나는 그 모든 존재의 생성에 관여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된다. 이렇게 세상 모든 존재들은 서로서로 연관되므로 세상만물은 하나의 큰 연기를 이룬다는 사실을 모든 존재는 흥에 겨운 감동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화엄경’에서는 “일체가 불법을 설한다”고 표현한다. 부처와 보살만이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지·수·화·풍과 산·나무가 설하며 구름과 개울물이 설하고 티끌·돌맹이·국토가 설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산하대지 일체가 불법을 설한다. 자연에서 우러나는 경이로운 울림이 바로 연기법을 설하는 묘법음이다.
 
묘법음을 상징하는 금강가보살은 서방 아미타불의 덕을 공양하는 보살로서 설법의 표치를 나타낸 것으로 아미타불의 가영삼매(歌詠三昧)에 상응한다. 이로 인하여 아미타불의 활동은 더욱 증장된다.
 
‘가영송(歌詠頌)’이란 미묘한 노래소리이므로 ‘삼십칠존례’에서는 묘법음이라 한 것이다.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볼 때 일체 소리는 묘법음이고 자수법락의 설법상이며, 묘한 노랫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래는 굳이 귀로만 듣는 것은 아니라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고유의 파장을 지니고 있다. 파장은 다른 존재에 전달되어 그 영향을 준다. 역으로 어떠한 존재는 다른 모든 존재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서로 상의상관하는 존재의 모습은 그 자체로 연기법을 설하는 법문이다. 깨달음을 얻게 하는 법문을 불교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가릉빈가새에 비유한다. 법의 희열을 얻게 하는 소리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 할 수 있다. 그 소리는 음률과 노랫말을 가진 노래처럼 되는 것이다. 노래의 요소로서 노랫말은 불법이라는 언어가 함축된 시(詩)이며 시의 감성을 노래로써 흘러넘치게 한다. 아름다운 글귀는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노래가 된 시는 음률과 더불어 경이로운 세계를 드러낸다. 그 시의 글귀는 수행을 통한 깊은 성찰을 통해서만이 노래로써 들을 수 있다.
 
온 산하에 울려퍼지는 부처님의 법음은 노래이다. 산이 노래하고 물이 노래한다. 지구라는 별이 노래한다. 이렇게 노래로 듣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자와 듣는 자가 함께 하모니라는 파장에 몸을 맡긴다. 부처님의 말씀인 진언은 이를 염송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가 동일한 울림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임을 알게 해 준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울림은 진언이 되어 울려 퍼지고 이를 듣는 수행자의 언어 또한 모두 진언이 되고 그 진언은 노래처럼 아름다운 음율을 갖고 울려 퍼진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 ‘나는 금강가이다. 나는 지금 시방삼세의 모든 불과 보살께 노래하여 찬탄한다. 미묘한 소리를 내니, 입 가운데로부터 나와 시방의 무량세계를 가득 채운다’라고 하는 것은 금강가보살에 의해 시방의 무량세계에 가득히 그 설법이 퍼져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중생은 일체의 사실에서 미묘한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지혜가 증장됨에 따라 점점 이를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약출염송경’에는 ‘금강가영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청정한 묘음을 얻는다’고 하며, ‘문수사리궤’에서는 ‘금강가영인을 결함으로 해서 속히 안인바라밀을 획득한다’고 그 인계의 공덕을 찬탄한다. 무량수불의 법열의 생활을 노래로 찬탄하는 금강가보살은 자성청정의 법열삼매로부터 일어나는 가영설법을 내증으로 하기 때문에, 이 보살의 진언을 염송하면 법열로 인한 묘락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금강가보살의 인계는 노래로 찬탄하는 음성인으로서 금강의 오묘한 노래에 상응하여 곧 금강의 묘가영을 얻는 것을 상징한다. 그와 같은 금강가영을 공후로써 상징한다. 성신회의 상은 흰색으로 왼손에 공후라는 악기를 가지고 오른손으로 이것을 타고 있다. 공양회는 공후를 얹은 연화를 양손으로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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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교수/위덕대학교